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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17)

누님에 관하여

 

수심모텔 앞에서 손님은 한 명도 없는 텅 빈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탔다. 운전기사는 어야디야 어쩌고 무슨 뱃노래 같은 것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운전기사가 혹시라도 무료해서 내게 말을 붙어오면 어쩌나 싶어 맨 뒤의 장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누님네 집이 있는 곳까지는 겨우 세 정거장일 뿐이었다. 누님네 집이 그렇게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나는 엉뚱하게도 실망스러웠다.

 

그랬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뻔뻔함은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누님네 집으로 성큼 들어서기 위해서는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

 

뭔가가, 그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 나는 면소재지를 오른쪽에 끼고 어슬렁어슬렁 마당바위를 지나 은사골로 내처 들어갔다. 옛길을 더듬어 내 양심의 때를 조금이나마 벗겨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어서, 얼굴만 보면 그냥 연민의 정을 느끼고 끌어안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초췌한 몰골로 만들어서 누님의 모성본능을 고스란히 끌어내고자 하는 교활한 발상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뺨을 핥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직은 다소 쌀쌀하게 느껴지는 사월의 오후였다. 길은 자갈투성이의 구불구불한 옛길 그대로였지만 풍경은 옛것이 아니었다. 계곡을 따라 층층이 일궈놓은 논이며 밭들은 버려진 지도 벌써 오래인 듯 묵은 억새와 잡초들이 불을 붙이면 금세 하르르 타버릴 것처럼 두텁게 쌓여 있었고, 버들개비며 미루나무 따위들이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며 촘촘히 박혀 있기도 했다.

 

저 무성하고 보드랍게 마른 숲의 도처에서 새들은 지금쯤 알을 낳고 새끼를 칠 준비에 여념이 없겠지. 뱀들은 아직 땅 속에서 새들이 알을 낳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위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에서 물그림자를 보았다. 한 구비를 돌아 또 한 구비를 돌고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흔들리며 거품을 일으키며 물은 거기에 자기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면에서는 거의 감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흔들림이 바닥에서는 빛의 도움으로 현란한 얼룩무늬를 연출해 내는, 아주 작은 거품 하나마저도 둥글거나 혹은 길둥근 접시 모양으로 부단히 변태를 하는 살아 있는 물의 존재를 나는 오랜 시간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그저 물이었을 뿐이던 물의 조용하면서도 현란한 살아 있음에 나는 문득문득 소스라쳐 놀라고는 했다.

 

돌멩이마다에 붙어 있는 크고 작은 다슬기와 무수한 애벌레들의 부단한 움직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자리를 이동해 있거나 또는 머리의 위치를 바꿔놓고 있는,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런 현상들이 왜 지금은 내 눈에 비쳐지고 있는가? 나도 미처 모르는 내 안의 무엇이 지금 이렇듯이 변화를 열망하며 꿈틀거리고 있는 것인가?

 

툭하면 숲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꺾거나 바위골짜기로 나가 가재를 잡던 시절, 돌을 들어 발등을 찍어도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 없이 똥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넌 그러는 게 재밌어?”하고 천천히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곤 하던 누님의 사춘기를 나는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계집아이의 때를 벗어버리고 여자가 되어가던 무렵의 그녀, 누님, 나를 무한히 어리둥절하게 하고 심술사납게 하고, 그리고 아프게 했던 시절의 그녀, 그녀가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마치 가을날의 모닥불처럼 후둑후둑 소리를 내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누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은사골의 일심암에서였다. 나는 그때 어머니와 단 둘이 일심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선암으로 이사를 했고, 이사를 하고 오래지 않아 누님은 다시 은사골로 돌아갔다. 은사골의 박수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누님은 나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어머니를 만난 것은 나보다 훨씬 나중이었다. 인생에서 가령 부활이라든가 재탄생이라는 것을 현실적인 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날을 기점으로 나이를 다시 계산해야 하는 것이라면, 누님은 나에 비해 적잖이 사 년이나 뒤에 태어난 셈이었다.

 

나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만났고 누님은 열한 살에 만났으니 말이다. 요컨대 누님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누님이면서 네 살이 적은 동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님은 나를 오빠처럼 따르고 어려워하면서도 또한 동생처럼 꾸중도 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지만 나는 사실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어머니가 내 나이 다섯 살에 나를 다리 밑에서 발견했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죽었거나 적어도 죽음의 직전에 탁발수행 중이던 어머니의 눈에 띄어 새로운 삶을 얻은 셈이었다.

 

나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나는 아무 지식이 없었지만 그러나 누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딱히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어도 내 의식에 뜨거운 화인처럼 박혀 있었다. 많은 가축과 인명이 물에 떠내려가고 집이 무너져 내린 대홍수의 뒤끝이었다. 천둥 번개가 아직도 요란한 저녁 무렵에 간간이 흩날리는 빗속을 뚫고 그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내게로 왔다.

 

그녀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개성이라고나 할까. 첫인상부터가 까닭을 알 수 없는 뭔가 심술을 부려보고 싶어지게 하는 여자아이였다. 빗물을 머금어 한층 새까매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나마 가리고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그저 오돌오돌 떨며 딸꾹질이나 가끔 해대고 있는 것이 마치 죽도록 얻어맞은 뒤에 사로잡힌 토끼 같았다. 졸지에 부모와 집을 잃고 강아지처럼 내리 울기만 하다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빗속의 가파른 숲을 숨차게 올라온 탓이었는지도 몰랐다.

 

키는 나보다 큰 것도 같고 비슷한 것도 같았지만 몸매는 훨씬 깡마르고 볼품이 없었다. 가난과 애처러움이 떨어지면 큰일이라는 듯 뼈에 가죽이 붙은 채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형국의 몸매였다. 그런데도 가슴에는 좌우 대칭이 딱 알맞게 땡감만한 것이 두 개 마치 흙을 밀고 이제 막 일어서는 버섯처럼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밀어내며 볼록 솟아나 있었다. 그녀의 애처로움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당돌하게 솟아오른 그 땡감 같은 그것이 아마도 나를 심술스럽게 했을 것이었다.

 

얼른 파자마 한 벌 내오너라.”

 

어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고는 허둥지둥 공양간으로 들어가서 불을 지폈다. 당신은 밥을 짓고 나는 옷을 갈아입히고, 아마도 그렇게 일을 분담하자는 뜻인가 보았다. 어머니와 나 그렇게 둘이서만 살고 있을 때였다. 당연하게도 여자아이가 입을만한 옷은 어디에도 없었다. 입어보나마나 어머니의 옷은 너무 크고 헐렁할 것이었다. 결국 내 옷을 내다 주라는 얘기였다. 나는 내 옷 한 벌을 꺼내 들고 나와서 아직 토방에 서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지껄였다.

 

나더러 오빠라고 해. 그러면 이 옷 줄게. 안 그러면 안 준다?”

그러자 그녀는 오들오들 떠는 몸 그대로 나를 한참이나 올려다보더니 딸꾹질 소리와 함께 내가 시킨 그대로 했다.

오빠.”

? 내가 왜 네 오빠냐?”

 

내가 그때 그녀에게서 기대한 말은 오빠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내가 요구한 그녀의 항복을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뒤통수라도 맞은 듯이 얼떨떨하고 아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상하고도 어이없는, 배반을 당한 듯한, 육체의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려버린 듯한 허탈감을 어쩌지 못한 채로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물안개가 자욱이 서려 컴컴한 동굴도 같고 막막한 바다도 같은 마당의 연못 저편 숲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도 요란하던 천둥도 번개도 언제 어디로 가버렸는지 무성한 이파리의 킨 큰 관목으로 빽빽한 숲은 작은 움직임조차 없이 옅은 먹물로 그려놓은 산수화처럼 그냥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녀를 와락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마루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마당으로 단숨에 훌쩍 건너뛰어 연못을 옆에 끼고 당귀밭을 가로질러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숲속으로 깊이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인가 뒤에 나는 아마 온 몸을 거미줄로 척척 휘감아놓는 듯이 들려오는 돌아서지 말아라, 돌아가지 말아라,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도 같고 위협하는 것도 같은 그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헤매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옆으로 약간 뒤쪽에 그녀가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은 자세로 역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촛불을 배경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두 여자의 희미한 실루엣은, 희미하나마 그것은 영낙없는 문수보살의 현신(現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