머리를 자른다. 아니 잘랐다.
작년 10월 째쟁이 미용실에서 자른 그런 것이 아니라, 아예 잘라 버렸다. 자르고 나니 시원하고, 시원해서 자꾸 만져지고, 만지다 보니 알 듯 모를 듯 이상한 슬픔 같은 것들이 꿈틀거린다.
째쟁이 미용실의 그 여자를 보러 갈까 어쩔까 생각만 한 달, 두 달 묵히고 또 묵히다가 아예 삭혀 버리고 옷을 벗었다.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거울 앞에 서니 교상하다. 덜렁거리는 그것이야 늘상 봐 오는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내 머리통이 저렇게도 크더란 말인가 하는 놀람이 있다.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잡아 뒤로 넘기니 머리는 다시 조그맣다. 그러면 그렇지. 내 머리가 그렇게나 클 리가 없지. 그나저나 많이도 길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뒤로 돌려 잡아서 묶을 수도 있겠다. 일명 꽁지머리라는 거, 그것이나 한 번 해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어쩌랴. 째쟁이 미용실의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도 발이 안 내키고, 그렇다면 내 손으로 잘라야자. 잘라 버려야지.. 작년 재작년에 일금 오천냥을 투자해서 산 일명 바리캉을 들고 스위치를 올리니 윙, 윙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처단하는데 어인 슬픔 같은 것이 머리카락보다 먼저 떨어진다.
“어, 머리 잘랐네?”
하면 깜딱 반가워서
“어떻게 알았어? 나 어때? 이뻐?”
하던 어떤 여자 아니 그녀가 눈앞에 불현 떠오르고,
뒤를 이어 넌 어디서 잘 살고 있냐? 하는 질문 아닌 질문이 목구멍을 간지른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여자는 머리를 만진 뒤에 남자가 그것을 알아주면 기뻐한다.
이런 말, 이런 생각이 무슨 잠언이나 진리의 핵심처럼 내 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면 남자는?
음, 뭐 별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남자가 머리를 손질했을 경우 그의 여자는 거의 틀림없이 그것을 알아보고 몇 마디 코멘트를 해준다. 훨씬 잘나 보인다거나 이거는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속상하다거나 등등 뭐 최소한 한두 마디는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몇 시간씩 거기에서 빠져나가질 않는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의 머리 변화를 발견하기도 하고 못 발견하기도 하고 며칠이나 지난 뒤에서야 발견하고 어라? 언제? 하기도 하고 뭐 한마디로 말해서 제멋대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즉각 자신의 머리 변화를 발견하면 내우 기뻐한다.
이거야 뭐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그저 내 관점이 그렇다는 것뿐이고,
여튼 머리를 잘랐다.
내가,
싹뚝, 아예 삭발을 해 버렸다.
무슨 비장한 각오가 있어서? 삭발투쟁을 벌여야 할 일이라도?
글쎄다.
내 안의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야겠는데 이게 안 나온다.
아니면, 어쩌면, 내 안의 무엇인가를 추방해야겠는데 이게 잘 안 돼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저런 이유 따위가 먼 의미 있으랴.
그런데 이게 생각해보니 그렇다.
삭발이라는 행위는 썩 재미난 퍼포먼스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철부지 꼬맹이 시절 이후 머리를 완전히 잘라 버리기는 이번으로 아마 네다섯 차례쯤 되지 싶은데 그러고 보면 나는 아마 삭발에 맛을 들인 것 같기도 하다.
뭔가가 후련하고, 상큼하고, 날아갈 것 같은, 그러면서도 약간의 슬픔과 침울과 엄숙이 절묘하게 마치 페르시아 융단처럼 어울리는 거, 그런 느낌.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두자.
슬픔과 우울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할 거다. 그래, 그러려무나. 미쳤다고 하려무나. 그리하여 나는, 미친놈이 되었느냐?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모호한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내가 나를 의식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는 거.
그러니 자네가, 당신이, 그대가 제아무리 나를 미친놈이라 하여도 나는 미친놈이 아닌 것이 되는 거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사랑하지 않고는 삶을 볼 수 없다고.
이게 먼 자다가 구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실 할 말 없다. 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렇게, 혹은 이렇게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꼭이 무슨 이유를 붙여야만 속이 터지겠니? 그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