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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별장(1)

나도 이젠 이 집을 나가야겠다. 나가서 내 집을 지어야겠어.”

 

아버지의 회갑 날 아침이었다. 내 딴에는 정성껏 차린 밥상 앞에서 아버지는 느닷없는 선언으로 집안 분위기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남편은 그나마 생각할 틈이라도 있어서 아니 아버님 그게 무슨?”하는 식의 반문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생각이고 뭐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으로 그저 눈이나 깜빡깜빡하고 있어야 했다. 아침을 먹고 어디를 가서 무엇을 구경하고, 다시 또 어디를 가서 무엇을 먹는다는 등등 나름 세심하게 짜놓은 아버지의 회갑 기념 일정표가 휴지조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평생을 집 한 채 없이 살아 왔으면서도 집 한 채 없이 살고 있다는 투의 자괴감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는 아내가 있어본 적이 없다. 한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와, 금방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방울이 가슴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던 까닭이다.

 

이십 분만, 아니 십 분만, 화장실에 갖다올 시간 동안만 좀 품에 안고 있어줘 응?”

 

흐느껴 우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흐느껴 우는 것 이상으로 절박한 슬픔이 느껴지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아이는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어어, 할 사이도 없이 품에 안겨져 있는 아이의 눈에서 다시 그 여인의 눈을 보았다.

 

단풍이 꽃처럼 뿌려지는 계절이면 으레 그 여인의 목소리와 눈망울을 회고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먼 데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순진하고도 우직한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은 철도박물관에서나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객실 내부가 마치 시장바닥처럼 혼잡스런 비둘기호 완행열차 안에서 일어난 그날의 그 사건으로 해서 나는 아버지를 얻었고, 아버지는 졸지에 딸을 두게 되었다. 스물세 살 나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가슴을 차지해버린 여인에 대한 환상 내지 희망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그날로 철도변에 버려졌거나, 보육원 같은 데로 옮겨졌을 것이다.

 

나 자신의 살고자 하는 의지도 제법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이제 겨우 젖이나 뗀 계집아이가 무엇을 그렇게도 많이 알아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남자에게 나를 예뻐해 달라고 아양을 떨었을까마는, 아버지의 기분이 매우 우울하거나 나빠졌을 때,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까르르 웃어대는 딸내미가 그 우울과 그 나쁨을 싹 다 밀어내 버리곤 했다는 게 아버지의 표현이고 보면, 나는 어쩌면 아주 일찍부터 내 자신의 운명이 비상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네가 웃을 때, 웃는 네 얼굴에서 네 엄마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은 그 눈이 보이는 것이어서 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남들 다 하는 연애도, 결혼도, 심지어는 술 마시고 노래하는 유희 같은 데도 관심을 두지 못했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뒤로 사십여 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내미 하나만을 바라보며 인생의 대부분을 시멘트 냄새와 함께 해 오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내 기억에, 그리고 일기장에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웃음과, 눈물과, 기쁨 그리고 슬픔의 기억들, 그 모든 기억들이 함축적으로 압축된 문장 하나를 고르기로 하자면 아무래도 결혼식장에서의 그 일을 첫손가락에 꼽아야 하리라.

 

이 큰 은혜를, 어찌 갚을까?”

 

웨딩마치에 맞춰 한 걸음, 두 걸음 행진을 하던 어느 순간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때 무슨 응답을 하셨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이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꺼낸 나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나는 그만 감정이 북받쳐서 눈이 멀고 말았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말이 그렇게도 실감날 수 없었다. 지난 세월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어여뻐해 주셨는가를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그날 그 자리에서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졸업하기 어려워서 중퇴했다는 아버지였다. 나이가 차면 해군 하사관에 지원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공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플라스틱 바구니를 찍어내는 사출기 부서에서 오른쪽 정강이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로 그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이제 다시는 남들과 똑같이 좌우 대칭이 잘 맞게 걸을 수 없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은 소년은 그 순간 크게 뭔가를 깨달았던 것인지, 병원에서 우연히 알게 된 건설현장 십장을 따라다니는 이른바 떠돌이 인생길을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걸을 때는 심하게 드러나는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뒷모습은 때로 한 장의 풍경화 같기도 했다. 그런 떠돌이 인생이라도 그대로만 쭉 갔으면 자유라는 이름의 개인적인 행복을 구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졸지에 얻어버린 딸내미 때문에 떠돌이 인생의 자유로움마저 압류당해야 했다는 것을 나는 스무 살도 훨씬 넘어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겨우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떠돌이의 자유를 선택한 아버지에게 나를 좀 보살펴달라고, 나를 버리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압력을 넣고 있었던 셈이었다. 어린 내가 뭘 알아서 그런 압력을 넣었을까마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버지에게는 구속이요 압박이었던 까닭에 아버지는 아마도 뭔가를 포기한다는 의식도 없이 포기하고 있었으리라.

 

아버지가 공사장에서 하시는 일은 이런저런 온갖 잡다한 것들이었다. 그런 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공사장에서는 잡부라고 불렀다. 전국방방곡곡 어디라도 공사장이 있는 곳이라면 불려가는 게 직업인 잡부는 대개 회사에서 지어놓은 합숙소 생활을 하니까 불편한 점은 많아도 돈은 크게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내미와 함께 지내야 하니 따로 방을 얻어야만 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다는 말이 유행이었던 시절의 공사장 잡부 수입으로 일 년이면 적어도 두 번씩은 다른 곳에서 방을 얻고, 그 방에 맞는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딸내미가 주변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초라하지 않도록 이런저런 온갖 신경을 써야만 했으니, 그야말로 등골이 휘다 못해 끊어질 지경이었을 테지만, 정작 그 수혜자인 나 자신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어른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없으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통해서 알았다고나 할까.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면서도 나는 아버지가 비록 집 한 채 없이 여기저기 이사 다니는 일을 취미처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돈벌이는 제법 잘하는 걸로 여겼다. 그러니까 나는 다만 아버지의 소원인 선생님이 되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나중에 나를 비춰주는 반면거울과도 같은 일기를 나는 쓴다는 의식도 없이 열심히 쓰고 있었다.

 

너는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꼭 되어야 한다.”

 

언제부터 그 말을 들어 왔는지 알 수는 없다. 선생님이 무엇인 줄도 몰랐던 시절부터 나는 아마 아버지의 그 말을 들어 왔고, 그리하여 중학교 선생님은 흡사 모태신앙처럼 내 가슴에 새겨졌다고 여겨진다. 아버지 자신이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까닭에 중학교 선생님을 굳이 강조하신 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중등교원 자격을 얻었고, 임용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만난 남자의 애인이 되었고, 애인과 나란히 앉아서 옛 사진첩을 들춰보다가 내친 김에 일기장까지 싹 다 보여줘 버렸다.

 

야아, 이런 분이시라면!”

? ?”

나는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 되고 싶다.”

 

애인의 옛 일기장을 꼼꼼히 살펴보던 남자의 그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아버지를 새로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분명 발견이었다. 내가 얼마나 보면서도 못 보는 청맹과니 바보 같은 인생길을 걸어 왔는지, 바보 같은 딸내미 때문에 아버지가 속으로 얼마나 힘들어 하셨을지, 내 손으로 일기를 쓰면서도 나 자신은 미처 못 보고 있었던 그것을 미래의 남편은 보고 있었고, 영원한 바보로 기록됐을지도 모를 나는 그 순간 마치 확 발가벗겨지기라도 한 듯이 놀라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 자신이 보육원 출신이 아니라면 그런 발견이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그는 그것을 발견해주었고, 나는 미래의 남편 덕분에 그나마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