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일본의 젊은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자신의 저서 도주론『 逃走論 』
서두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남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정으로부터, 혹은 여자로부터. 어느 쪽이든
멋지지 않느냐.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서투른 만류공작(挽留工作) 같은 걸 하
고 있을 틈이 있으면, 남겨져서 억울해하는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 같은 건 알 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성급한 페미니스트들은 혹 이렇게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반동의 나팔소리야?
그래서, 성급한 페미니즘론자들의 그러한 반문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을
조금 바꾸자면 이런 말이 된다.
<여자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정으로부터, 혹은 남자로부터, 혹은 아이들
로부터 여자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 멋지지 않느냐. 남자들이
나 아이들도 어리석은 만류공작 따위를 할 틈이 있으면 남겨져서 억울해하
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냐. 달아
나라, 달아나라, 마음이 식기 전에 빨리 달아나라.>
아니면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아이들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아비로부터, 어미로부터, 혹은 학교로부
터, 혹은 미래의 허망한 출세지상주의로부터 아이들 이줄행랑을 치기 시작했
다. 어느 쪽이든 멋지지 않느냐. 아비나 어미들도 자식을 붙잡고 그러지 말
라고 애원할 틈이 있으면 차라리 먼저 줄행랑을 쳐라. 자식이 도망치기 전에
먼저 도망쳐라.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따위야 아무려면 어떠냐. 뛰
어라.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그냥 뛰어라. 어디까지든, 언제까지든 뛰어라.>
그러면, 그렇게 다들 도망해 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느냐고?
이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가 그 문제를 생각해볼 것이다. 그것이 옳지 않
은가? 그것이 옳은 순서이지 않은가? 누가 내게 답을 준단 말인가. 답을 주
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 똑독한 사람이 내게 답을 준다고 하는, 혹은
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미망으로부터도 우리는 이제 도망해야 한다. 과감히
도망해야 한다.
내가 세상을 살고 있는 이상 세상은 결국 내 것이지 않은가? 남의 것이기
이전에 우선 내 것이지 않은가? 그것이 비록 돈이나 쇠고기 같은 물질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상 세상은 내 것이다. 내 것일 수밖
에 없다. 내 것을 누가 어루만져주고 슬퍼하며 걱정할 것인가. 누가 무슨 해
답을 줄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21세기의 벽두, 지금 일본의 지성계는 후꾼 달아올라 있다. 그런 외신이 속
속 들어오고 있다. 프라이팬 얘기가 아니다. 프라이팬에 콩 볶는 따위 그런
짜잔한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사실 쉽게 끓고 쉽게 식는 사람들이 아니다.
냄비가 어쩌고 하는 얘기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에게 적합하다. 그렇지
않은가?
일본인들은 남의 것을 응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교묘한 기술에
능한 족속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이 시장 가니까 나도 간다는 식의 허망
한 기회주의자들은 아니다. 누가 뭣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하면 거기로 우르르
몰려드는 그런 밸도 쓸개도 없는 기회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간사하고
얄팍한 것 같지만 신중하고 심각하다.
지금 일본 지식인들의 최대 화두는 "우리는 무엇인가?"이다. 이 말을 조금
바꾸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어떤 자격으로 위치해 있는가?"가 된다. 그들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일본은 극장이다. 거대한 극장이다. 극장에 불과하다. 필름이 없는 거대한
극장, 오직 극장일 뿐이다."
극장, 필름이 없는 거대한 극장이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건물은 있는데 내
용이 없다는 것, 속이 텅 빈 우람한 껍데기 즉 죽은 소라고둥 같다는 것, 하
드웨어는 우람한데 소프트웨어가 형편없다는 것, 이것이 이십일 세기의 벽두
일본 지식인들이 진단한 일본의 현주소다. 이것을 일본인 특유의 엄살이라고
간단히 넘겨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만 보기에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
하고 절박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으로 어리둥절해져 버린다.
한국의 토속식품 김치까지도 자기들 나름의 기술화해서 '기므치'라는 브랜드
로 수출을 하는 저들에게 정말로 내용이 없는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연
코 "아니다"이다. "웃기는 소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저들은 내용
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면 걱정이지 없어서 걱정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자기들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눈을 번쩍 뜨고 사방을 둘러봐야 한다
고 전국민을 상대로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농촌의 시멘트 수로(水路)를 때려부시고 그 자리를 과
거의 흙으로 채우고 있다. 소위 근대화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서양
문물의 잔해들을 차근차근 제거해나가고 있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사건(?)을 획책하고 있는가? 진상은 이렇다. 간단
하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하는, 살아간다고 하는 이 엄청난 명제는 곧 미래로의
부단한 움직임을 의미한다. 미래란 말할것도 없이 현재의 다른 모습이다. 불
만으로 가득한 현재의 개선된 모습, 그것을 우리는 미래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현재에 자족하고 있다. 미래의 초상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조금 바꿔보자. 현재가 겉이라면, 틀이라고 한다면
미래는 곧 내용이고 속이다. 현재가 하드웨어라면 미래는 소포트웨어다. 그
런데 지금 일본은 현재의 거대함에 자족하고 있고, 그래서 속이 없다. 텅 비
어 있다. 요컨대 미래의 청사진이 없고, 청사진을 그려내지도 못하고 있
다…….
이것이 일본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소위 극장론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한다. 달아나야 한다고, 현재의 풍요로부터, 엄청난 부와 명예로부터 과감
히 달아나야 한다고,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일본은 곧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처음에 시큰둥하던 대중들은 서서히 그 말에 공감을 표시
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도 명망 높은 거대한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가 텔
레비전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자신의 죄(?)를 자복한 것은 하나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제 전면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방향에서 현재를 반성하
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역시 일본이다. 일본인들답다. 그렇지 않은가?
탈주의 논의는 프랑스의 질 들뢰즈에서 그 시발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집단
의 <건강한 이성(理性)>으로 개인의 <추악한 욕망(慾望)>을 통제할 수 있
다고 믿었던 마르크스의 매력적인 계산표가 어쩌면 부도수표일지도 모른다
는 의구심이 싹트던 시기에 들뢰즈는 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주창하고 나섰
다.
이성과 욕망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인간의 살아야 할 당위와 그 안
전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성 우위의 사회에서 인간은 한없이 비굴해지고, 욕
망 우위의 사회에서 인간은 연쇄살인범이 되어야만 한다. 다소 거칠기는 하
지만 우리는 아마 이것을 들뢰즈 이론의 핵심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것을
일본의 몇몇 지식인들이 받아들여서 자국민들에게 하나의 나침반으로 제시
하고 있고, 대중들은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성이란 무엇인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 출세를 해야한다는 것,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요컨대 살인을 해서
는 안 된다는 바이블 또는 초등학교 교과서와도 같은 것, 맹세와 약속은 그
렇게 하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서슴없이 살인을 자행하는 것, 이성이란 그
런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실제로 가능한가? 머릿속 생각
만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돈을 벌 수 있는가? 출세를 할 수 있는가? 가
슴은 돌처럼 끄덕도 안 하는데 교과서를 펼쳐놓고 앉아서 사랑을 해야 한다
고, 사랑을 해야 해, 사랑을 해야 해, 하고 기도문을 외우듯이 자가최면을 건
다고 사랑이 되는가? 돈을 벌어야지, 돈을 벌어야 해, 하고 억만 번을 외운
다고 돈이 벌려지는가?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하
고 억만 번을 외우고 또 외워서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해서 이른바 출세를 한
사람은 절대로 살인을 안 하는가? 그렇게 열심히 외우고 또 외운 사람일수
록 잔인하게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랑은커녕 사랑의 대상을 자기욕
망의 발판으로 전락시켜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아가
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지식사회에 열정의 불을 지펴놓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돈으로부터
도망쳐라. 명예로부터 도망쳐라. 현존하는 모든 허망한 정의와 선민의식 그
리고 피해의식과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도망쳐라. 도망하면 얻을 것이요 집착
하면 깡그리 잃어버릴 것이다.
지식인들의 그런 절박한 호소에 일본의 대중들은 귀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머리끝이 쭈볏 서는 마음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고 나서
<일본>의 이익과 충돌하는 <개인>의 이익을 찾아내서 포기하거나 보류한
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얼마나 미래가 있는 족속들인가. 일본을 찬양
하고 싶은 마음이야 물론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들은 지
금 명분과 실리가 행복하게 조응하는 그런 <명실상부>한 세계의 주역으로
거듭나고자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파시즘을 지향하는 일본의 이른
바 우익세력이 부쩍 목소리를 높이는 근간에는 굉장히 역설적이게도 이런
막강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일본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돌아보고 있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무엇인가? 모래알만도 못한 지역의 감정
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 노무현 같은 사람을 정
형근이 대신 바닷속에 과감히 던져버리고, 오직 하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
을 위해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남북의 관계개선이 헌법위반이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전직 대통령을 가진 우리 땅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금 어떤 그림으
로 현현되고 있는가?
게다가 이제는 인간의 영혼을 터치하는 문학판마저 정치판을 닮아가고 있다.
문화권력이 좋으니 나쁘느니 갑론을박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까놓고 귀
족노릇을 하겠다는 듯이 종신심사위원제도라는 것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프랑스에 그런 제도가 있어서 우리도 한 번 해보는
것이라고, 해볼만한 제도가 아니냐는 게 그들의 주장이긴 하다.
그런데 우리의 인문학이 지금 프랑스의 그런 훌륭한 제도를 빌려와도 되리
만치 성숙해 있는가? 십 페이지짜리 비평문 한 편을 쓰는 데도 외국의 유명
한 사상이나 저명한 누군가의 이름을 들먹거려야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비평가 학자들로 우글거리는 이 땅에서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못
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속담이 어쩌면 이리도 똑 들어맞는지 신기하
기조차 하다.
1800년대 후반 우리의 선조들이 무엇을 가지고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
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무렵에 바다 건너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민심을 통일
하고 넘쳐나는 힘을 외국 침략으로 돌렸는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제
우리는 지금 이 안일무사한 자리를 벗어나야지 않을까. 도망가야지 않을까.
도망하면 살고, 머무르면 먹히는 그런 시스템속에 우리는 지금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래의 조각 사진은 로뎅 <허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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