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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저에게는 평상의 마음으로는 접하기 어려운 작품이 몇 있습니다.
카프카가 그렇고 네루다가 그렇습니다. 에두와르 뭉크가 그렇고
백신스키가 또한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도 무거운데 거기에
또 한 사람 기형도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작심을 하기 전에는 덤비기 어려운 사람들이지요.
그 가운데 한 사람 기형도를 얼마 전에 작심하고 다시 펼쳐들었는데
요새 며칠 계속 떠올라오고 있습니다.

그의 처음이고 마지막이 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죽기 얼마 전의 김현이 해설을 쓴 바로 그 준엄한 시집을
밤이건 낮이건 시간만 나면 촛불을 켜놓은 채로 틱틱거리며
타오르는 그 촛불을 의식하며 기형도를 읽었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저는 보낼 수 없는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기형도의 시편들은 보는 게 아니라 읽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이렇게도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얼마나 철없고 부끄러운 시절이었던가요. 하나를 읽으면
열을 안 듯이 기고만장하던 시절이 내 몸 속에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부끄러운 피가 지금도 내 몸을 덮히고
있습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과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 책을
읽기보다는 타인을 설득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책을 읽었던 그 도저한 혐의도 나는 이제 인정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쥐뿔도 모르는 것이 아는 체는 다하고 다닌다고
타인을 비웃고 나무래던 입으로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심판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어떤 얄팍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 어떤 거짓 희망에도 눈길 주지 않았던 기형도는 그렇게
죽어서도 산 사람처럼 아니 죽었기에 더욱 날카로운 혀로 내
영혼을 뒤집어놓고 있습니다.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으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아마도 나 자신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라, 가라,
죽어라, 죽어라.

비루한 날들이여, 비겁했던 정신들이여,
가라, 죽어라,

하지만 나는 아직 충분히 교활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커다란 트럭이 내 옆을 총알처럼 달릴 때마다 저 트럭의
바퀴가 만일 덜컥 빠져서 나를 쳐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나,
노상 공포와 대면을 하는 나는 필경 삶에 대한 욕망으로 뭉쳐진
한낱 덩어리라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가막히게도 나는 나 자신의 그러한 공포에서 미묘한 안도감을
맞보기도 합니다. 적어도 내가 아직은 유치한 자살소동 따위로
타인의 이목을 끌며 삶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안정감 말입니다. 한때 그토록 욕망했던 자살은 그렇게 나를
떠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고, 기형도는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가 절규할 때의 이 사랑이란 필경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
나오는 순간에 질렀던 울음소리에 맥을 둔다고 봐야겠지요.
낙원인 줄 알 았았던, 반드시 낙원이어야만 했던, 그래서
낙원의 시작인 줄로만 믿고 나왔던 이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채이면서 절감하는 그 존재와 세계 사이의
어마어마한 사기성(詐欺性)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절규라 여겨집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

그는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쓰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처연한 기록자는 세상이라는 것이 결코 희망의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서툴게 희망을 얘기하는 자들의 입에서 구토 풍기는 검은
혀를 슬프게도 봐버리고 있는 그는 그래서 <입 속의 검은 잎>을
유언처럼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지만 칠팔십년대란 사실로 그런
시대이기도 했지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외치는 신의
대리인들에게서 배가 터질 지경의 도둑을 보았던, 자비를
설하는 부처의 제자들에게서 강도를 보아야만 했던, 안보를
강조하는 통치권자에게서 살인을 보고 질서를 강조하는
경찰에게서 인권유린이라는 최고의 무질서를 보아야만 했던,
적당히 눈 감고 귀 막은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자유와 평화를
멀리서 가슴 오들오들 떨며 하품나게 지켜보며 눈 뜬 자들의
사라져감을 유비통신으로 귀동냥해야만 했던 그 시대를 통과한
기형도에게 있어 사랑이니 희망이란 한낱 금도금한 구리반지에
지나지 않았을 법도 하다는 인식을 나는 지금에서야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요즈음 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성과 신인 프로와 아마를
불문하고 벌어지는 문자와 문자들의 끈적거리는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기형도는 실로 우뚝하기조차 합니다. 어쩌면
그리도 크고 깊을 수가 있는지요.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이 상식이듯이, 사랑노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랑은 희귀할 수밖에 없고 포장이 잘 된 희망 상표는
국정홍보용 등록상표로나 쓸모있게 존재한다는 것을 기형도는
오늘 나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써야지요. 가짜가 진짜에게 가짜라고
나무라는 이 무도한 세상의 그림자놀이를 낱낱이 살피고 기록해야지요.
사랑을 잃어버린 <나>의 상실감을, 배신과 실망의 상처로
얼룩진 <너>의 아픔을, 왜곡된 희망의 연대기 <우리>의 역사를
쓰고 또 쓰고 살피고 또 살펴야겠지요.

실로 게으르고 또 게으른, 못나고 또 못난 자의 새시
대를 앞둔 마당에서 풀어놓는 또 한 번의 못난 각오였
습니다. 이제 이 파란만장한 상투적인 한 해도 다 가
고 있습니다. 오는 해에는 부디 덜 상투적이기를, 희
망이 진실로 희망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
하인사에 가름할까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씩씩해지십시다. 그리하여 도둑을
도둑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렇게 해도 뒤탈
이 없는 세상을 희망이라도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