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시퍼런 작둣날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을라
나 모르겠네. 그러니까 당신이 말야. 당신이 시퍼런
작둣날 위에 서 있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봐. 아스라
하게 마치 바람이 심한 날 아파트의 십구층 난간에 널
어놓은 얄팍한 수건 한 장처럼 언제 어디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지 않겠어?
그런 때는 뭐랄까, 자신에게 닥친 절박한 상황 외에
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가 않고 생각을
할 수도 없을 거야, 아마. 어쩌면 또 모르지. 신을 믿
지 않는 자가 신을 찾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런 순
간일런지도.
들어봐, 어떤 여자가 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런 일
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많이 닥치지 않나 싶기도
하네. 남자보다는 여자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더 약
하고 이 세상의 구조란 것이 또 약한 자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식의 냉혹함과 무자비함으로 이루어져 있기
도 하니깐 말야.
어쨌든 여자야. 나이는 스무일고여덟쯤. 대낮인데도
초생달이 올라오는 시간에나 볼 수 있음직한 소복 차
림에 처연한 얼굴, 그리고 양말조차도 안 신은 맨 발
인 채로 춤을 추는 여자가 지금 내 안에 들어 있어.
그럭저럭 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런데도 아직 잊
혀지지 않고 남아서 나로 하여금 문득문득 여자란 무
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저기 안산에 예술인마을이 있잖아. 거기 아파트에 사
는 어떤 중견 소리를 듣는 시인이자 소설가 한 사람
이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마음 당기면 한 번 와 보
라고 해서 갔더니 글쎄 거기에 그 여자가 있는 거지
뭐겠어.
북소리가 둥둥둥 아득하게 울려퍼지는데, 느티나무
뒤에서 하얀 옷의 여자가 사뿐사뿐 가볍게 춤을 추는
동작으로 나오더니 미리 준비해둔 시퍼런 작둣날 앞에
서 멈추는 거야.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또 울려퍼지는 북소리에 맞춰
숨이 딱 멎어버릴 정도로 긴장된 춤을 추는 거야. 조
지훈의 시 <승무>에서나 느낌직한 그런 이미지를 사방
으로 마치 민들레꽃씨처럼 뿜어내면서, 그렇게 작둣날
이 번쩍번쩍 빛을 토하는 햇볕 속에서 춤을 추고 있
는 거야.
일본에서 온 여자래. 그 왜 재일교포 2세라고들 하잖
아. 국제정치로 학부를 마치고 외교학으로 석사를 했
었대나봐. 그런데 그녀는 일본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
릴 수가 없었다는 거야. 그녀의 부친이 귀화를 거부하
고 끝내 한국국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대
장성 내규상 외국인 신분인 그녀에게 외교라든가 국제
정치 같은 민감한 자리를 내줄 수는 없었을 거야, 아
마, 게다가 그녀는 성별이 또 여자이기조차 하잖아.
세계 어느 곳이나 별 다름이 없겠지만 일본에서의 그
것은 좀 더 유별난 데가 있는 것 같아. 조금 똑똑한
여자라면 어짠둥 깔아뭉개고자 하는 것 말야. 아주 똑
똑한 여자라면 이내 무릎을 꿇고 윗사람으로 모시지
만 어중간하게 똑똑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순식간에
뭉개버린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날 내가 본 여자가 바
로 그런 케이스였던 거야.
어려서는 국적이다 민족이다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
하고 자란 여자애가 성인이 되어서 그것을 인식하게
된 거야. 이리 부대끼고 저리 채이고 온 몸이 피투성
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비로소 자유는 천부적으로 주
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런데 그것을 발견했을 때
는 그녀 자신이 이미 너무 멀리까지 나와버렸다는 사
실을 깨달아야만 했어. 어려서부터 줄곧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온 여자가 한꺼번에 몰아닥친 절벽
과 벼랑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는 건 아마 인지상정이
기도 할 거야.
처음에는 분노가 있었겠지. 끝간데 없는 분노로 이
를 바드득바득 갈며 주먹을 쥐기도 했었겠지. 그러나
현실의 벽이 너무 높고 두껍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부
터는 자기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욕감을
느껴야만 했겠지. 모욕감과 치욕감으로 부들부들 떨
며 밤에 잠도 못자고 술을 마시며 자살을 꿈꾸기도 했
겠지.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몸의 살이 빠지고 눈이 움
푹 들어가고 사람을 기피하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게
된 거야.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알몸인 채로 그녀는 어
느날 홀연히 한국으로 건너온 거야. 한국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온 것일까. 일본보다는 그래도 나을 거라
는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온 것이었을까.
아니지.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 어떤 희망도 무엇
도 없이 그냥 비행기를 탔던 것이었지. 그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했던 것이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그렇다고 죽음 앞에 넙죽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내면의
절박한 소리가 그녀를 그렇게 한국으로 인도해왔던 것
이지.
그러니까 이건 뭐야. 요컨대 그녀는 인간이란 근본적
으로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 존
재인가, 하는 물음표를 발견하게 된 거야. 사람이란
게 그렇잖아. 그런 엄청난 물음표와 직면하게 되면 세
속적인 출세라든가 욕망 따위와는 저절로 멀어지게 되
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이른바 신이라는 존재와의 면
담이 필요하게 되는 거잖아.
그렇게 됐던 거야. 그렇게 해서 그녀는 한양대의 문
화인류학과에 적을 두고 자신의 뿌리를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던 거야. 그런데 그녀는 이미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있었던 까닭으로 이론적인 공부는 할 수가 없었
어. 따지고 보면 죽은 말들의 나열에 불과한 이론이
나 만지작거리기에는 그녀의 내부에서 부르는 목소리
가 너무나 크고 집요하고 파상적이었던 거야.
그 왜 무병이라고 하잖아. 딱히 어떤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만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일어
나고 싶지 않아지는 증상 말야. 무가에서는 그것을 신
의 재림이라고 하는데 그녀가 다시 일어나서 사람 구
실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녀의 속으로 들어온 신의
얘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아직 신
의 얘기를 들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그녀는 무당이
아니니까. 신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하듯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을 내림
굿이라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녀는 이미 한 차례의 내림굿을 받고 내
가 갔던 그날은 마지막 관문인 작두타기 과정을 공개
적으로 하려하고 있었던 거야. 멀리서 보기만 해도 숨
이 그만 덜컥 멎어버릴 것 같은 처연한 얼굴에 맨발
의 한들거리는 춤사위로 에너지를 끌어모으면서 말야.
하지만 그녀는 그날 유감스럽게도 작두를 타지는 못
했어. 은장도처럼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작둣날에 한
발을 올려놓으면 그 즉시 다른 발이 움직여야 하는데
도무지 움직여주지를 않는 거야, 글쎄. 아마도 사진기
자들이다 뭐다 그런 쓸데없는 구경꾼들 때문이 아니었
나 싶어. 주위가 너무 산만하니까 내면의 기운이 그
만 움츠러들고 말았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그래.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가 그토
록 애간장을 태우며 조마조마했는데 본인인 그녀의 육
체는 또 얼마나 타들어가고 있었을까, 영혼은 또 얼마
나 화를 내고 있었을까, 어쩌다 불현듯이 그녀의 그
때 모습이 떠오를라치면 나는 지금도 아득해지곤 해.
이 작둣날 같은 세상을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문득문득 그런 의문
이 들고는 해. 하지만 그녀의 세상이 지금도 그때처
럼 작둣날로 존재하지는 않겠지. 않을 거야 아마.
아, 그런데 이거 참 어쩌나. 얘기를 하다 보니 본론
은 꺼내기도 전에 서론만 장황해지고 말았네. 어쩌
나. 우리나라에서 어떤 종교의 어떤 분파든 여성신도
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나는 그때 확실하게
알겠다는 느낌이었다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인데 사실은.
사람 세상에서는 여자가 설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 그래서 초월적인 어떤 것을 희구한다는 거. 그런
데, 그런데 말야. 종교의 실상을 파고들어가보면 거
의 백퍼센트가 남성들이 운영하는 것이거든. 일부 아
름다운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거의가 사업적으로 운
영되고 있기도 하고 말야.
이건 뭐야. 여자란 존재는 결국 신의 세계에서마저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이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잖아. 그렇다면 또 한 번, 여자란 뭐지? 도대체 여
자란 무슨 존재인 거야?
아래 사진은 호앙 미로 <시간의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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