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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렇습니다. 그것은 실로 꿈이었고, 꿈속에서의 환상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해서 꿈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 내가 한순간 놓여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만일에 그런 상태였다면 그 뒤로도 한동안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더할나위없이 맑은 정신으로 뽀얗게 물들어 가는 새벽의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새들이 벌써 숲속의 여기저기에서 지저귀고 있는 그 오래된 사찰의 어둠침침한 뜨락에서 무연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옛 시인들의 노래가 마치 나 자신의 창작인 듯 자꾸만 떠올라오고, 그리고 당신은 본래가 나와 한몸이었던 것처럼, 당연히 와야 할 사람이 이제 와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어떤 회한이나 안타까움도 없이 스스로 무한히 겸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만일 중국 성당(盛唐)시의 이백(二白)의 시와 그의 생애에 대해서 얄팍하나마 귀동냥을 해둔 게 전혀 없었다면 아마 그런 꿈을 꾸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태백이와 관련된 꿈을 그때 처음 꾼 것은 아니었지요.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백의 시와 그 생애에 관한 가십성 이야기들을 수집해서 줄줄이 외고 있었으니까요.
그 시의 품격이라든가 미학적인 측면들과는 어쩌면 전혀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르는, 이를테면 현종(玄宗)의 초청을 받아 궁정 출입을 하면서 양귀비에게 벼루를 들고 있으라는 등 하녀처럼 부렸다는 일화에서부터, 당대의 실력자 고역사(高力士)의 면전으로 불쑥 발을 내밀며 신발을 벗기라고 했다는 그 도도한 배포와 순정성에 관한 삽화들을 나는 마치 어린 학생들이 일본 만화의 캐릭터를 수집해서 책가방에 넣고 다니듯이 머릿속에 가득 넣고 다니며 뭔가를 제법 많이 아는 척 거드름을 피우고는 했습니다.
혼자서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기웃거릴 때도 그렇지만 여럿이 있을 때도, 가령 술자리 같은 데서 말이죠. 목소리를 있는 한껏 높여서 정치를 비판하고 민족의 미래와 경제발전의 침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대단히 무료하고 심지어는 열등감까지도 느끼지만, 이태백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만 주어졌다 하면 나는 마치 혀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되는소리 안 되는소리 덮어놓고 쉴새없이 떠들어서 좌중을 압도하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의 나는 사실 어찌 생각하면 현실에서의 나 자신은 이미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뭐랄까요, 내가 마치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이태백이 활동하던 시절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태백을 비롯해서 두보라든가 양귀비, 고역사 등등 당대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내가 실제로 보고 있다는 느낌인 거였습니다.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아주 실감 있게, 그리고 통쾌하게 떠들어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실력자에게 발을 불쑥 내밀면서 신발을 벗기라고 했을 때 그 실력자의 표정은 사실이지 통쾌하기도 했었지요. 나에게 무슨 실력있는 사람을 시기하는 심술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마는, 그런데 또한 생각하면, 그것은 그저 시기심의 문제만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수천 수만, 수백 수천 만의 나름대로 실력있는 대중들을 벌벌 떨게 하는 사람이 신발 한 번 벗겨달라는 요구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마음에 통쾌함을 느끼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도 사람의 가슴이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이백이 남겨놓은 작품보다는 그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툭하면 그것을 술자리의 안주로 삼고는 했었습니다. 강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고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풍문에의 전설도 물론 기억하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랑에는 아마도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따르기 마련인 모양인가 봅니다. 이때의 슬픔은 회한도 아니고 정한도 아닌, 원망이나 반성의 마음과도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슬프되 고통스럽지가 않고, 내가 마치 정갈하고 따뜻한 물에 씻김을 당한 것 같은 그런 슬픔이라고나 할까요. 이를테면 그의 작품 가운데 월하독작(月下獨酌)같은 시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정갈한 슬픔 속으로 내 몸이 푸욱 잠겨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월하독작은 이태백이 달밤에 홀로 술을 마시다가 마당에 깔린 달빛을 보고 흥이 나서 달과 제 그림자를 벗으로 춤을 추던 중에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토해놓은 작품이지요. 그러니까 그날 밤의 나는 달밤에 홀로 술을 마시다가, 외로움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백의 그 시를 소재로 해서 꿈을 꾸다가 마지막에 당신을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무엇일까요.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인연에는 어떤 법칙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고 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법칙은 너무도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단순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래서 평생을 바쳐 도모해야 할 인생의 엄숙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신과의 만남은 그날의 꿈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꿈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자욱한 안개 속처럼 뿌옇고 시간과 공간을 마구 뛰어넘어 버리는 탓으로 정확한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가끔 나를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고 깊이 있게 추구하지를 못했던 것일 따름이었지요.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누구일까, 하다가 이내 잊어버리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무엇이 내 기억의 녹슨 자물쇠를 단호하게 부숴 주었는지 당신에 대한 과거의 그림들이 비교적 확연하게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잡으려 하면 달아나 버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하면 너무도 막막해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재생할 수 없는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말입니다.
돌아보면 그날 이후부터 나의 안타까움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나를 찾아왔으면서도 나를 만나지는 않고, 내가 달려가는 사이에 그만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나는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 중에 <어머니>의 일절을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꿈속에 자주 오시'라는 말로 문을 열고, '오시다가 행여 발길이 돌려지지 않을까 오다가 가시느냐'고 투정을 부리다가 '제 빛대로 살기 어려운 분분한 세상 켜켜이 쌓인 적막 달래주러 오시'라고 당부를 하고, 그리고는 '웃음속 눈물이 모여서 흐르며 자꾸 나를 지'운다는 처연한 협박(?)으로 마지막 아퀴를 딱 지어놓는 그런 시였지요.
그래서였을까요. 그로부터 열흘이 채 못된 어느 날 당신은 또 한 번 나를 찾아주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흐려서 달도 없었고, 내 자신의 그림자를 친구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건만 당신은 찾아와 주었습니다. 아아, 그러나 그날도 역시 나를 만나지는 않고, 내가 달려가는 사이에 당신은 가버리고 말았지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일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서로 옷깃을 스친 인연을 당신과 나는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해주십시오. 이제는 말해주십시오.
아아, 그렇습니다. 그것은 실로 꿈이었고, 꿈속에서의 환상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해서 꿈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 내가 한순간 놓여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만일에 그런 상태였다면 그 뒤로도 한동안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더할나위없이 맑은 정신으로 뽀얗게 물들어 가는 새벽의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새들이 벌써 숲속의 여기저기에서 지저귀고 있는 그 오래된 사찰의 어둠침침한 뜨락에서 무연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옛 시인들의 노래가 마치 나 자신의 창작인 듯 자꾸만 떠올라오고, 그리고 당신은 본래가 나와 한몸이었던 것처럼, 당연히 와야 할 사람이 이제 와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어떤 회한이나 안타까움도 없이 스스로 무한히 겸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만일 중국 성당(盛唐)시의 이백(二白)의 시와 그의 생애에 대해서 얄팍하나마 귀동냥을 해둔 게 전혀 없었다면 아마 그런 꿈을 꾸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태백이와 관련된 꿈을 그때 처음 꾼 것은 아니었지요.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백의 시와 그 생애에 관한 가십성 이야기들을 수집해서 줄줄이 외고 있었으니까요.
그 시의 품격이라든가 미학적인 측면들과는 어쩌면 전혀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르는, 이를테면 현종(玄宗)의 초청을 받아 궁정 출입을 하면서 양귀비에게 벼루를 들고 있으라는 등 하녀처럼 부렸다는 일화에서부터, 당대의 실력자 고역사(高力士)의 면전으로 불쑥 발을 내밀며 신발을 벗기라고 했다는 그 도도한 배포와 순정성에 관한 삽화들을 나는 마치 어린 학생들이 일본 만화의 캐릭터를 수집해서 책가방에 넣고 다니듯이 머릿속에 가득 넣고 다니며 뭔가를 제법 많이 아는 척 거드름을 피우고는 했습니다.
혼자서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기웃거릴 때도 그렇지만 여럿이 있을 때도, 가령 술자리 같은 데서 말이죠. 목소리를 있는 한껏 높여서 정치를 비판하고 민족의 미래와 경제발전의 침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처음에는 대단히 무료하고 심지어는 열등감까지도 느끼지만, 이태백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만 주어졌다 하면 나는 마치 혀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되는소리 안 되는소리 덮어놓고 쉴새없이 떠들어서 좌중을 압도하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의 나는 사실 어찌 생각하면 현실에서의 나 자신은 이미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뭐랄까요, 내가 마치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이태백이 활동하던 시절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태백을 비롯해서 두보라든가 양귀비, 고역사 등등 당대의 인물들과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내가 실제로 보고 있다는 느낌인 거였습니다.
때문에 나는 이야기를 아주 실감 있게, 그리고 통쾌하게 떠들어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실력자에게 발을 불쑥 내밀면서 신발을 벗기라고 했을 때 그 실력자의 표정은 사실이지 통쾌하기도 했었지요. 나에게 무슨 실력있는 사람을 시기하는 심술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마는, 그런데 또한 생각하면, 그것은 그저 시기심의 문제만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수천 수만, 수백 수천 만의 나름대로 실력있는 대중들을 벌벌 떨게 하는 사람이 신발 한 번 벗겨달라는 요구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마음에 통쾌함을 느끼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도 사람의 가슴이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이백이 남겨놓은 작품보다는 그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툭하면 그것을 술자리의 안주로 삼고는 했었습니다. 강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고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풍문에의 전설도 물론 기억하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랑에는 아마도 까닭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따르기 마련인 모양인가 봅니다. 이때의 슬픔은 회한도 아니고 정한도 아닌, 원망이나 반성의 마음과도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슬프되 고통스럽지가 않고, 내가 마치 정갈하고 따뜻한 물에 씻김을 당한 것 같은 그런 슬픔이라고나 할까요. 이를테면 그의 작품 가운데 월하독작(月下獨酌)같은 시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정갈한 슬픔 속으로 내 몸이 푸욱 잠겨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월하독작은 이태백이 달밤에 홀로 술을 마시다가 마당에 깔린 달빛을 보고 흥이 나서 달과 제 그림자를 벗으로 춤을 추던 중에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토해놓은 작품이지요. 그러니까 그날 밤의 나는 달밤에 홀로 술을 마시다가, 외로움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백의 그 시를 소재로 해서 꿈을 꾸다가 마지막에 당신을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무엇일까요.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인연에는 어떤 법칙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고 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법칙은 너무도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단순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래서 평생을 바쳐 도모해야 할 인생의 엄숙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신과의 만남은 그날의 꿈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꿈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자욱한 안개 속처럼 뿌옇고 시간과 공간을 마구 뛰어넘어 버리는 탓으로 정확한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가끔 나를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고 깊이 있게 추구하지를 못했던 것일 따름이었지요.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누구일까, 하다가 이내 잊어버리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무엇이 내 기억의 녹슨 자물쇠를 단호하게 부숴 주었는지 당신에 대한 과거의 그림들이 비교적 확연하게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잡으려 하면 달아나 버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하면 너무도 막막해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재생할 수 없는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말입니다.
돌아보면 그날 이후부터 나의 안타까움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나를 찾아왔으면서도 나를 만나지는 않고, 내가 달려가는 사이에 그만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나는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 중에 <어머니>의 일절을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꿈속에 자주 오시'라는 말로 문을 열고, '오시다가 행여 발길이 돌려지지 않을까 오다가 가시느냐'고 투정을 부리다가 '제 빛대로 살기 어려운 분분한 세상 켜켜이 쌓인 적막 달래주러 오시'라고 당부를 하고, 그리고는 '웃음속 눈물이 모여서 흐르며 자꾸 나를 지'운다는 처연한 협박(?)으로 마지막 아퀴를 딱 지어놓는 그런 시였지요.
그래서였을까요. 그로부터 열흘이 채 못된 어느 날 당신은 또 한 번 나를 찾아주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흐려서 달도 없었고, 내 자신의 그림자를 친구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건만 당신은 찾아와 주었습니다. 아아, 그러나 그날도 역시 나를 만나지는 않고, 내가 달려가는 사이에 당신은 가버리고 말았지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일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서로 옷깃을 스친 인연을 당신과 나는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해주십시오. 이제는 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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