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래도 엄청난 바람기를 내장한 채로 태어났나부다. 꼴에 사내라고 여자가 와서 뭐라고 청을 하면 뚝 자르지를 못해 하늘이나 먼 데 어디를 보며 아 예, 그러세요, 어쩌고 승낙을 해버리고 해버린 뒤에서야 쓰라린 가슴을 몰래몰래 쓸어내리며 에이 참, 에이 참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뭐냐, 이게. 응?
누구누구가 바람 났다고 동네방네 소문 난다더니 지금 우리 동네 형편이 꼭 그런 꼴이다. 작년까지만도 제초제를 뿌려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게 쓸어내던 마당을 느닷없이 꽃밭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난리들이다. 한 집이 그러니 옆집도 그런다고 하고 또 옆집도 따라쟁이한다고 나섰다.
그런데 그 원흉이 알고 보니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바로 나였던가보다. 네놈이 우리 동네 이사 와서 마당을 온통 꽃으로 채워놓으니 가슴에 바람이 솔솔 불어 살 수가 있냐. 그래서 나도 하기로 했다. 하기로 하기는 했지만 내용이 별로 없다. 별로 없는 내용을 원흉인 네가 채워줘야겠다, 뭐 이런 형국이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이 와서 이것이랑 저것이랑 또 그것이랑 좀 주시오, 하고 마치 맡겨놓은 물건 찾으러 온 듯이 말을 해서 주었더니 또 다른 이가 오고, 뒤를 또 오고, 또 오고, 한도 끝도 시작도 무엇도 없이 툭 하면 부르는 소리가 나를 질겁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여자들이다. 남자들이라면 에이 뭐 그런 걸 심으려고 하세요. 나야 뭐 밥 먹고 일이 없어 그런 것이라도 한다지만.......어쩌고 눙치고 돌리고 해서 유야무야라도 시키겠는데 여자에게는 어쩐 일인지 그게 안 된다. 되기는커녕 가끔은 이뻐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달라는 대로 주고 만다.
달라는 대로 주었는데, 주고 보니 그게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속성을 갖고 이어진다. 이어질뿐 아니라 요구사항이 차츰 대담해진다. 단순한 초본식물에서 구근류로 눈이 차츰 높아지는 거다.
“저번에 봄에 그 똥그란 꽃이 뭐다요. 그것도 좀 주시오.”
똥그란 꽃, 튜울립 신품종이라고 해서 국제원예종묘사에 딴에는 거금을 들여 주문했던 거다. 번식도 별로 안 되는 그걸 달라고? 그렇다고 안 준다는 말은 못하고 그러세요, 풀죽은 소리로 승낙을 하고 말았는데 그런데 이게 그 사람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누구는 주면서 나는 안 주냐?
말릴 길이 없다. 이제 막 피어나는 글라디올로스가 이쁘다고 쑥 뽑다가 중간 마디에서 부러뜨리지를 않나. 지난 봄에는 히야신스가 피었는데 “아따 이것이 뭐라요, 냄새도 참 좋네” 어쩌고 한 아줌마가 감탄을 연발하더니 다짜고짜 호미를 들고 나선다. “아, 그거 꽃이 이미 피어 버렸는데, 못 살 텐데.” 어쩌고 중얼거리는 나, “죽어도 뭐 금방이야 죽을랍디여.” 어쩌고 아는 체를 해대며 “딱 두 개만 주시오.” 이러는데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당하고 만 뒤에서야 나 자신의 우유부단을 한탄했는데, 그런 한탄이 무시로 이어진다.
게다가 여기에 또 가끔은 종교문제마저 끼어든다. 요새 한참 원추리가 피는 중인데, 아랫집 아줌마 왈 “이 집에서 피는 원추리는 색깔이 달라 보인다”나 어쩐다나, 어디서 이런 원추리를 구했느냐고 해서 문수사 뒷산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 금방 눈빛이 달라진다. 그 아줌마는 툭하면 내게 와서 교회 가자고, 재밌다고, 꼬시는 중이었는데 내 입에서 절간 이름이 나오니 긴장했달까 뭐랄까 하여튼 뭐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가보다. 고개를 홱 돌리고 사방을 둘레둘레 하더니 "나 이거나 하나 주시오“하며 달랑 한 포기뿐인 다알리아를 가리키더니 ”하나뿐이네.“하고 중얼거리다.
야아, 이것 참 머리 아프다.
지난 봄 산벗꽃이 필 무렵에 다녀간 경기도 북부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는 그림쟁이 왈 “마당이 너무 어지럽네. 여자가 없는 집은 이렇게 티가 나.” 해서 난 아무 말도 겉으로는 못하고 속으로만 명색이 화가라는 여자의 입에서 어찌 저런 제국주의적 발언이 술술 잘도 나올까, 했더랬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녀의 말을 지금 내 상황에 적용하면 똑 맞겠다 싶기는 하다. 이이제이라고, 여자로 여자를 물린친다는, 흐흐, 집에 여자가 있었다면 뭐 최소한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도 드는 거다.
사실로 그렇다. 남자라면 나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겠다. 그런데 여자는, 이게 보통 어렵지가 않다. 어려운 이유가 대체 뭘까, 하고 곰곰 생각을 해보니. 아무래도 내가 여자에게마저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어쩌면 이뻐 보이고 싶다는, 또는 나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어떤 욕망이 바닥에 깔린 게 아닌가 싶어지는데, 음, 이건 또 한 번 분석을 하자면 결국 상투적인 용어로 일종의 잠재적 바람기가 아닐런지,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것 참.
그런데 한편 다시 뒤집어서 고찰을 해보자면, 내가 이 동네서 바람 피다가 맞아죽을 일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그런 가능성이 일 퍼센트라도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며 의문이며를 붙잡고 있노라면 느닷없이 오 어머니,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온다.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우유부단하게 만드셨나이까, 뭐 그런 심사인 거다.
어쨌든 결론은, 나 같은 인간은 인가가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갔어야 하는데 자리를 영 잘못 잡았다는 뭐 그런 정도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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