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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

내 영혼과의 조우, 어둠 속의 낙숫물 왈츠


칠흙 같다는 말이 있지, 왜? 그만큼 어두운 밤이었
어.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그런
속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들리는 거야. 음악소리였어.
뻐꾸기왈츠를 연상케 하는 그런 음악소리.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 도저한 어둠 속에서 누가 나
더러 춤을 추자고 하는가. 비몽사몽간이라고나 해야
할지. 나는 아마 꿈결인 것처럼 생시인 것처럼 게으름
을 피우고 있었을 거야. 그러다가 끝내는 그 유혹을
어쩌지 못하고 일어났던 것이겠지.

간밤에 내가 무엇을 했었는가는 여기서 굳이 밝힐 필
요는 없을 거야. 어쨌든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가봐.
앉은 채로 잠이 들었으니 아무래도 뭔가가 불편했겠
지. 거기까지는 생각이 나. 잠결에 일어나서 얻어맞
은 것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는 것, 그러다가 아직
켜 있는 비디오를 끄고, 형광등도 끄고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는 거.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생각이 나.

왜 기어다녔는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추
워서였을 거야. 전등과 비디오는 습관적으로 어떻게
끌 수 있었지만, 잠에 취한 나의 에너지는 아마 그 이
상은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냥 웅
크리고 다시 잠속으로 들어가려 했겠지. 그런데 으슬
으슬 추위가 느껴져서, 불을 다시 켜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이불을 찾아 어둠 속을 기
어다녔던 거겠지.

어떻게 이불을 찾아서 덮었는가는 물론 알 수가 없
어.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소리가 나를 깨우
기 시작한 거야. 똑똑, 노크 소리도 같고, 딩딩, 바이
올린이나 혹은 기타줄을 고르는 것도 같은, 그런가 하
면 통통,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도 같고 하여튼 음악소
리에 가까운 소리였어. 음악은 음악이지만 아직 정리
되지 않은 뭐랄까, 이를테면 불협화음이었던 거야.

그런데 그게 차츰차츰 일정한 음계와 화음을 지닌 작
품으로 완성되어 가는 거야. 그런 느낌인 거야. 아니
다. 그것은 단순히 그냥 하나의 느낌이 아니라 분명
한 사실이었어. 똑똑 딩딩 통통, 하고 마는 것이 아니
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반복되고 있었던 거야. 그러
니까 이건 뭐야. 잠에 빠져 있던 내 의식이, 무엇인
지 알 수 없는 그 소리에 의해 잠에서 점차 깨어나면
서 그 소리를 하나의 음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거
야.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어. 이불 속에서 여전히 게으름
을 피우면서도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는 못하
고 있었어. 오디오가 고장이 나서 시디건 테이프건 아
무것도 음악이 나올만한 기기는 없는데 대체 이게 어
떻게 된 영문인가 하는 의혹이 말야. 그래, 그러한 의
혹이 어느 순간 나를 잠에서 확 깨어나게 한 거야. 그
래서 벌떡 일어났겠지? 일어나서 불을 켜고, 집안의
불이란 불은 죄다 켜고 그 소리의 정체를 찾아 사방
을 뒤지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이게 뭐냐. 아하, 그거였구나.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바깥을 보고서야 나는 내
가 어제 무슨 일을 했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어. 아,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내 개인
적인 역사를 잠깐 돌아봐야만 되겠다.

내가 말야. 이곳 고창의 한 농가에 빈집을 하나 빌
려 수리를 하고 작업실 겸 살림집을 차렸었잖어. 그
게 벌써 오년이나 됐는데 말야.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문학을 업으로 살아간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잖어.

어떤 통계에 따르면 문인들의 일년 수입이 평균으로
쳐서 27만원이라는데 말야. 내 경우에는 다행인지 요
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것보다다 약간 많기는 하지
만 말야. 어쨌든 그걸로는 전기 사용료도 못 댄단 말
이거든. 그러면 뭔가 노동을 해야만 하는데 말야. 농
사를 짓자니 땅뙈기가 하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의 땅
을 빌리는 소작인 노릇은 열불이 나서 못하겠고, 천
상 도시의 날품팔이 노릇을 해왔단 말야.

일 년이면 두세 달씩, 그렇게 노동을 해서 먹고 살아
왔단 말야. 그런데 작년에는 다른 일이 생기는 바람
에 자그만치 육 개월여 동안이나 집을 비우게 됐거
든. 한두 달에 한 번 와서 며칠씩 머물다가 가곤 했
단 말야. 그런데 지난 번 추위에 있잖아. 집에 사람
이 없다 보니 보일러가 얼어서 터져 버리고, 물을 끌
어올리는 모터도 얼어서 터져버린 거야. 인간이란 너
무 추워버리면 살 수가 없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보
일러는 즉각 새 것으로 교체를 했지만 모터는 뭐 그
냥 내버려 뒀던 거야.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으니까 거
기서 대충 길러다 쓰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거지.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매일 아침마다 찬물을 끼얹는
버릇이 있어서 말야. 이게 큰 문제로 부각된 거야. 이
번에도 길어봐야 한 이레나 혹은 열흘 어쨌든 며칠 있
다가 마치 타인처럼 또다시 서울로 가기로 했던 거
라, 새로 모터를 사다가 공사를 벌이기도 그렇고 해
서 그냥 모른 체하고 있었던 거거든. 될 대로 어떻게
되든 말든 뭐 그런 심사였던 거지.

그런데 마침, 고맙게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
하는 거지 뭐겠어. 그래서 나는 올타꾸나 하고, 집안
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죄다 꺼내서 처마 밑에 늘어
놓았어. 고무통에서부터 플라스틱 바가지는 물론이고
양푼이며 심지어는 냄비까지, 죄다 꺼내서 좌악 늘어
놓은 거야. 왜냐고? 시낙숫물을 받아서, 그것으로 목
욕을 하자는 제법 영특한 발상이었던 거지 왜는 왜겠
어.

바로 그 소리였던 거야. 어둠 속에서 나를 깨운 소리
는, 똑똑 팅팅 통통, 저마다 독특한 다른 음향을 자랑
하며 빗소리가, 낙숫물 소리가 그렇게 나를 깨우고 있
었던 거야.

생각해봐. 가만히 보니까 그게 또 그렇네? 그릇의 크
기마다, 용기의 재질마다 그 소리가 모두 다른 거야.
깊이가 깊은 것은 깊은 것 특유를 소리를 내고 얇은
것은 얇은 것만의 소리를 내는 거야. 물론 플라스틱
용기와 스테인레스 용기의 차이도 상당하고 말야. 그
런데 그게 어디 그것뿐이겠어? 소리와 소리의 섞여짐
도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한밤에 들려오는 그 영혼을
두드리는 듯한 울림의 깊이가 말야.

생각해봐. 당신도 아마 알 거야. 부슬부슬 내리는 빗
속의 낙숫물 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얼마나 깊이 있게
하고 영혼을 또 얼마나 정화시켜주는지. 그런데 도시
에서도 이게 가능한 걸까?

맞아. 빗소리라 해서 다 같은 빗소리는 아닐 거야,
아마. 도시에서의 빗소리와 농촌에서의 빗소리는 하늘
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느껴져. 도시에서는, 아무
리 외따로 떨어진 곳이라도 이질적인 소리가 끼여 있
어 온전한 빗소리를 감상할 수가 없거든. 더욱이나 깊
은 밤 빗속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그것은 경박
스럽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지경이지 뭐야.

그런 속에서 영혼의 숨결을 느끼기는 어려운 거겠
지. 영혼의 숨결은커녕 무슨 진흙탕 속을 뒹구는 듯
한 참혹이 있을 뿐이겠지. 생각난다. 뭔가가 찢어지
는 듯한 그 자동차소리들이 생각난다. 마치 누군가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빗속을 달려가
는 그 소리들, 정말이지 이상하리만치 도시에서는 언
제나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소
리가 영혼의 평화를 깨뜨리며 질주를 한다는 느낌이
야.

반면에 농촌에서의 빗소리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그
소리는 뭐랄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내 육체가 마치 육체로서의 고유한 무게를 다 털
어버리고 나비만큼이나 가볍게 하늘하늘 날아오르는
듯한 어떤 정화(淨化)의 순간이 느껴지거든.

그게 아마 춤이겠지?

저 고대의 사람들이 춤을 그토록 즐겨했던 연유를 나
는 오늘에야 확연히 알겠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동굴이나 무덤에 그려 있는 벽화들, 거기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바로 춤이잖아. 여기에서 우리는 예술
의 기원을, 미학의 출발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겠
지. 바로 그것을, 예전에는 책이나 이론들을 통해서
말하자면 관념적으로나 알고 있었던 그것을 오늘 내
가 몸소 체험을 하고 인식을 하게 된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사람이란 정말로 그런 존재인가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생각지
도 못한 것을 배우기도 하고 하는 그런 존재인가봐.
이 얼마나 소중한 거야. 우리가 절망해서 자살해 버리
지 않고 그나마 살아 있었던 데 대한 보답을 이렇게
얻어내는 거 아니냔 말야. 그러니 어쩌겠어. 이유야
어떻든 이 세상이란 것은 그래서라도 끝까지 한 번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라고, 그렇게 말해야 하
는 거지.

아, 어느새 먼동이 터오르네. 창문이 뿌옇게 물들어
가고 있어. 이제 조금 있으면 새들의 소리가 들리겠
지. 부슬비는 그만 그쳐버렸나봐. 좀 더 왔으면 좋으
련만, 내내 부슬비만 안개처럼 내리다가 말려나보다.

그래도 뭐, 물이 없어서 찬물을 끼얹지 못한다 해도
나는 뭐 괜찮다. 영혼이 이렇게 깊어진 느낌인 걸, 깊
어졌으면서도 가벼워진 느낌인 걸, 여기서 뭘 더 바라
겠어. 이만하면 넉넉한 거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