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과의 결탁
누이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누이는 확실히 거기 어디에 와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느낌은 곧 확신이 되었다. 나는 염탐꾼처럼 좌우 사방을 자꾸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 못해하고 있었다.
신선이 숨었다고 하는 바위틈 어디에 몸을 숨겨놓은 것일까. 산신각 뒷편의 향나무 밑에 토굴을 파고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자꾸 상상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더라도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르는 편이 좋다고, 누님은 그렇게 말했다.
“세상의 어떤 일은 그래, 모르면 아무 일도 없지만, 알고 난 뒤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수상한 일도 있어. 그러니까 참아야 해. 네가 혜수를 보고 싶다고 혜수를 만나면, 너는 갈증이 풀려서 좋을지 모르지만 혜수에게는 어떤 불미한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내 말 알겠어?”
“그러니까 혜수는 지금 여기 어디에 와 있는 거지? 그것만 말해줘.”
“몰라. 말할 수 없어.”
누님은 단호했다. 단호함은 원래 누님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이런 날의 이런 이야기 끝에는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부드러움보다는 꼿꼿함이 훨씬 누님답고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단호함 뒤에는 아무 말도 없어야 할 것이었다. 말이 길어지면 자칫 청승이나 푸념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모든 것을 위임해 버리고 그냥 걷기만 해야 하는 것이다. 누님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걸어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누님을 위해 그렇게 걸어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누님은 예전의 성격 그대로 차분했다. 발우 왔구나, 하고 한 마디로 간단하게 맞이하던 어머니와 별 다를 게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언표되지 않은 말이 없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물론 어머니와 누님이 나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어머니와 누님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했다. 공기의 작은 흐름만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교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말이란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가. 세상의 모든 일을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것도 같지만, 가끔은 실제로 그런 성과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많은 경우에 말이란 것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착각을 양분으로 모든 것을 뒤죽박죽 뒤섞어놓고 저만치 물러서서 시치미를 뚝 떼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한 무엇이든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누님은 걸으면서 내 팔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누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칠 년만의 재회였지만, 세월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헤어진 사람을 오늘 만난 것 같았다.
“여전해.”
“뭐가?”
“네가 이렇게 내 어깨를 안아주면, 뭔지 모르게 안심이 되고 내 기분이 좋아지는 거. 왜 이런지 몰라. 네가 나보다 훨씬 커서 그럴까?”
그래, 나는 누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누님을 번쩍 들어 올려 무등을 태울 수도 있었다. 가엽게도 누님은 너무나 가볍고,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작았다.
우리는 천도재가 끝난 뒤의 부산스런 은선암을 빠져나와 숲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네다섯 시간 전에 내가 올라온 바로 그 길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얘기도 좀 할 겸 밤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게 내 생각이었고 또 누님을 밖으로 끌어낸 이유도 그것이기는 했지만, 그 생각의 배후에서 나를 유혹하는 또 다른 갈래의 생각 한 자락을 숨길 수는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그것을 알아보고 싶다는 조금함이 내게 있었다.
누님은 그런 나를 읽고 있었다. 읽었으면서도 읽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님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사실을 말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어떤 사실이란 어쩌면 정말로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더러 그런 것도 있기는 있는 법일 테니까. 그것이 내게는 고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알아내고 말 것인가 아니면 계속 모르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통제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의구심이라고 하는 욕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의 가장 정상에 위치하면서 가장 은밀하게 활동하는, 본질적으로 강력한 야성을 지닌 보이지 않는 세포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이성적인 통제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이성을 통제하려 들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누님에게서 뭔가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끄집어내야만 한다는 욕망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고 걸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누님의 젖을 만지다가 잠이 들곤 하던 그때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실상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내가 어머니를 생각했다기보다 어머니의 얼굴이 내 심연의 망막에 도장처럼 새겨져있어서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로는 누이를 생각하며 눈으로는 어머니를 보고 있고, 그리고 가슴으로는 누님을 느껴야 하는 그런 어떤 분열상태라고나 해야 할는지, 어쨌든 머리도 마음도 정갈하지가 못했다. 여러 개의 길이 풀어진 실타래처럼 얽혀서 나를 에워싸고 돌며 이것도 저것도 아무 길도 선택을 못하게 한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젖을 만지면 누님은 언제나 추워서 그러는 것처럼 부르르 떨곤 했었는데, 그러다가는 간지럽다고 내 손을 꼬집고, 그러다가는 또 가만히 있어주곤 했어. 그러면 나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고. 그랬었어. 생각 안 나?”
누님은 말없이 그저 걷고만 있었다. 그렇다고 숨소리마저 숨기고 있지는 않았다. 숨소리, 그래, 그것이 있었다. 누님의 숨소리에서 나는 그 시절의 누님을 느끼고 있었고, 몸이 차츰 더워지고도 있었다.
욕정은 아니었다. 알 수도 없는 무엇, 그래, 그런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누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누님이 좋았고, 그래서 누님이 싫다고 하는 것을 즐겼을 뿐이었다.
그랬다. 누님이 싫다고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성격이건 내게는 좋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좋으면서도 뒤가 개운치 못한 뭔가가 있었다. 바로 그것, 이쪽과 저쪽의 중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형국의 내가 나는 가엾고 실망스러웠다.
거기에는 누님의 애매한 태도도 하나의 의혹으로 끼여 있었을 것이었다. 내가 누님의 젖을 만지려고 덤벼들 때의 누님은 완강하게 뿌리치다가도 어느 순간 자기가 먼저 나를 꼭 끌어안아버리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숨이 막혔고, 그때부터는 내가 누님을 귀찮게 만지작거리는 것인지, 누님이 나를 끌어안은 까닭에 내가 불편해하는 것인지 모호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 그 모호함을 나는 탐닉한 것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생각 안 나?”
“얘는 참, 뭘 말하라는 거야?”
“지금 딴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아니, 그냥 좋아. 네가 이렇게 내 어깨를 안아주고 있는 게 좋아.”
“매부는 어때?”
“뭐가?”
“잘해줘?”
“응.”
“얼마나? 어떻게?”
“얘는…….”
“부끄러운 거야? 그럼 그때는 어땠어?”
“언제?”
“내가 젖을 만질 때 말야.”
“얘는 별 걸 다 묻고 있어.”
“지금 생각하면 난 그때 너무 어렸었어. 내가 조금만 더 자랐더라면, 누님처럼 조숙하게 뭔가를 많이 알고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누님과 나는 아마 일을 벌여도 많이 벌였을 거야, 그렇지?”
“몰라.”
“어쨌든 젖이나 만지며 놀지만은 않았을 거 아냐. 안 그래? 우리가 그때 일을 벌였다면, 어머니는 우리더러 결혼을 하라고 했으려나?”
“그렇지만 넌 그때 나를 좋아한 게 아니었어. 내게 있는 젖을 좋아한 거지.”
“뭐? 같은 거 아닌가?”
“넌 참 말을 편하게도 하는구나. 네가 좋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혜수였어. 어머니가 혜수를 데려온 뒤로 너는 줄곧 혜수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거야. 너는 그것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알아. 네가 모르는 너를, 그래, 나는 너를 알아. 그게 사람인 거야.”
그랬나? 그랬었나? 나는 단지 누님의 젖이 만만해서 그것을 만졌던 것일 뿐인가? 의문부호가 연달아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의문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혜수는, 그러니까 혜수는 지금…….”
“혜수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다고 아까 이미 말했어.”
누님은 다시 단호해졌다. 내가 여태 혜수 얘기를 꺼내기 위해 분위기 조성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을, 누님은 결국 알아차려버린 것이다. 누님은 본디 화를 낼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길가의 쑥부쟁이처럼 밟으면 엎드리고 놓아주면 일어섰다. 그런 누님이 새삼스럽게 혜수를 질투하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누님의 태도가 단호해지는 이유는 자명했다. 누님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결연한 태도를 통해 자신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누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혜수를 보호하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거기까지는 헤아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내 안에서 집요하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앎에의 욕구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은 없어도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매서웠다. 밤이 깊어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갈대숲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비탈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달이 없어서 어두웠지만 별빛에 반짝이는 뭔가가 눈에 띄었다.
희미하지만 날카롭게 마치 깊은 숲속에서 먹이를 찾는 들짐승의 눈처럼 반짝이는 그것은, 아까 버린다는 의식도 없이 버리고 온 그 삽이었다. 개를 품에 안으면서 버려두고 온 삽이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약간의 감상에 취한 채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누님의 어깨에서 팔을 풀고 삽을 주워들었다. 누님은 가만히 선 채로 그것이 웬 삽이냐고 몸으로 묻고 있었다.
“여기 어디서 살해하고 싶었어, 나를, 묻어버리고 싶었던 거야.”
말은 그렇게 제법 진지하게 하고 있었지만, 말을 하는 동안에 나는 나 자신이 비굴하고 같잖다는 느낌이어서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누님은 웃지 않고, 놀라지도 않고 뭔가 모르게 원망이 가득한 책망의 투로 말했다.
“너는 참 욕심이 많구나.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저 혼자만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얘기지 뭐야, 죽으려고 하는 것은…….”
누님은 하던 말을 도로 삼키려는 듯이 자신 없는 투로 하늘을 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말이 가슴을 후비는 비수처럼 섬뜩하고 매서웠다. 나는 내게로 날아오는 비수를 온 힘을 다해 막아내기라도 하듯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님이 말을 안 해주면 난 정말로 죽을 수도 있어. 욕심이라도 좋아.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지만 내 귀로 들려오는 나의 그 소리는, 내가 들어도 측은함이 느껴지리만치 자신이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넌 참 바보구나. 바보들이나 죽는다고 협박하는 거야.”
“그러니까 말해줘. 혜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말해줘. 오늘밤 천도제도 사실은 혜수와 관계가 있는 거지?”
그날 밤의 천도제는 예사로운 불사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심심찮게 보아온 천도제와는 성격이 달랐다. 제에 참석한 사람이 어머니와 누님 그리고 비구니 한 분과 법운스님 그렇게 네 명뿐이라는 점이 우선 그랬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어머니 자신의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어머니 자신의 안락한 생활을 기원할 목적으로 그런 제를 올렸단 말인가. 아니었다. 아닐 것이었다. 어머니는 본래 자신의 안녕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설령 변한다 해도 그런 식으로 변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뭐란 말인가.
“나도 몰라. 제를 올린다고, 갑자기 어머니가 오라고 하셔서, 그래서 왔던 것일 뿐이야.”
“누님은 거짓말을 못해. 내가 알아.”
“그래도 난 몰라. 너도 모르니까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르는 게 좋아.”
“그러니까 누님은 알고 있는 거지?”
“아니, 나도 몰라.”
“좋아, 그렇다면 이것만 말해줘. 혜수는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야? 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땐, 난 정말로 죽어버릴 수도 있어.”
“넌 참 바보구나. 실없이 왜 자꾸 죽음, 죽음, 그래? 그것 팔면 뭐가 나오냐?”
누님은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때의 흙내와도 같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그만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지는 그런 자욱한 어지럼증 같은 목소리로 누님은 조용히 말했다.
“혜수는 살아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지금 여기 어디에 와 있는 거지?”
“몰라.”
“그럼 쫓겨 다니는 건가, 도망 다니는 거야? 그런 거야?”
나는 마침내,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출구를 찾아 방황해 온 그 말을 토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토하고 나면 시원할 줄 알았지만, 속이 텅 비어버린 듯이 헐렁한 느낌과 함께 숨이 막혔다. 그러나 누님은 뜻밖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런가봐. 들리는 얘기로는, 그 동안 어떤 남자랑 같이 살았는데, 그 남자가 뭔지는 모르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그래서 같이 숨어 다니는 중이래나봐.”
누님은 마치 그런 말을 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선선히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해줄 만한 적절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다.
“그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한 건 아무도 몰라. 정말이야. 거기까지밖에는, 나도 몰라,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아마 모르실 거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어머니는 그러니까 사실을 아시는 게 아니라 정황을 아시는 거야. 그 이상은 모르시는 거야. 그것뿐이야. 우리도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더 이상은 뭘 알려고 애쓰지 않는 게 좋아.”
누님은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어떤 남자,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맥이 빠져서, 들고 있던 삽을 나도 모르게 놓아 버렸다. 우리는 그때 갈대숲으로 통하는 가파른 샛길과 읍내로 이어지는 큰길 사이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었다.
내 손을 벗어난 삽이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낭떠러지 저 아래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뒤는 울창한 숲이었다. 검은 보자기로 덮어놓은 무슨 거대한 덩어리처럼 비쳐지는 저 너른 숲의 어딘가에 누이는 지금 토굴을 파놓고 어떤 남자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어머니의 각별한 배려에 의해 법당이나 산신각 바로 밑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내가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엊그제 막 스물여섯 살을 넘어선 그 해의 이월 깊은 어둠에 잠겨 있는 숲을 쳐다보며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해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그 해의 이월에서 오월까지 은선암에 머물며 스스로 죽음을 보류하고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최면을 걸어놓고 모르는 체 시치미 뚝 떼고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거기에는 물론 누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깔려 있었다. 누이가 스스로 내 앞에 나타나 주기를 고대하며 더 이상은 아무에게도 누이의 신상에 대해 묻지 않고 그저 시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누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
나는 다만 누이의 삶의 여정을 건성건성 추측해볼 수나 있을 따름이었다. 누이는 지난 칠 년여 동안 오토바이의 그 사내를 찾아 다녔던 것이었을까. 그 사내를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나섰던 것이었을까. 그러다가 우연찮게 다른 사내를 만나 그 사내에게 빠져든 것이었을까.
그 사내는 누구일까. 어떤 인간일까. 그런데 그들은 왜 숨어 다니고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어머니는 왜 그들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해주는 걸까.
의문이 의문을 낳고 그 의문이 또 의문을 낳는 나날들이었다. 의문은 도처에 널려 있었지만 그 어떤 의문에 대해서도 나는 집요하게 파고들지를 못했다.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들에 관심이 쏠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앉아서 하늘이라도 날아가는 듯한 환상에 빠져 있던 중에 발견한 것이 돈이었다.
돈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인생의 커다란 함정이라는 것을 아직 몰랐던 탓으로 나는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덥석 물어버렸다. 돈이야말로 모든 외로움의 근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리기까지는 그 뒤로 팔 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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