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믿기 위하여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듯이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을 넣고 새벽같이 수심모텔을 나섰다. 그런 상태 그대로 수심모텔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머물러 있을 명분도 자신도 없었다.
결국은 떠나기로 했다.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쪽이 내게는 더 손쉬운 까닭으로 길을 나서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마경을 펼쳐보았다. 동체자비(同體慈悲), 그 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고 더불어 슬퍼하기에 앞서 내가 타인이 되어라.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그를 보고 나를 보아라.
해체된 둥지산 쪽에서 밤새 울어대던 소쩍새 소리가 내 귓전에 남아 있었다.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때로는 그 소리가 무슨 귀고리처럼 귀에서 덜렁거린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머릿속의 그녀는 빵긋이 웃고 있었다. 내가 걸음을 잠시 멈춰도 그녀는 빵긋이 웃고 있었고, 숨이 가쁘게 종종걸음을 걸어도 빵긋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렇게 영원히 빵긋이 웃고만 있을 것인가. 그래야만 하는가. 그녀가 빵긋이 웃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지금 어딜 가는 거죠?”
“은선암.”
“거길 왜 가는 거죠?”
“가봐야하니까.”
“왜 가봐야 하는 거죠?”
글쎄, 나는 왜 은선암을 가고자 하는 것일까. 거기에 뭐가 있지? 거기의 무엇이 나를 부르는가 말이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럴 때의 침묵은 비겁인 거예요. 사실은 나를 피해서 도망하는 거죠?”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은 내게 처음이었다. 신기해서 다시 보려고 했으나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무겁고 우울한 침묵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침묵이 너무 깊어서 가끔은 천둥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은선암 근처의 숲속 정경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내 영혼의 파편 한 조각을 내가 다시 찾아낸 것처럼 나를 안도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었을까. 정말로 그것이었을까. 그래,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향나무들, 그 사이로 무수히 쏟아지는 창끝 같은 햇살들, 햇살을 타고 일직선으로 비상하는 먼지의 미세한 알갱이들, 그렇게 하늘과 대지를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햇살의 통로를 따라 먼지처럼 비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추락해서 산산히 부서져 버린 내 영혼의 한 조각이 거기 어디에서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기는 했다. 모를 일.
갈대숲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작년에 살다가 죽은 갈대와 이제 막 삶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어린 갈대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뒤엉켜 있었다. 그 사이로 여치니 배짱이 따위 어린 곤충들이 먹이를 찾아 뛰고 있었고, 거듭남의 환희를 꿈꾸며 벗어놓은 뱀의 허물이 갈대의 밑둥에서 살랑거리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짓다가 중단한 목제선박 한 척, 그것은 팔 년여 전이나 다름없이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태어나서 제 역할을 맡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그것은 마치 세월의 공격을 온 몸으로 대항하는 늙은 장수의 모습으로, 또는 세월의 흐름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시간표의 모습으로 머리를 바다로 향한 채 갈대숲 한가운데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저 방치되어 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익숙하고, 또한 낯설었다. 갯물에 닿을 듯이 낮게 비행하다가 솟구치는 갈매기들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결코 예전의 그 갈매기들일 수는 없었다. 갯고랑을 따라 구불구불 갯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예전의 그 갯고랑이고, 그 갯물이었지만 결코 예전의 그것들일 수는 없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서, 내 뒤에서 누군가 은밀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걷고 있었다. 확실하게 걷고 있었다. 걷고 있는 내 안으로 누군가 은밀하게 발자국 소리로 노크를 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들어오는 숨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근육의 미세한 꿈틀거림 따위들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갈대숲을 지나 비탈을 오르고 있을 때 내 안의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천천히 걸어, 천천히.
나는 천천히 걸었다.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와 칡넝쿨들 속으로 나는 천천히 들어갔다. 숲은 분명히 예전의 그 숲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예전의 그 숲이 아니었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들어가도 기억속의 그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은 낯익은 길이었지만 거기 어딘가에 있어야 할 낯익은 은선암은 어디에도 없었다.
숲은 점차로 빽빽해지고, 어둡고 하늘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시위를 떠나 땅으로 내려 꽂히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햇살이 금세라도 피부를 뚫고 들어올 것처럼 도처에 우뚝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은선암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동굴처럼 어둠침침한 숲속을 얼마나 헤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서 홀연 담배냄새가 풍겨왔다.
약초를 캐러 다니는 할아버지가 거대한 너도밤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은선암을 물었다.
“은선암? 은선암을 찾는 중이라고? 그러니까 은선암이란 말이지?”
할아버지는 연거푸 반문을 하다가는 히죽이 웃고 있었다.
“요새도 은선암을 찾는 사람이 있었던가. 허허 그것 참, 아니 은선암은 찾아서 뭐하게?”
“네? 아 네, 그러니까 그게,”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더듬거리다가 끝내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마음이 무거운 사람이로구먼.”
“맞습니다. 제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왜 태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태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무겁습니다.”
“바보로구먼.” “네?”
“자네는 이미 알고 있어. 알면서도 모른다고 응석을 부리는 게야.”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 흐흠, 그런데 어쩌누. 은선암은 지금 이곳에 없어. 한 오백 년쯤 됐을 거야, 아마. 불에 타버린 지가. 왜구들이 와서, 금불상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죄다 불을 질러버렸거든.”
“아니 무슨 그런?”
“나도 잘은 몰라. 전해오는 얘기가 그렇다는 것뿐이지. 이쪽으로 곧장 한 번 올라가봐. 가다 보면 굴이 하나 있을 게야. 그 굴 안에 미륵상이 하나 모셔져 있거든. 그게 오백 년 전 은선암이 불에 타고 남은 유일한 불상이라더군. 나도 본 적은 없어. 다만 그렇다는 얘기가 있다는 것일 뿐이지. 가봐, 한 번.”
뭐 이런 실성한 할아버지가 있나,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가 다시 할아버지를 보고자 고개를 돌렸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할아버지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인가? 꿈인가? 헛것을 봤었는가? 아니면 내가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인가?
놀라서 허둥지둥 좌우를 둘러보니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아까는 볼 수 없었던 길이 하나 열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서 흔들리는 굵은 동아줄처럼 구불구불 길게 산 봉오리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무턱대고 그 길을 따라서 달렸다. 그러자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열리면서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었다. 거센 폭풍에 어둠침침한 천막이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린 것처럼 머리 위쪽이 휑하게 뚫리면서 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치 바람에 날아가는 천막의 끈을 잡은 채로 허공으로 들리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달리지만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행해 죽어라고 달려간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새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지상에서는 발자국 하나조차도 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완벽하게 내가 지워져 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 쫓아가는 거죠. 아니면 달아나는 건가요.”
빵긋이 웃는, 말을 할 때면 얼굴이 웃음 자체가 되어버리는 그녀가 빽빽한 떡갈나무 사이에서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뒤쪽으로부터 쏟아지는 부신 햇살을 거느리고 오리나무 하나를 비켜서서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을 한 번 떼어놓을 때마다 들려오는 파삭파삭 건조한 낙엽 밟는 소리가 내 귀에서 천둥처럼 공명하고 있었고, 하늘에서 무슨 거대하고도 접착성이 강한 그물 같은 것이 내려와서 나를 순식간에 휘감아버린 것처럼 나는 손가락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금방이라도 내 가슴을 쩍 갈라서 심장을 꺼내놓기라도 할 듯이 성큼성큼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뒤로 물러서고자 했지만 꼼짝을 할 수가 없었고, 헛된 몸짓으로 안간힘을 다하다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남천참묘(南泉斬猫)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여쁜 고양이를 놓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제자들의 꼴을 보다 못한 남천스님이 커다란 칼로 고양이를 쳐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외출에서 돌아온 또 다른 제자가, 후일에 조주스님으로 알려지게 되는 그 제자가 고양이 이야기를 듣고는 껄껄껄 웃으면서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스승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남천스님은 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수심모텔에서 참선을 한답시고 결가부좌까지 틀어놓고 있을 때는 한 번도 생각나지 않던 그 공안(公案)이 어째서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우두커니 그냥 서 있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던 것인지,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인지 기억조차 애매한 그 엄청난 이야기가 내 기억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부터가 실은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지만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실눈을 뜨고 살펴보니, 그녀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녀가 있던 곳에는 이제 막 연노랗게 움을 틔워내는 오리나무가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오리나무의 꼭대기에서, 칼로 두 동강이가 난 고양이가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걸려 있는 그림이 잠깐 눈에 잡히다가 사라졌다. 이게 뭔가? 어이가 없어서 오리나무에 등을 대고 털썩 주저앉는 참인데 또 다시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나를 죽여줘요. 제발 나를 좀 죽여줘요.”
나의 옛 정혼녀가 칡넝쿨을 손에 들고 서서 목을 길게 내밀고 있었고, 오리나무에는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죽은 고양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누이동생 혜수가 오리나무에 등을 대고 두 다리를 쫙 벌리고 퍼질러 앉아 식칼을 갈고 있었다.
이게 뭐냐. 또 헛것인 것이냐?
나는 아마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뛰기 시작했을 것이다. 혀가 갈라지는 소리를, 아니 목구멍이 찢어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돌아서서 어디랄 것도 없이 그냥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달렸는지, 어느 쪽으로 달렸는지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와중에서도 돌아서지 말아라, 돌아가지 말아라, 하는 숲의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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