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믿기 위하여
언제쯤이었을까.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을까.
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움머어, 하고, 굵으면서도 가냘픈, 뚝뚝하면서도 건조하고 애절한
울림을 자아내는 소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길게 마치 강아지풀로
귀를 간질이듯이 내 의식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무엇인가 까끌까끌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따뜻하면서도
겨울바람처럼 신선한 것이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훅훅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따뜻한 것이 차차로 명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거대한 어떤 것이,
축축하면서도 까끌까끌한 그것이 소의 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서 앉으려다 말고 도로 쓰러졌을 때,
소는 그 커다란 눈을 끔뻑, 끔뻑하면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멀리 하늘을 향해 움머어, 소리를 내고는
다시 내 쪽으로 그 긴 혀를 내밀었다.
내 몸을 지탱하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무기력하고,
딱히 어디랄 것조차 없이 신체의 여기저기가 아픈 것도 같고 쓰라린 것도 같고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이 소가 대체 무슨 소란 말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갖고 다시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그러나 내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일어나서 똑바로 앉기는커녕 눈이 자꾸 감겨지고 있었고,
사물이 밝아졌다가 희미해졌다가,
세상이 온통 그것뿐인 것처럼 두 눈으로 가득 소의 긴 혀만 보았다가
뚱그런 눈만 보였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미타불.”
그때 어디선가 목탁소리가 들리고, 뒤를 이어 염불소리가 들렸다.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착각일런지도 몰랐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어쩌면 나무와 나무가 서로의 몸을 비벼대는 소리를
사람의 소릴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죽어가고 있는 중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토록 소망했던 죽음을,
생각을 골똘히 할 때는 차마 시행을 못하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온갖 핑계로 유보해 왔던 그 죽음을,
뜻밖에도 이렇게 꿈처럼 맞이하고 있나보다, 그런가보다.
“못난 놈. 손도 대지 말고 내버려 둬라. 저대로 죽어가게.”
“그러지 마요, 엄마.”
“미친년, 날더러 뭘 그러지 말란 게냐.”
이 소리도 아마 새들의 소리일 게다.
새들이 소리가 사람의 소리로 들리는 것일 게다.
아직도 나는 새들의 소리를 사람의 소리로 잘못 듣고 있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역시,
역시 아직도 나는 죽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힘을 다해 눈을 뜨고 살펴보니,
하늘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있고,
낙락장송이라고나 해야 옳을
거대한 소나무의 삭정이에 꼬리 달린 가오리연(鳶)이
하나 걸린 채로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소나무 밑에서 죽어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소나무 밑에서 죽어간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자 왠지 편안하고,
사과를 깎던 송화와 채연이 그리고 빵긋이 웃는 얼굴의 그녀가
시나브로 떠오르면서 저절로 눈이 감겨졌다.
그때 소가 다시 한 번 움머어,
소리를 내며 그 길다란 혀로 내 얼굴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는 다시 눈을 뜨고,
희미하게 흔들리는 소의 형체를 따라 머리에서 몸통 쪽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소의 꼬리가 있는 쪽에 누님의 얼굴이
액자에 박힌 그림처럼 허공에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가,
어머니의 옆에는 법운스님이,
또 그 옆으로는 송화와 채연이
그리고 난이의 얼굴들이 지난 시절의 희미한 추억처럼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어슷하게 서 있었다.
“못난 놈, 죽으려면 어서 죽지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엄마는 정말, 그러시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뭘 그러지 마 이년아. 너도 이놈이랑 같이 죽고 싶은 게냐.”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환각을 피해서 달아나다가,
도망을 하다가 낭떠러지에서 실족을 했던 모양이었다.
지난 날 내가 나를 묻어버리겠다고 들고 왔던 삽을
누님의 곁에서 보란 듯이 내던졌던 그 낭떠러지의
병풍 같은 바위가,
그 바위의 어디쯤에서인가
그때 내가 내던졌던 삽이 말뚝처럼 꼿꼿하게 박힌 채로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듯한 착각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성문독각이로다, 성문독각이야, 어흠, 아미타불.”
법운의 그 소리는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 나를
축도하는 것도 같고,
실패한 나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도 같았다.
부처의 설법을 잘못 들은 자가
그 뜻의 깊이는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단어의 의미만을 파헤쳐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방종을 떠는,
그리하여 지독한 독선에 빠진 상태를 성문독각이라 이른다 했던가.
그러니까 그 말은 결국,
무엇을 알기는 하되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앎과 행동이 일치하지도 못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까지도 속이는,
나중에야 그것을 깨닫고 아차, 아차,
속으로 무한히 후회를 해보기는 하지만
그 후회조차도 자만심 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고
스스로 인정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는
상태를 뜻하는 것일 게다. 그럴 게다.
아아,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하지만,
나에게 내 자신은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이치만큼이나
소중하고 그래서 진리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 곁에 없을 때도, 아무도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때에도 나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일까.
아니지. 아니겠지.
내가 없으면 타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이 없으면 나 또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래, 인정하자.
인정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은 피할 곳이 없다.
나는 이토록이나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졌는데,
피할 곳이 어디며,
피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냐.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공포심을 이겨내지 못해서,
죽음과의 정면대결에 자신이 없어서
아예 죽음 자체가 되어버리기를 소망했던,
소망하는 척했던 지난 날의 얄팍한 피난전략은 이제 여지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비밀도 아닌 것이 대단한 비밀인 척 포장을 하고
거드름을 피우던 내 영혼의,
내 앎의 일그러진 진실은 본래가 그처럼 허약했던 것이다.
허약한 진실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내 육체의 살고자 하는 펄떡펄떡 뛰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육체의 살고자 하는 그 에너지 속에
어머니의 오랜 슬픔의 입김이 없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조용히 흐르는 누님의 눈물이
내 생명의 원소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나를 추방했던 송화와 채연이,
난이와 누이동생 혜수,
죽어야만 했던 정혼녀와 법운스님을 비롯해서
오토바이의 그 사내,
한때 아내였던 여자와 그 여자의
새 남편이 된 후배 등등,
그 모든 사람들의 기침소리와 눈빛,
칭찬의 소리와 비난의 소리들이 섞여지고
버무러져서 내 육체의 살고자 하는 에너지로 편입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오오, 그러고 보니 나는 빚이 많구나.
빚이 많아.
이 많은 빚을 갚으려면,
나는 이제부터 아프지도 못하고 미치지도 못해야 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내 육체에서는 갑자기 에너지가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왼팔의 팔꿈치를 땅에 댄 채로,
그것을 기둥 삼아서,
옆구리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누님이,
아니 어머니였던가,
하여튼 여자가,
여자의 향기를 풍기며 나의 오른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소가 다시 움머어,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소리에 맞추듯이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바람이 살살 불고 있었고,
물이 가득 오른 소나무에서 송화 가루가 햇살에 뽀얗게 제 몸을 비벼대며 사방으로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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