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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14)

어떤 남자

 

외로움에도 가령 끝이라는 게 있다면, 그 끝을 목격해버린 남자는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 누구도 죽이지 못하는 그런 남자를 대개의 여자들은 열광하고, 막연히 동경하며 거기가 어디든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개의 여자들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그런 남자를 다른 남자들은 죽여 버리고자 하지만, 그러나 역시 죽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감싸주고 싶어 하는 남자의 외로움의 끝이란 필경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자유에 닿아 있겠기 때문이다.

 

자유, 그는 자유스런 남자였을까.

 

그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지야 않겠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몰랐다. 사람들은 대개 그를 가리켜 그 남자라거나 미친 거지아니면 그 자식이라거나 또는 저 자식이라고 칭했다.

 

그 남자는 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명칭이었고, ‘그 자식이나 저 자식은 남자들이, ‘미친 거지는 여자든 남자든 무난히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용어였다. 남자인 나는 대부분의 남자들과 똑같이 그 자식이나 저 자식을 주로 그의 호칭으로 사용했지만, 칠 년여의 추적 끝에 그를 찾아내어 만나고 난 뒤에는 나도 모르게 <자식>은 빼버리고 그냥 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밖에 다른 것은 더러 알고 있다.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이 연상이었다. 실제의 차이는 오 년밖에 안 됐지만 이십 년 이상의 간격을 나는 그때 느끼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 순간에 일고여덟 살쯤의 눈물 많은 여자아이 같기도 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무구하다고 해야 할지, 상처도 오래 되면 독특한 빛을 발산하듯이 교활하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교활함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부러지고 뒤틀린 채로 바위틈에서 험하게 세월을 견뎌온 동백이나 소나무를 보는 것 같은, 연약하고 위태로우면서도 보면 볼수록 중후한 기품 같은 것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것이었다. 그는 연약하면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을 몰랐다. 자신의 목숨에 대해 연민이나 욕망이 없었다.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목숨 따위 그냥 내 줘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군가가 죽여주기를 바라는 오직 그 하나의 희망을 밑천으로 그때까지 아슬아슬하게 생명을 유지해 온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가 만일 진실로 자유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자유라는 것은 결국 고단함 외에 별다른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고단하다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고단함이었다.

 

막연하게라도 삶에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그에게는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일상인의 가슴과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그 어떤 관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확실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칠 년여의 추적 끝에 겨우 찾아낸 인간에게서 나는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대상은, 그것은, , 인간이야. 인간 가운데서도 특히 여자는, 여자는 뭐랄까, , 여자는 매번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뒤집어 버리는 거야. 나는, 나를 그토록 두렵게 하는 여자를 극복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래서 알고자 했던 것인데, 그런데 실패했어. 실패한 거야.”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엇을 물어봐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다소는 감상적인 기분으로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그렇게 입을 열어놓고는 시나브로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나문재가 끝도 없이 펼쳐진 서해의 광활한 갯벌에서였다. 목덜미를 후리고 지나가는 바람이 점차로 쌀쌀해지는 사월의 오후 다섯 시쯤이었던가. 여기저기 작은 갯고랑을 따라 물이 들어오고 있었고, 거름처럼 시커먼 뻘 속에서 조개를 캐던 아낙네들이 속속 경운기에 몸을 싣고 떠나가고 있었다.

 

그와 내가 가까이 서서 얼굴을 마주한 채 서로의 눈빛을 마치 무슨 유언장이라도 읽듯이 읽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짧은 한 순간의 시선 교환을 끝으로 나는 두 번 다시 그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그와 나 사이의 공기 중에 내재돼 있었던,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생의 어떤 중대한 비밀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와 갯벌을 가로질러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봐버린 느낌, 들키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들켜버린 듯한 수치심, 그것이었다. 속이 썩어버린 호도알을 마루에 놓고 굴리면 들리는 것 같은 공명음이 가슴에서 잇따라 울려왔다. 그러면서도 눈이 부셨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게 들어와 버린 이 찬란하게 텅 빈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면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되는 듯한 느낌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 느낌만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느낌의 정체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도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인간은 두려워한다는, 그것도 여자는 특히 두려워한다는, 그 말을 하고 있을 때, 그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잠시 떨어뜨렸을 때, 그 짧은 순간에 내가 느낀 그 존재의 초라함에 대해서, 한없이 초라하면서도 그 자체로서 불변의 영원성을 과시하고 있는 듯한 그때 그 남자의 건조한 눈동자와 움푹 들어간 양 볼이 내게 준 한순간의 충격적인 이미지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나는 지금 해석할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이렇듯이 무슨 소설을 구상한답시고 흙먼지 자욱한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요란하게 해체되고 있는 둥지산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날, 그는 말했다.

 

한 사람의 전력을 다한 질주가 실패하면, 남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뿐이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길은, 실패한 자가 죽어주는 것뿐이야.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를 죽이는 게 쉽지가 않다는 점이야. 두려움을 아는 사람만이, 두려움의 정체를 꿰뚫어본 사람만이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실패하고 말았거든. 그래서 나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거야.”

 

그는 그렇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내게 청구하고 있었다. 나는 물론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가기 어려우니까 죽여야 했다. 눈을 질끈 감을 필요조차도 없었다.

 

두 눈 크게 뜨고, 반듯이 선 채로, 품속의 칼을 꺼내 칼끝이 어슷하게 아래로 향하게 해서 흉곽의 한 가운데로 온 힘을 다해 깊이 찔러 넣고, 그리고는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셨다가 뿜어내면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에 얼굴을 씻으면서, 가능한 한 고통을 많이 받게끔 칼자루를 두어 번 비틀어준 다음, 다시 한 번 숨을 길게 뿜어내면서 칡넝쿨을 걷어내듯이 칼끝을 위로 쓰윽 걷어 올리다가 식도 근처에서 질끈 한 번 더 힘을 실어주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죽임에 관한 연습은 충분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야 이유를 나는 지난 칠 년여 동안 바로 그 살인연습에서 찾아오고 있었다.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나 자신을 상대로 연습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칼을 커내 그의 가슴에 꽂아 넣기는 고사하고 그의 얼굴조차 맨 정신으로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그를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있었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엇을 얼마나 알았는가 하고 살펴보면 말이 막히지만, 어쨌든 그 한순간의 시선 교환을 통해서 나는 그를 내 몸의 일부처럼 친숙하게 느끼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에너지의 분출이 최고조에 달하게끔 구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알아버리면 그것에 대해 아무런 행위도 못하고 멍해져 버리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역행이라 하면 말이 될는지 모르겠다.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이 마치 이방인 세계의 강력한 에너지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낱낱의 혈관이며 세포 하나하나가 무력감이라는 역행적인 에너지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도 사람이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그렇게까지 알아버릴 수도 있는 것인가. 사람이 단 한 마디의 말과 표정으로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듯이 드러내 보일 수도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