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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

눈, 눈, 아 그리운 그 함박눈을


어제부터 계속 눈소식이다. 내리면서 냉큼 녹아버리
는 그런 재미없는 눈이 아니라 내리는 족족 쌓이고
또 쌓여서 발자욱을 지워버리는 그런 기가 막히게도
탐스럽고 아름다운 눈이라고 한다.

개들은 아마 지금쯤 내리는 눈을 쫓아 이리 뛰고 저
리 뛰며 입을 쩍쩍 벌리고 눈송이를 덥석 물었다가 실
망해서 컹컹 짖어대다가 또다른 눈송이를 따라 꼬리
를 그야말로 미친 듯이 흔들어대며 달리고 또 달리리
라.

아아, 애석하다. 어째서 이 눈은 호남과 제주에만 내
리고 수도권에는 쬐금 내리다가 마는 것이냐. 그나마
교통대란을 우려해서 봐주는 것이냐 어쩌는 것이냐.
아무렇든 나는 섭섭하다. 정말로 섭섭하다.

아니다. 사실은 수도권에 눈이 안 내려서 섭섭한 것
이 아니라 내 몸이 지금 호남 지방이 아니라 수도권
지역에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섭섭하고 억울해해야
하리라. 그렇다. 수도권에서는 마당이 없으니 눈이 아
무리 펑펑 함박스럽게 내린다 해도 나에게는 그림속
에 떡일 뿐이다.

왜냐고? 내리는 눈을 구경하면 되는데 왜 섭섭하고
억울해 하느냐고? 물론 그렇기는 하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구경하며 걸어도 좋고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어도 좋고 하여간 눈이라는 종자는 여러 가지로 가
슴을 푸근하게 해주는 게 사실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아마도 욕심이 많은 것인지 어
째서인지 펑펑 눈이 내리는 날이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이 일은 호쾌하고 시원하
면서도 다소는 은밀한 부분이어서 이 자리에 까놓기
는 좀 뭣하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뭐 어쩌겠는가.

다들 잠이 든 저녁에 함박눈이 펑펑 흡사 가만히 잠
든 애인의 숨소리만큼이나 낮은 소리를 내며 쌓이는
날이면 나는 홀랑 벗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밖이라고
는 하지만 물론 마당까지만 그렇고 차마 거리로까지
뛰쳐나가는 것은 아니다. 지역도 도시가 아니라 시골
에 있을 때에 한해서만 그렇다.

어쨌든 마당으로 뛰쳐나가서 우선 한 바퀴 두 바퀴
잇따라 재주를 넘는다. 그리고는 반듯하게 누워서 입
을 쩍 벌리고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는다. 먹는다고 했
지만 그게 뭐 먹을 것이나 있겠는가. 다만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심호흡을 하며 온 몸으로 고스란히 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눈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내 육체
를 눈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는 한 바퀴 자반뒤집기를 해서 엎드리고,
엎드린 채로 두 팔과 두 다리를 한껏 벌린 채로 여남
은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벌떡 일어선다. 그때쯤 내
육체는 이미 벌겋게 타들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렇
다. 그때의 느낌은 춥다거나 무슨 얼어들어간다는 것
이 아니라 불이 붙어서 타고 있는 듯한 그런 것이다.

그러면서도 턱은 덜덜 떨린다. 이빨이 떡떡 마주친다
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그렇
게 입속에서 떨그럭 떨그럭 소리가 날 정도로 턱이 요
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춤을 춰야 한다. 딱히 무슨 춤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하여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
구마구 흔들어대는 그런 춤 같지도 않은 춤을 십여분
간 연속적으로 추고 나면, 그러면 가슴에서부터 온 몸
으로 물이 끓듯이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한다.

발이며 귀며 콧등이며 손가락들은 금방 면도칼로 오
려낸 듯이 시리고 아리고 아프지만 몸통에서는 김이
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하나의 모순덩어리로써
살아 있음을 학실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가슴을 느낀
다. 아, 얼마나 소중한 가슴이냐.

가슴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때
는 눈물이 나온다. 그 눈물이 환희의 눈물인지 슬픔
의 눈물인지 고뇌의 눈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
지 못하지만 알고 싶어하는 욕망도 아직은 없다. 다
만 그 짧은 한순간이 일종의 감동으로 내게 남아 있
을 뿐이다.

나는 이를테면 그러한 감동을 즐긴다. 작년 겨울에
는 내가 시골에 내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눈이 별
로 안 내렸다. 그래서 딱 한 번밖에는 그런 감동을 맛
보지 못했다. 그 전전 해에는 서너 차례 정도, 해마
다 서너 너덧 차례 정도는 그런 감동과 조우를 했건
만, 유감스럽게도 금년에는 아직 한 번도 때를 만나
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눈이 내린다고 한다. 눈도 어줍잖은 그
런 것이 아니라 대설경보까지 받을 정도의 그런 함박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프고
섭섭하고 억울한 일이냐. 아, 이것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지금 막막해서 소주라도 벌컥벌컥 들이켜
버리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지금 이런 상태로 소주를 마시
면 나는 필경 이 도시의 어딘가로 발가벗은 채 취기
를 빙자해서 달려 들어갈 것만 같다. 그런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이런 날은 소주를 마실 수도 없다.
이 얼마나 잔인한 모순덩어리냐.

그런가보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순을 명백하게 자각하면
서도 그것을 깨뜨려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또한 인식하
며 괴로워하게끔 되어 있는 것인가보다. 어쩔 것이
냐. 참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