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집을 짓고
법운은 자신의 딸이 실제로 그 자신의 딸이라고 했다. 거리에서 발견하고 데려다가 기르며 딸이다 아들이다 하는 어머니의 경우와는 달리 실제로 연애를 해서 낳은 피붙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아이의 존재를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흐르는 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서 가듯이 정처를 못 구하고 떠돌던 중에 여자를 만나 잠시 머물며 연애를 했고, 그리고 얼마 뒤에 말없이 여자를 떠났다.
절도 없이 떠돌던 중이 다 허물어져 가는 절간을 발견하고 자리를 잡은 지 칠 년째 되던 해에 인사 없이 헤어졌던 옛 여인이 그를 찾아왔다. 아주 마음에 드는 혼처가 나와서 결혼을 해야겠는데 딸아이가 발목을 잡는다는 게 그녀가 그를 찾아온 이유였다.
“나는 첫눈에 그 애를 알아보았지. 오, 이 녀석이 내 딸이로구나,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다.”
법운은 전에 없이 무거운 억양으로 말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달리 할 말도 없고 해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데 이 녀석이 머리가 너무 좋아. 너무 좋다는 건 뭐냐.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회자되는 허사는 아니란 말이거든. 그렇지 않으냐?”
“아, 네.”
“그렇다고 내가 그 녀석을 내 재산으로 간주하고 내 멋대로 관리하자고 들 수는 없는 일이거든. 모름지기 부모의 역할이란 그 자식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선택했다거나 혹은 그런 길로 빠졌을 때 그 길을 막아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아, 네. 그렇겠군요.”
“녀석이 열 살이 넘어 열두 살이던가 셋이던가 그 무렵부터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흔히 하는 말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하는데 녀석은 그런 차원이 아닌 거야. 내가 무엇을 가르치면 녀석은 다음날 그것을 뒤집어 버려. 내가 저에게 가르친 것은 잘못 되었다는 거야. 이를테면 우리는 대체로 도둑놈은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그 녀석은 도둑놈을 나쁘다고 봐야 할 근거가 취약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둑놈은 도둑놈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식이야. 세상에 태어난 자가 살아가기 위해 행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거지. 이런 식이다 보니 녀석의 나이 열다섯을 넘어설 즈음에는 내가 그만 녀석의 제자 형국이 되고 말았다. 녀석이 지금 카운터를 보고 있는데 그것도 내가 녀석에게 굴복한 증거 가운데 하나지. 세상에 어떤 아비가 제 딸년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그런 일을 시키려 들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아, 네. 속이 많이 상하셨겠네요.”
“아니,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나는 속이 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기쁘다. 왜냐하면 녀석은 나를 끝없이 흔들어 깨우고 있거든. 어쨌든, 어쨌든 말이다. 내 딸년은 지금 이름이 없다. 녀석이 스스로 그렇게 선포를 했지. 누군가 저에게 이름을 주기 전에는 이름도 없고,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그러니 앞으로 예전의 이름으로 저를 부른다거나 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지 뭐냐. 나는 처음에 이 녀석이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가 했는데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거야. 너는 소설을 운운할 정도이니 아마 김춘수라는 시인을 알 거다. 그렇지?”
“아, 네. 김춘수, 그 이름과 관련된 거라면, 그렇다면 꽃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래, 맞다. 꽃이다. 그놈의 꽃이 내 딸년을 아주 깊이를 알 수 없는 지경으로 꼬나박아 버린 것 같다. 나는 속세에서 읽혀지는 시는 잘 모른다만 딸년 덕택으로 그놈의 꽃은 지금도 달달 외고 있다. 들어볼래? 내가 그를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어떠냐. 내가 틀리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아, 네. 틀리지 않습니다.”
“이놈아, 너는 어째서 그렇게도 ‘아, 네. 아, 네’ 그것밖에는 말을 못하느냐. 맹추 같으니라고. 어쨌든, 어쨌든 말이다. 어떠냐. 네가 그 녀석에게 이름을 하나 줘보지 않을 테냐. 자살을 구실로 살아날 구멍이나 찾고자 하는 그놈의 소설이다 뭐다 그 음흉한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보다는 그 편이 떳떳할 것 같지 않으냐. 네놈이 가령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따위 성문독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까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꽃은 연애시가 아닙니다. 나는 얼결에 그 말을 내놓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꽃이 단순한 연애시라는 생각으로 법운이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터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무슨 말로 법운의 말에 응대를 해야 하는가? 그때 문득 탈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탈옥에 관한 이야기를 한 아름이나 마치 학위논문이라도 쓰려는 사람처럼 스크랩해 놓고 있는 여자.
“이런 멀대 같은 놈. 그래서 내가 지금 네놈에게 이런 묘한 이치를 설법하고 있는 게 아니더냐, 이놈아. 그 녀석이 탈옥수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아직까지 탈옥에 관한 이야기만큼 자신의 흥미를 동하게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 내 말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놈도 탈옥수와 같은 면이 있다 이거야, 내 얘기는, 아니, 아니지. 실상을 바로 보기로 하자면 네놈이야말로 탈옥수 중에서도 탈옥수지. 그럼, 그렇고 말고. 어떠냐. 이제 뭔가를 좀 알겠느냐.”
“제가, 제가 탈옥수라고요?”
“그러면, 네놈은 네놈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네놈은 일단 죄인이고, 죄인이면서도 감옥에는 있지 않고 염치 좋은 나그네 행세나 하고 다니는 네놈이 탈옥수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어디 말해봐라. 지껄여보란 말이다. 탈옥수가 아니면 네놈이 뭐냐 이 말이다, 응?”
나는 거기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텅 비어 있던 내 안의 무엇인가가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 참을 수 없는 뿌듯함을 더 이상은 견디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 한 줄이 흘러 내렸다. 그러자 법운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이런, 개망초도 못 되는 똘망초 같은 놈을 봤나. 아나 이놈아. 이것이나 훑어봐라.”
법운은 앉은 채로 내게 책 한 권을 던져두고는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글 번역본 유마경(維摩經)이었다. 점입가경이라더니 나를 대하는 법운의 태도가 꼭 그와 같았다.
문수보살과의 문답에서 깊은 진리를 체득하고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하는, 그래서 훗날 유마의 침묵이라는 깨달음의 성격을 간략하게 정의하는 말을 유포시키게도 만든 유마힐의 그 유마경을 법운이 내게 던져준 연유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채로 나는 며칠 동안 그것을 뒤적거리다가 그만 덮어 버렸다.
정신이 너무 혼미한 탓인지 눈에 들어오는 글자도 없거니와 머릿속에 새겨지는 문장도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허공에 궁전을 지을 수는 없다”, 그 한 마디만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서 툭하면 마치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생각나곤 했다.
유마가 병이 나서 거동을 못하게 되자 붓다가 문수보살을 병문안 보내었다. 문수가 묻기를 “거사의 병은 어디의 무엇으로부터 연유된 것이오니까.” 유마 답하기를 “중생이 병에 걸려 내가 병에 걸렸나이다.” 이에 문수 경탄하기를 “오, 참으로 보살의 병이로소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하나일 뿐이다, 라고 했는데 진리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까닭은 무엇인가.” 문수보살 해석하기를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오이다.” 그리고 이어서 유마에게 묻기를 “거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나이까.” 이에 유마는 입을 굳게 다물고 <천둥 같은 침묵>으로 응대하더라.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써 말을 삼는,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거기서 또 천둥소리보다 더 큰 울림을 얻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선인들의 그런 지혜는 언제나 어디서나 되새기는 맛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내 영혼이 일차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런 차원의 것은 아닌 듯했다.
어쩔 것인가. 법운이 왜 내게 유마경을 던져주었는가 하는 문제조차도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내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영혼의 눈뜸이 아니라 육체의 변덕스러움에 당혹스러워하는 양심의 소리를 끄집어내서 제 자리를 찾아주는 일인 것 같았다. 너무도 잔망스러운 내가 어찌 감히 깨달음을 희구하며 무릎 꿇고 기도를 할 것인가 말이다.
그것이었다. 저 높은 곳의, 올려다보기도 두려운 깨달음이란 이름의 고지를 포기하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내게 당장 진실로 필요한 게 무엇이냐 하는 문제들이 비교적 선명하게 한두 가지로 압축되어 다가온다는 그런 대단하게 안정된 느낌이 있는 것이었다.
흐르는 물을 따라 그 끝에까지 가볼 것인가. 아니면 흐르는 물을 거슬러 그 근원에까지 도달한 이후 마침내 나 자신을 흙과 물이 되게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흐르는 물을 막아놓고 그 속에 나를 담갔다가 뺐다가 그러기를 되풀이하며 스스로 지쳐서 쓰러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하는가.
어느 것도 흡족한 길은 아니었다.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한 불만은 어디에서나 내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불만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눈을 감아버릴 것이냐, 아니면 두 눈 부릅뜨고 산꼭대기로 집채 만한 바위를 밀고 올라가는 따위 만용을 부려볼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한 그 어느 쪽도 하찮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말장난이다 뭐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실은 쓰레기 축에도 못 드는 공상의 파편일 수 있었다. 행동이 받쳐주지 못하는 관념이라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
나는 있는가? 도대체 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불현듯 궁금해서 손톱으로 꼬집어보면 그 자리가 아팠다. 그러니까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있으면서도, 그렇게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나는 용기 있게 과감히 나서지를 못하고 생각이 없는 생각에 잡혀 허둥거리고 있었다.
며칠이나 흘렀는가. 나를 스쳐간 그 시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수심모텔 삼백십삼 호실, 나는 이제 그곳의 장기투숙자가 되어,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 아래로 벌거벗은 채 해체되어 가는 시뻘건 둥지산을 쳐다보다가 하릴없이 유마경을 뒤적거리는 체해보다가, 뒤로 벌렁 드러누워 허공에 집을 짓다가 허물어 버리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둥지산은 이제 거의 해체되어 옛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중앙으로 완전히 도랑 같은 길이 뚫려서 흙을 실은 트럭이 그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산은 그렇게 거의 떠나가고 있었지만 새들은 아직 떠나갈 장소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녁이면 그쪽으로부터 아스라이 소쩍새 소리가 들렸다.
소쩍새. 나는 빵긋이 웃는 그녀의 이름으로 소쩍새는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썩 그리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두견이는 어떨까. 두견이, 아 그래, 이것이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서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무슨 소리에요.”
그녀는 예의 빵긋이 웃는 얼굴로, 그야말로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는 음성으로 꿈을 꾸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나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내 이름을 알지만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거든. 그래서 앞으로 나는 당신을 두견이라고 부르겠다, 이런 말이에요.”
그녀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는 내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더 이상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말을 알아듣고 이해한 것 같지도 않았다.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인가보다, 하고 일단 물러섰다가 잠시 뒤에 다시 시도해봤지만 그녀의 태도에 변화는 없었다. 다음 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리에요.”
내가 뭐라고 말을 건네면 그녀는 언제나 그 한 마디만을 나직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어떤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은 채로, 심지어는 의문문에 의문부호조차도 없이 그냥 마침표를 찍어버리고 있는 그녀는 마치 허공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완강한 경계의 분위기가 있었다.
너무도 낯설고 이물스러운 무엇인가를 대할 때의 태도 그것이었다. 그나마도 카운터에 앉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카운터를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그녀는 대외적인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 며칠이 지난 뒤에서야 나는 그동안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낯이 익어버린 사람에게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관심을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낯익은 사람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게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함을 느끼고, 그래서 그토록 살갑게 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주기는커녕 대화 상대로서의 자격조차 인정받고 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새로 오는 손님이라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빵긋이 아주 자연스럽게 매혹적으로 웃어주는 독특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침대방으로 드릴까요 온돌로 드릴까요, 침대는 물침대와 스프링식 이 있는데 어떤 것을 선호하시나요? 하고 물을 때의 표정과 목소리는 누구라도 다시 한 번 쳐다보지 않고는 그냥 돌아설 수가 없을 정도의 그야말로 뇌쇄적인 섹시함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아가씨 불러들일까요, 혹은, 남자를 불러 들릴까요? 하고 물의 때의 빵긋이 웃는 그녀의 표정은 수줍음과 당돌함이 사이좋게 동거하는 깨물고 싶을 정도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혼자 들어서는 남자를 상대로 몇 마디 의미없는 얘기를 주고받다가는 불현듯이 “어마마 아저씨 심심하세요? 심심하면 제가 같이 있어 드릴 수도 있는데”,하고 마치 뒤통수를 치듯이 느닷없는 소리로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해놓고 슬그머니 말꼬리를 삼킬 때의 그녀는 금방이라도 그 남자를 따라가서 알몸으로 함께 있어줄 것 같은 요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자를 따라가서 같이 있어주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거기에 그녀의 특징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금세 잊어 버렸다. 어쩌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의식을 못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카운터를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서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카운터에 있을 때는 아무에게나 빵긋이 웃기도 잘 하고 쫑알쫑알 말도 잘 하지만 그곳을 벗어났다 하면 입을 꾹 다물고 어느 한 곳만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식물 같은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럴 때의 그녀는 걸어도 걷는 것 같지가 않고 마치 몽유(夢遊)라도 하듯이 내부의 어떤 거대한 힘의 작용에 의해 바다로 연결되는 강물처럼 묵묵히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을 주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법운은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돼 가느냐고 묻는 법도 없었고 무슨 새로운 정보라든가 충고를 주지도 않았다. 얼굴을 볼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어쩌다 마주친다 해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망가들의 당당한 자세로 뚜벅뚜벅 다가와서는 그저 가볍게 눈인사나 한 번 하고 지나쳐버릴 뿐이었다. 나는 법운의 그런 태도가 처음에는 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으로 여겨져서 고마웠지만 고마움은 차츰 압력으로 다가왔다.
법운이 자신의 딸을 굳이 내게 맡긴다고 강조한 그 마음의 의도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딸의 문제에 관한 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방향을 못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걱정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초조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요컨대 그는 세상을 대하는 딸의 자세를 문제라고 여기고 있으면서도 그 문제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체념이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요란하게 흐르는 깊은 강물을 바라보며 시문을 읊조리는 나그네의 자세로 자신의 딸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법운은 순수하게 대승적인 입장에서, 승적을 박탈당한 땡초의 입장에서도 아니고 일반적인 삶의 방식에서 크게 일탈해 있는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아닌, 인간의 조건이라는 지극히 진부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십상인 그런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이냐 하는 질문에 내게 던져준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그날 법운으로부터 인간이 세상과 화합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뭐냐 하는 일종의 화두를 받은 것이 되는 셈이었다. 어긋남에서 어긋남으로 줄곧 반복되어 온 내 생의 삼십삼 년간을 엮어놓은 굴비 두름 보듯이 파악하고 있는 법운이고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어쩌면 여기에는 보다 깊은 내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은선암의 어머니나 혹은 은사골의 누님이 법운에게 그런 청탁을 넣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아니 어쩌면 극히 최근에, 어머니와 누님이 교대로 법운을 찾아다니며, 아니 어쩌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내가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어떤 계획을 세워놓고 지금 그것을 실행하는 중일 수도 있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뭔가. 나는 여전히 부처의 손바닥 안에서 철없이 날뛰는 잔망스런 목숨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인가? 내가 만약에 법운이 내게 준 화두를 중도에 파기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나는 아마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수심모텔에서 빵긋이 웃는 그녀를 관찰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녀의 생이 끝나든 내 생이 끝나든, 두 사람의 생이 똑같이 끝나든 어쨌든 나는 그녀의 곁을 끊임없이 맴돌며 그녀의 무관심에 괴로워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와 누님 그리고 법운이 합작해서 정해놓은 나의 미래 즉 나의 운명일 것이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나 자신의 미래를 나는 곱게 인정하고 거기에 몰입해야 하는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운명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거룩한 것이라고 자위하며, 체념하며,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따라 들어가야만 하는가?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30) (0) | 2021.03.08 |
---|---|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9) (0) | 2021.03.05 |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7) (0) | 2021.03.03 |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6) (0) | 2021.03.02 |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5) (0) | 2021.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