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는 역시 눈이 내려야 좋은데……. 하얀 눈이 나목들을 포곤하게 덮어
줄 때,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평온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보며 이웃을 돌
아보며 미래를 얘기하기도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데 이처럼 비가 내려버
리면, 벌거벗은 나무들을 마치 흔들어대며 못살게라도 구는 듯이 비가 내려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생
각하며 이 아득함을 이겨내는가.
나는, 나는 말야. 커피를 끓였어. 주전자로 하나 가득 우선 커피를 끓였어.
연하게, 보리차처럼 연하게 커피를 말야. 온 종일을 홀짝홀짝 커다란 머그잔
에 가득 채워서 들고 서성거리며 마셔도 남을 만큼은 될 거야, 아마.
음악은, 그래, 음악이 있어야 해. 음악이 없으면 아마 이런 날은 미쳐버릴
거야. 그렇지 않겠어? 그러면 무엇을 들어야 하나. 어떤 음악으로 나를 달
래고 나를 찾아야 하나.
이런 날 이런 때 내게는 내가 미처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손이 가는 이를
테면 거의 고정된 레퍼토리가 있어. 물론 집에 혼자 있을 경우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내 우울해진 영혼이 요구하는 몇 개의 음악이 있어.
시작은 대개 황병기야. 그의 가야금 작품 제1집. 2집이나 3집도 뭐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거야. 하지만 4집은 곤란해. 이런 날 이런 기분은 실험을 낯설
어하거든. 그래, 황병기의 작품 4집은 체내의 에너지가 충만할 때, 도전의식
이 분출할 때. 그런 때가 적절할 것 같애. 그러니까 4집은 피하고 1,2,3집
가운데 하나를 듣는 거야. 한 시간쯤.
그 다음은 안숙선의 구음(口音)이야. 죽은 혼을 살려내는 듯한, 안간힘을 다
해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켜세우는 듯한 그 입소리를 삼십여분쯤 듣다가 김
수철의 황천길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거야.
그리고는 명상으로 들어가지. 타이스의 명상곡, 지고네르바이젠을 거쳐 바
흐의 무반주첼로 가운데 몇 개의 트렉을 지난 다음 이윽고, 마침내, 차이코
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가는 거야.
끝도 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 사이를 달리는 마차 한 대를 떠올리면서 듣
는 거야. 그러면 점차 음악은 사라지고,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인지 음악이 내
가 되어 자작나무숲을 보는 것인지 하여튼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의식할 수
도 없는 상황이 되는 거야.
차이코프스키, 그 처절한 운명, 피속에 마치 저주가 흐르는 듯이 외롭기만
해야 했던 그의 일생이 마치 나 자신의 것인 양 가만히 가라앉은 거대한 두
께의 앙금처럼 내 영혼의 저 끝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한 느낌이
되는 거야.
당신도 아마 알 거야. 폰 메트라는 귀족가문 출신의 미망인으로부터 그토록
순결한 후원과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만나
기를 기피해야만 했던 차이코프스키의 운명을, 아마, 당신도 알 거야.
남자이면서도 여자를 사랑하기 어려웠던 그 숙명을 말야. 그래, 맞아, 우리
는 대개가 우연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만 차
이코프스키는 가장 민감하고 소중한 그 한 부분이 결락되었던 거야. 훗날의
전기작가들은 그것을 가리켜 동성애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런 용어만
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떤 것, 그 어떤 것을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하나를
더 갖고 태어났거나 혹은 아예 없었던 거야.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하기 좋은 말로 외로움?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 그래, 우선은 그렇게 말하기로 하자. 다른 적당한 용어를 찾기 어려
우니 그냥 그렇게 말하기로 하자. 외로움이라고.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도대체 이 외로움은 어디서 온 것이냐. 어
디에서 오는 것이냐. 이 아득한 질문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있을까? 절망하
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절망이 아닌 도전을
선택했던 거야. 그 뿌리를 파헤치겠다는,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그런.
요컨대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 내에서 자기
외로움의 뿌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그 일에 정진했던 거야. 비록 그 일
을 다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못했으면 또 어때. 인생이 너무도 힘들고 고통
스럽고 외롭고 아득해서 못살겠다고, 그렇게 절망이나 하고 그 절망의 너울
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려고나 하는 우리같은 못난이들에 비하면 그는 천 배
나 만 배나 살아 있는 사람답게 살았던 거지. 안 그래?
황천길의 김수철에게서도 나는 그와 유사한 길을 느껴. 얼마 전에 아내로부
터 강제이혼을 당한 김수철의 삶은 보기에 따라서는 절망 그 자체일 수도
있거든. 그런데 그는 안 그러잖아. 적어도 겉으로 자신의 그것을 드러내놓고
엄살을 떨지는 안잖아. 오히려 더욱 열심히 작품을 하고 있잖아. 안숙선이
걸어온 길도 그렇고, 황병기는 또 어떤데. 서울대 법과대학이라는, 세속적인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버리고 보다 깊고 넓은 외로움을 선택한 황병기 말야.
나는 그래. 오늘처럼 이렇게 겨울비가 내리는 날에는 커피를 엷게 해서 끝
도 없이 한도 없이 홀짝거리며 내 운명의 현재위치를 느껴보고는 해. 막연하
게 그냥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냉철하게 점검하는 것도 아니고 느끼는 거야.
그냥, 그냥 느껴보는 거야.
나는 그렇다 하고, 당신은 어떠니. 당신의 근황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가끔
은, 우리가 살다 보면 그 왜 가끔은 그런 때가 있잖아.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 아주 가까이 느껴지면서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그래지
는 것 말야. 어쩌면 내가 그를, 또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인지도 몰라, 맞아,
정말로 그랬던 것 같아, 그래지는 그런 느낌 말야.
오늘, 지금 내가 그래. 내 영혼이 그렇게 촉촉해져 있어.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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