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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

사랑에 관한 짧은 생각

 

봄은 해야 할 일이 많은 계절이다. 이것저것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고 생각할 일 또한 많다. 마음 두
고 눈 돌릴 꺼리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계절이라고나 할까.

이 혼미한 계절에 허물없이 지냈던 몇몇 오래 전의 사
진동호회 사람들과 더불어 꿩을 잡으러 나섰다. 꿩을
잡으러 나섰다고는 하지만 꿩은 실상 그럭저럭 한갓
진 핑계일 뿐이고, 어느 인터넷신문에 올라 있는 내
글을 우연찮게 발견한 옛 동인이 긴가민가 연락을 취
해와서 아, 맞구나, 너구나, 정말로 오랜만이네, 어쩌
고 저쩌고 그렇게 만난 김에 산행을 나선 것이니 그야
말로 혼미한 여행길이었던 셈이다. 이 혼미한 여행길
에서 느닷없는 충격적인 화두가 튀어나왔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하는.

하긴 이런 문제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 있어서는 어쩌
면 충격적이기는커녕 일상적인 얘기일지도 모른다. 누
구나 한 번쯤은 앓아봤고 앓고 있으며 또 앓아보고 싶
은 그런 너무나도 보편적인 주제이겠으니 말이다. 주
변을 돌아보면 <사랑>이라는 이 두 글자가 안 들어간
게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랑은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유행가를 들어보면 팔십 퍼
센트 이상이 사랑을 테마로 하고 있고 찾집 같은 데
서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온통 사
랑 얘기뿐이다.

그렇게 회자되는 사랑에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있는
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사랑이라, 글쎄, 그런 엄청난 주제를 이렇게도 갑자
기 들고 나오면 내가 참 당혹스러운데?"

"엄청난 주제라고? 그게 왜 엄청나다는 거지?"

"아닌가? 그럼 뭐지?"

"살면서 철이 든다다니 난 그렇던데. 사랑이란 것, 그
것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부질없는 감정의 소모
라는 거, 그런 생각이 들어. 너없이는 죽고 못산다는
그런 반지르한 말도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못해 하품
이 나올 지경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니, 부질없는 감정의 소모라니. 아
니 왜 그런 생각이 들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곧
인생에 대해 진지한 탐구정신이 결여돼가고 있다는 얘
기가 되는 것 같은데? 적당히 냉소적이고, 적당히 나
르시스한, 말하자면 희망을 스스로 반납해버린 상태,
세상사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는 식의 오만함, 그
런 정신자세가 아니고서는 그런 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지."

사랑이라면 나는 사실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하도
많이 귀에 들려오는 단어라서 신물이 나버린 탓만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뭐랄까, 그것은 함부로 입에 올
려서는 안 되는 어떤 비의를 지니고 있다는 어렴풋한
인식 때문이라고 하면 말이 좀 될려는지 모르겠다. 그
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그 친구를 상대
로 일종의 사랑학 강의를 지루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생을 경영하는
데 있어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필수품(?)이라는 생각
은 가끔 해봤지만 그것의 본질을 깊이 참구해본 적이
내게는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새삼스런 발견인 셈이
었다. 새삼스런 발견이긴 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
신기하고도 충격적인 발견이기도 했다.

사랑을 왜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부질이
란 원망도 슬픔도 기쁨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다는 요
컨대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적인 요소가 모두 제거된 상
태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과연 가
능한 것일까?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수양이 깊고 넓어
서 도의 정점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도 웃음
을 웃지 않았던가?

사랑이 부질없는 감정의 소모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동
의받고자 하는 의도로 던진 그 질문의 이면에는 사랑
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 그 실패의 원인이야 수도
없이 많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마도 사랑을 소
유와 동격으로 파악한 데서 오는 오해일 것이다. 금반
지나 다이아처럼, 사랑도 하나의 물질처럼 인식하고
그것을 내가 갖고 있다는, 그러다가 잘못되면 잃어버
렸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슬픔과 배반감 따위들, 그
런 심리의 바탕에는 사랑을 도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바
라보는 눈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 도식이란 이를테면 주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 줄
것이냐 받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 가운데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 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있으므로 해서 상대방
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상대방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새로
운 문제는 삶이란 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심화/발
전된다.

우리는 도대체 왜 사는 것인가? 영원히 반복해서 물어
도 명쾌한 대답은 나올 것 같지 않은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너무도 작고 숨이 막힌다. 이 창살 없
는 감옥의 숨막히는 실존으로부터 구원되는 길이 있다
면 그것이 아마도 사랑일 게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결코 소유욕망에 기초한 것일 수
는 없다.

욕망의 사이클은 하나가 둘을 원하고 둘이 넷을 원하
고 넷은 여덟을 원하게 되어 있다. 욕망의 주머니는
무한대로 확장할뿐 그 한계를 보이는 법이 없다. 한계
가 있다면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펑 터져저리는 것뿐
이다. 터져버린다면 사랑이고 뭐고 다 끝장이다. 극단
을 향해 치닫는 이 탐욕스러운 욕망의 주머니를 떨쳐
낼 방법은 있는가?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고,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
이 세상과의 부딪침 속에서 약간씩 변화/발전되어 가
듯이, 상대의 마음 또한 그렇다는 것만 우리가 인정한
다면, 그리하여 그것을 존중할 수만 있다면 소모적인
배반감이나 상실감으로 괴로워할 일은 줄어들지 않을
까. 사랑은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그 거대하
고도 무상한 신비감에 대한 탐구정신이라고 하는, 그
런 진지하고도 숭고한, 소박한 배움의 자세를 갖출 수
만 있다면 사랑은 결코 배반이나 부질없음 따위로 소
멸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사는가, 하는
등등의 철학적인 명제를 우리가 평소에는 마치 사치품
처럼 여기고 지나치다가도 막상 그 문제가 내 문제로
다가왔을 때 허둥거리는 것처럼, 사랑이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은 일전어치도 없이 그
저 사랑해, 사랑해, 앵무새처럼 중얼거리고나 있다가
그 사랑의 형태가 변했을 때 배반감을 느끼고 스스로
생채기를 내는 일이 없도록 미리미리 자신의 정신을
점검해둘 필요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