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김윤식의 생가를 찾았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이십분을 걸었던가 십분을 걸었던가. 모르겠다.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시작한 걸음이다. 길가에 <영랑생가>라는 표식판이 없었다면 아마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순전히 우연이다. 그런데 전적으로 우연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불가의 인연생기설을 따르자면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그것이 있는 것이니 영랑의 생가를 찾은 나의 발걸음은 아마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가.
애당초 강진을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목포를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더랬다. 목포에 누구 특별히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르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번, 유달산이며 그 바닷가를 한 번 가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목포를 가자는 생각이 아침에 눈을 뜨면서 강진으로 바뀌었다. 강진이라는 지명을 생각하면서 떠오른 단어는 다산초당 정도였던 것 같다. 청자축제가 열리는 곳이라는 기억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광주에서 강진행 버스를 타고 강진에서 내렸는데 막막하다.
내가 왜 여기를 왔지? 하는 의문이 든 것은 갈 곳을 찾지 못해 한참이나 서 있던 어느 순간이었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참이나 서서 안경점을 찾고 있었다. 전날 광주의 안과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안경을 두 개 써야 한댄다. 앞으로 계속 안경을 끼고 다녀야 할 일이 아득해서 광주에서는 엄두를 못 내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 강진에서야 비로소 용기가 생겼다. 왜 하필 강진에서 안경을 맞추기로 했는가는 나도 모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런데 안경점이 하나도 눈에 띄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안경점을 찾아서 거리를 헤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영랑생가> 그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를 마중이라도 나온 듯이 아주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 아, 여기에 그이가 있었구나.
크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아기자기하다. 집이, 그리고 정원이.
한 바퀴 둘러보고 새암 앞에 앉았는데 살구가 떨어진다. 바람이 부나 싶었지만 바람은 없다. 바람도 없는데 살구가 자꾸 떨어진다. 떨어진 살구가 바닥에 널널하고 어떤 것은 나무에 부딪혀 으깨어졌다. 그것을 주워먹는 이 누구 있을까, 아무도 없다. 개미들이 까맣게 붙어 잔치를 벌일 뿐이다. 아, 가끔은 새들이 나무 위의 살구를 공격하기는 한다.
떨어진 살구 두 개를 주워들고 요모조모 살피다가 붙어 있는 개미를 훅 불어서 날리고 먹어본다. 시지도 않고 달지도 않다. 장마철의 과일 맛 그것이다. 시지도 달지도 않는 살구 두 개를 먹고 주위를 돌아본다. 한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아, 이곳은 참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뭔가가 나올 것만 같구나. 이를테면 詩 같은 것이 말이다.
나올까.
나올까?
조금은 긴장한 심사로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뭔가 오스스한 느낌이 다가온다. 살구 하나가 또 툭 떨어지는데, 이상한 느낌을 어쩌지 못해 살구가 떨어진 곳과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보니 배암 하나가 나를 보다가 머리를 돌려 살구나무 아래 돌 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그 모습이 마치 무엇인가에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너란 말이냐?
중얼거리며 나는 배암이 사라져간 구멍을 들여다본다. 살구나무에서는 새가 또 한 개의 살구를 떨어트린다. 그것이 내 어깨를 맞힌다. 새가 내게 무슨 신호를 보냈는가? 나는 새의 언어를 해독해보려 하지만 안 되어 답답하다. 애가 마른다.
오메 단풍 들겄네.
장광에서 장독을 열다가 떨어지는 감잎을 보고 속삭이듯이 감탄하는 누이에게 영감을 얻어 지었다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메 단풍 들겄네------
나는 이렇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하나도 끄집어내지 못한 채로 하릴없이 영랑의 유산이나 만지작거린다. 오메 단풍 들겄네......
저 늙은 살구나무는 알고 있을까. 내 안에 들은 것이 무슨 정체인가를? 그렇겠지. 배암까지 보듬고 살아가는 저 오랜 살구나무는 버얼써 나를 읽어버리고 있었겠지. 나도 모르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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