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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2/死

나를 울리는 사람들

비극이 내 안에 있었구나

 

 

내게는 병이 있다. 지독한 병이다. 한 번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여간해서 멈추지 않는, 울지 말자고, 안 울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맹세를 하면 그럴수록 눈물이 나오는 엄청나게도 부조리한,  불치한 병이다. 그런데 더 지독한 것은, 내 스스로 내 울음을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는 나를 좋아한다. 울 줄 아는, 울음의 소재를 갖고 있는 나를 좋아한다. 각성제라고나 해야 할는지. 울고 있는 순간의 나는 잊고 있었던 과거의 여러 얼굴들을 마치 창고에서 재고를 꺼내듯이 꺼내놓고 들여다본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묘하다. 하나의 얼굴이 다른 얼굴로, 전혀 상관도 없을 것 같은 다른 사람의 얼굴로 자꾸자꾸 옮겨간다. 요컨대 나의 울음은 릴레이 경주라도 하듯이, 한 사람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로 옮겨가면서 차례차례 천천히 작동한다.

 

 오늘 내 울음의 시작은 저기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에 계시는 김철 시인이 제공해 주었던 것 같다. 별다른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그가 나왔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순간 멘트가 흘러나왔다.

 

 "전쟁이 나를 시인으로 만든 거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서 내 눈이 번쩍 띄어졌다. 이렇게 되면 물러설 수 없는 거다. 차분하게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끝까지 경청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얼마나 지났는지. 담배는 또 몇이나 태워 버렸는지. 담배가 안 빨려서 이상하다, 하고 살펴보니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눈물이 담배를 적셔놓고 있었다.

 

 정리를 하자면,  김철 시인은 중국에서 최고의 시인에게 준다는 계관시인 칭호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 말을 한국에 사는 사람보다 능숙하게 구사하는 철저하게 한국 사람이다. 아니다. 한국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니까 조선 사람이라 함이 예의겠다.

 

 조선 사람인 그가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었을 무렵 징병을 당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중공군으로서였다. 6.25사변이라 불리는, 조선의 전쟁에 조선 사람이 중공군 군복을 입고 참가했다는 것이다.

 

 온전한, 제대로 된 의식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내 조상들의 땅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나서야 하다니.  미치지 않으면 철학자나 시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 하이젠베르그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그 처연한 상황을 머리에 떠올리며 울고 있노라니 불현 듯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의 아버지는 군대를 출세의 한 방편으로 파악했던 분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아버지는 군대에서 오륙 년 남짓 계시다가 중도 하차하고 예비역이 되었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진실은 잘 알 수 없지만, 어머니 때문에 제대한 거라고 아버지는 툭하면 어머니에게 구박을 하셨으니 아마 사실에 근접하리라 여겨진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당시에는 직업군인에게 사택이 제공되지 않고 있었다. 휴가도 일반병이나 별 차이가 없었고, 때문에 어머니는 이십대 초반의 젊으나 젊은 나이에 노상 혼자만 계셔야 했다. 내가 장남이고 보면, 아이도 아직 없던 시절, 늙은 시부모와 살아가기 얼마나 팍팍하고 외로웠을지는 안 들어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아버지가 어쩌다 한 번씩 휴가를 나오시면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며 하소연을 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의 원대로 제대를 하셨고,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문제라는 것도 처음부터 예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아버지는 마을 이장을 십 년이 넘게 맡아보실 정도로 열정적인 한편으로 소시민적인 기질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만 해도 마을의 이장은 선거가 있을 때면 자동적으로 선거운동에 동원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차츰 그쪽으로 맛을 들여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어머니의 새로운 눈물이 시작되었다. 기껏 눈물로 하소연해서 제대시켜놓으니까 어줍잖은 정치가 끼여들었다고나 할까. 집안 일은 아예 팽개치고 바깥으로만 나도는 남편에게 박수를 치는 아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생각건대 아버지는 마치 당신이 운동을 하는 사람이 당선되면 금방 벼락부자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계셨다고 여겨진다. 소시민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어머니가 애써 길러내는 가축을 사람들 데려다가 잡아 멕이는 건 일도 아니었고, 몇 마지기 안 되는 논밭까지 팔아가며 선거운동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당선되면 뭐가 있었나? 한 사흘 읍내에서 진탕만탕 마시고 떠들고 아무 데서나 잠자고, 그러고 나면 상황 끝.

 

 같은 일이 이십여 년 가까이 반복되면 사람은 무엇인가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이때의  탈출구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쪽으로 치달아 간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소시민의 전형이었다. 소시민은 실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찾는다. 무엇무엇 때문에 일이 안 되었다는 식의.

 

 그랬다. 언제부터인지 아버지는 당신이 보잘것없는 이장 노릇이나 하는 이유를 어머니에게서 찾고 계셨더랬다. 군대에 그대로 있었다면 출세를 했을 텐데 어머니가 당신의 출세 길을 막았다는 논리.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변 사방을 둘러보면 중요한 자리는 죄다 군인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절이었던 거다. 당신이 만일 군대에서 십 년만 복무하고 제대를 했더라면 최소한 파출소장이나 면장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원망. 이렇게도, 비극은 멀리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툭하면 밥상을 뒤집어엎고, 아버지의 논리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는 어머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아버지, 자식의 입장에서 이런 말 죄송스럽지만 냉정하게 평가를 하자면 설익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오늘, 전쟁이 자신을 시인으로 만들었다는 김철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작된 나의 눈물을 계속되게 해주신다.

 

 그리고 이 눈물은 다시, 1980년 5월 14일 서울역집회의 현장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의과대생들까지 긴급 의료단을 꾸려 참여했던 그 날, 그 현장에서 나는 양손에 하나씩 커다란 물통을 들고 뛰어다녔더랬다. 타는 목마름으로, 어깨에 어깨를 곁고 호헌철폐를 외치는 후배들의 그 타는 목을 적셔줄 한 방울의 물이 절실했다.

 

 시내에서 물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 골목골목을 막아버린 까닭도 있었지만 주변의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버렸고, 가정집에서는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 까닭이다. 헤매고 헤매다가 문이 열린 가게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그것은 지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쩌랴.

 

 "아니 도대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뭔 염병났다고 이 지랄들을 하는겨?"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을 쾅 닫아버리는 한 아주머니의 그 말씀. 영업을 할 수가 없으니 그런 악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십 년도 훨씬 지난 아직도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터지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다. 그때의 그런 <염병지랄>이 없었어도 우리에게 지금 이만큼의 자유가 주어졌을까.

 

 민중을 그렇게 보잘것없는 소시민으로 육성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채택하고 있는 기본적인 전략일 거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알기에, 대책없는 눈물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눈물은 다시, 수원 남문 시장에서 리어카 행상을 하던 중에 삼청교육대라는 곳으로 끌려갔던 선배에게로 이어진다.

 

리어카 행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리가 중요하다. 지금은 어지간한 곳은 대개 권리금이라는 이름으로 거래가 되지만, 그때만 해도 권리금이라는 어이없는 것이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다. 아무튼 선배는 그날 다른 리어카행상과 자리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주먹다짐으로까지 발전했는데, 그 길로 그만 끌려갔다. 그리고 바보가 되어 나왔다.

 

 무슨 바보인가 하면, 사람을 만나면 사람의 얼굴을 못 보고 항상 고개를 숙인 채로 마치 잘못을 빌기라도 하듯 두 손을 싹싹 비벼대는 그런 바보가 되었다. 사람을 그런 이상한 바보로 만들어버린 사람 가운데 한 분은 오늘에 와서 가진 돈이 27만원인가 얼마인가밖에 없다고, 먹고살기 참 어렵다는 식으로 가난을 과시하고, 그 부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은 고물 자전거 한 대 값에도 못 미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동정을 구걸하려 한다.

 

 삼청교육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명칭인데, 그리고 그 당시에도 조금은 아름다운 정책(?)이라고 여겼더랬는데, 그런데 그 명칭의 이면에는 선거를 준비하는 반대파들의 싹을 자르자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잡아넣기는 명분이 모자란 까닭으로, 깡패소탕을 전면에 내걸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는 왜 모르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노라면 또 눈물이 나온다.
 
 이렇게 나의 눈물은, 일단 시작되었다 하면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그렇다고 아주 끝이 없다면, 나는 아마 살 수가 없을 거다.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눈이 짓무르고 심장이 파열되어 죽고 말겠지. 하지만 나는 영특하게도, 살아갈 구실을 만들어낸다.

 

 돌아보면 머언 먼 옛날, 옛날이라고 느껴지는,  혹은 가까운 어느 시기에, 내가 그토록 정신을 놓고 쫓아다녔던 여자들, 또는, 아주 드물지만 내가 좋다고 나를 쫓아다녔던 여자들, 그네들을 생각하노라면, 나는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웃고 있는 거다. 필경 즐거운 웃음은 아니겠고, 회한이랄까 뭐랄까, 적당한 후회와, 적당한 미안스러움, 뭐 이런 것들이 섞인 그런 웃음 말이다.

 

 아, 생각난다. 대한민국만큼 문학적인 소재가 풍부한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는 말, 누가 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