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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

누가 나를 깨운 거냐



아침인 줄 알았는데 겨우 두 시인 거 있지. 한참 동안 속고 있었지 뭐야.
간밤에 영화 <비욘드 랭군>을 보다가 잠이 들었거든. 9시쯤부터 봤으니까
아마 11시쯤 잠이 들었던 것 같애. 그렇다면 이건 뭐야. 겨우 세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난 거 아니겠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게 된 거야, 어리둥절해서 창문을 여니 하얀 것이
내려오고 있네. 싸르락, 싸르락 소리와 함께 눈이 쌓이고 있어, 어제 아침
부터 시작한 눈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야. 어쩌겠어. 소리를 지르며 뛰쳐
나가지 않고 어떻게 배겨내겠어.

홀랑 벗은 채로, 담배 하나 피워물고, 집안에 불이란 불은 모두 켜놓고는
마당으로 나가서 온 세상을 껴안 듯이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잇따라 자반
뒤집기를 했지 뭐야. 아, 그랬더니 눈이 눈 속으로 들어오는 거 있지. 몸
에서는 갓 삶아낸 고기덩이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데 그거 참, 환장
하겠더라고. 내가 우는 것인지 눈이 내 눈에서 녹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거야.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앉아 있었어.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더라고. 눈을 이불 삼아서 포곤하게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내 몸은 무지하게도 떨어대기 시작하는 거야. 덜덜덜, 그야말로
덜덜덜 떨어대는데 슬프더라고. 나는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이 스스로를 비참하게 하는 거야. 처음 밖으로 나설
때의 기세대로라면 벗은 채로 그냥 거리로까지 뛰쳐나가야 하는데 말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 털어버려야 하는데 말야. 그렇지 않겠어? 그런데
나는 겨우 주저앉은 채로 춥다고 덜덜덜 떨고나 있는 거야.

떨면서, 눈물도 몇 방울 떨구면서 더운 물로 추위를 달래고 커피 한잔
끓여 들고 방바닥에 앉았는데 문득 생각이 나더군. 간밤에 영화 <비욘
드 랭군>을 보다가 잠깐 만지작거렸던 생각이 되살아난 거야. 민주주의란,
착하게 살고 열심히 일하면 행복해질 권리가 주어지는 제도는 이미 아니
라는 유치한 생각.

이를테면 착하면 착할수록 바보가 되고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착취를
당하는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다, 아 그래, 이것을 주제로 칼럼을 하나
써보자.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혹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엉성한 생각을 뒤적뒤적하다가 잠이 들었던 거야. 왜냐하면 아다시피
영화 <비욘드 랭군>이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까. 요컨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단하는 극우반공세력
들의 피냄새 물씬 풍기는 엉터리 민주주의에 대한 리포트란 말이거든.

그러니까 간밤에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현재를 돌아보고
있었던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최병렬씨가 단식을 할 때 엄청난 충
격을 받았었거든. 야아, 이렇게 상징조작을 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우리
의 국민성이란 아직도 이런 단계에 머물러 있나보구나, 하고 말야.

그러면, 그렇다면 그것이 나를 깨운 것일까? 에이 설마, 내가 무슨 중뿔난
우국충정에 열혈남아라도 된다고. 그럼, 그럴 리야 없지. 그러면 뭐야. 도대
체 무엇이 나를 그렇게도 일찍 깨워버린 거야. 뭐야, 뭐냔 말야. 혼자 미친
듯이 중얼중얼 해대며 인터넷을 열어놓고 싸돌아다니는 참인데 전화가
울리더군. 깜짝 놀랐지, 당연히.

밤중도 아니고 새벽도 아닌 이 어정쩡한 시간에 전화를 해대는 인간은
또 누구야. 안 받아버릴까. 하다가 받았더니 산신령이 되려다 실패하고
털이나 잔뜩 길러버린 돌도사 같은 인간 털보 장하인 거야.

"형, 내 작품 봤어?" 하는데 그것 참 아득해지는 거 있지. 그 정신으로
내가 뭘 말할 수 있겠어. 어떻게 저떻게 대충 얼버무리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데 말야. 뭐지? 도대체 뭐가 이 시간에 나를 깨운 거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