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대체 무엇하는 물건(?)인 것이냐.
요새 내게 이런 괴상한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 이것은 백번을 돌아봐도 괴상하기 짝이없는 의문이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껏 철학의 개념조차 못 잡고 있더란 말이냐, 뭐 이런 따위 되돌이표가 붙어서는 아니다.
내가 새로 이사한 집 옆집에 정년을 앞둔 육십대의 철학교수가 산다. 아니다. 사는 건 아니고 토요일이나 공휴일 날 부부가 와서 하룻밤 자거나 혹은 동료며 제자들이며 잔뜩 몰고 와서 놀다가 가는 정도의 그런 집이다. 그런데 나는 그 노 철학교수의 뒤를 볼 때마다 그런 의문에 사로잡히곤 한다.
철학이란 대체 뭐냐? 그들은 철학의 이름으로 뭘 배우고 뭘 가르치는 것이냐?
그 집에는 마당으로 가득 꽃들이 만발하다. 시뻘건 동백이 하나둘 뚝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매화에 산수유가 피고 백목에 자목에 새끼목련까지 목련이 화알짝 꽃을 열고 하얀 꽃 빨간 꽃 철쭉들이 한가득 흐드러진다.
뿐이랴. 바닥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온갖 초분류들이 또한 색색으로 모자이크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노교수께서 “아가야” 하고 부르는 아주 어린 학생서부터 “정박사” 니 “김박사”니 하고 부르는 삼사십 대부터 오륙십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쓰레기를 처분하는 곳이 없다. 어느 하루 "차나 한잔 하자"해서 들어가본 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른 의문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이 수십여 명씩 다녀가는 집이고 보면 쓰레기도 만만치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그것을 처리하는 장소는 없고 널따란 마당이며 후원이며가 온통 꽃나무들 뿐이다.
그 많은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나,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어느 하루 보니 마을 노인회관 앞 마당에서 안주인이 쓰레기를 태우고 있다. 아, 저렇게 처리해도 되나, 그런 잠깐의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이내 잊어 버렸다. 그곳은 어디까지나 사용하지도 않는(마을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노인회관 앞일 뿐이고, 내 집 앞은 아닌 까닭으로 나는 보는 순간 잠시 의아해하다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이내 털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의 일일 뿐 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공공질서에 관해 무심한 도덕불감증 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어랍쇼, 이건 또 무슨 일이더냐. 봄비가 추적거리는 토요일 오후 그 집에서 또 한 차례 잔치가 벌어졌다. 아마도 선운산이나 어디 무슨 산행을 나섰다가 우천으로 부득이 집안에서 먹을 것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수박이니 뭐니가 잔뜩 들려 들어가고, 풍천장어가 어떻고 복분자주가 어떻다는 둥 왁자지끌 소리에 질려버린 나는 아예 방으로 들어와서 비디오를 보다가 음악을 한껏 올려놓고 낮잠을 청하기로 했다. 괜히 눈에 보이는 곳에서 얼쩡거리다가 같이 한잔 하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소심한 두려움이 그렇게 도망이라는 방법을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음악은 모차르트의 혼 협주곡, 비는 부슬부슬 내리겠다. 있는폼 없는폼 갖은폼 다 잡고 커피도 홀짝거리고, 없는 연인도 옆에 있는 것처럼 착각도 하며 아스라이 또는 살풋하게 잠이 들락말락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말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던 옆집 사람들의 왁자지껄 소리 가운데 한 가닥이 느닷없이 바로 앞에서 들리는 듯한 느낌에 눈을 뜨고 문틈으로 마당을 내다보니 이게 뭐냐. 이십대 초의 사내녀석 둘이서 쓰레기를 한아름씩 가져다 내 집 마당에서 불을 붙이고 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거, 입에서 금방 그런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차마 문을 열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내가 이렇게 나가면 저들이 얼마나 무안할 것이냐, 하는 뭐 그런 구실이기는 했지만, 어쩌면 나는 아마도 그들 앞에 나설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쩌면 나에게 가할 무슨 폭력에 대한 대응방안으로서의 용기가 아니라, 도덕을 이미 벗어나 버린 그들에게 도덕의 이름으로 나설 명분이 다소 부족했다고나 할까, 뭐 그런 이유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그들이 쓰레기를 가져와서 불을 붙인 그 자리는 다름 아닌 내가 지난 두 달여 동안 집수리를 한다고 수선을 피우며 그때그때 나오는 쓰레기들을 태우고 했던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쩌면 자리를 파할 때가 되어 쓰레기를 모아놓고 보니 처분할 곳이 없어서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바로 그 곳을 발견하고는 아하, 여기가 쓰레기 소각장인가보다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그곳은 어쨌든 다른 집 앞 마당인데 아무려면 그런 생각을 할 수야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그들이 보통 괘씸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쓰레기에 이미 불은 붙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기로 했다. 까짓 쓰레기 한 번 태운다고 내 집 마당이 닳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뭐 그런 생각이었던 거다. 그런데 잠시 뒤에 나가서 보니 이게 또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건 소각용 쓰레기가 아니라 당연하게도 분리수거를 거쳐야 했던 뭐 그런 거다. 알루미늄 맥주캔에 은박접시에 수박껍질에 바나나껍질에 비닐봉지에 뭐에 쓰레기도 그런 너절한 쓰레기가 없다.
도대체 저 인간들은 무엇을 먹고살아 왔기에 소각이 가능한 것과 전혀 불가능한 것을 구별조차 못하고 그렇게나 한꺼번에 두루뭉술 뭉쳐다가 불을 붙이는 것이냐. 너희들은 진정으로 그것이 불에 타는 물건이라고 여겼던 것이냐. 어쩌고 저쩌고, 내 입에서는 듣는 이도 없는 그런 불평에 불만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아하, 철학, 관념철학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아련한 깨달음도 조금은 있었고 말이다.
각설하고, 이미 떠나버린 그들을 향해 나는 아마도 삼천 번쯤의 욕을 뱉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인가. 문제는 이제부터인 것이다.
나는 쓰레기 문제를 노교수 부부에게 언급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한다면 연장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조금씩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단호하게 치고 들어가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 양반들이 일전에 나더라 “차나 한 잔 하자”고 초대를 했었으니 나도 이제쯤은 답례 차원에서 “차나 한잔 하실까요”, 하고 불러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잘것없는 얘기로 시간을 좀 죽이다가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어지면 그때 넌지시 쓰레기가 어떻고 그렇게 얘기를 꺼내야 하나?
오, 도대체 이 무슨 빌어먹을 고민이란 말이냐. 왜 나한테 이런 느닷없는 고민 같잖은 고민이 발생한 것이냐 이거, 응?
그 교수 양반이 가령 세상이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기에 세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만 해준다면, 그렇게만 해준다면 오늘날 나 같은 사람이 이토록 어이없는 소모적인 고민으로 괴로워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그 양반들은 다른 것도 아니고 철학씩이나 가르치면서도 그런 것은 미처 인식을 못 하고 엉뚱한 내게 이런 느닷없는 고민이나 안겨주고 있으니 아하, 이게 무슨 유감이더란 말이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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