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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어떤 살인(1)

05

 

간단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봅니다. 대상이 누구냐의 문제지요. 이런 일도 인물의 문제가 있는 것이로군요. 쉽지는 않지요. 과거에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존중하지 않았으나 얼마 전까지 존중했던 사람이라면 다소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인물은 확정되었나요?

 

아빠는 내게서 눈을 떼어 천장으로 향한다. 나는 아빠의 이런 자세에 익숙하다. 오래 고심해온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천장을 봐야만 한다. 천장 어딘가에서 문득 떠오를지도 모르는 얼굴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대상을 확정할 만한 준비시간이 아빠에게는 아직 더 필요하다.

날마다 이런 식이다. 벌써 몇 달째인가. 아니 어쩌면 몇 년이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집에 온 지도 벌써 삼 년이다. 그 무렵에 아빠는 이미 자신의 고민에 익숙해 있었다. 내 앞에 앉을 때면 늘 굳은 표정으로 마치 오늘도 안녕히, 하듯이 비감하게 다짐을 하곤 했다. 오늘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을 확정하겠노라고.

하지만 집을 나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모양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다가 깨면 잊었던 문제가 다시 생각난다. 처음 몇 번인가는 일이 너무 바빠서 깜빡했노라 애써 변명을 하기도 했다. 망각도 한두 번이지 날마다 그것을 이유로 댈 수는 없었다. 말문이 막힌 아빠는 막막하고, 아득하다. 자신이 한심하고, 저주스럽고, 죽이고 싶도록 밉기도 하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 자기 자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까. 아니, 아니, 자살 말고 살인, 살인을 할 수도 있겠는가 말이다.

 

문 여는 소리에 아빠는 흠칫 놀라 좌우를 둘러본다. 컴퓨터를 아빠에게 내주고 방으로 들어갔던 할아버지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오다가 아빠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혀 차는 소리를 낸다. , , 새벽부터 저 얼굴 찌푸린 것 하고는, 원 쩟 쩟.

일어나세요, 일어나요, 안 일어나면 뽀뽀할 거야. 옆집에서 알람이 울다가 멎는다. 골목을 누비는 신문배달 아줌마의 오토바이 소리가 알람 대신 사람들을 깨운다. 집 앞 골목으로 두부장사가 지나가고, 이제 곧 엄마가 밥을 지으러 나올 것이다. 엄마는 미운 소리로 한 마디 아빠에게 던진다.

 

나는 또 어디 죽으러 간 줄 알았네. 마누라 팽개치고 나가서 한다는 짓이 겨우 채팅질이라니. 어디 봐. 애인 몇이나 만들었는가.”

애인은 무슨, 저리 가, 저리 가.”

 

두 사람 다 말뿐이다. 엄마는 결코 아빠의 채팅을 엿볼 생각이 없다. 아빠 는 엄마가 달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일단 모니터를 두 손으로 가리고 본다. 아내도, 남편도, 서로에 대한 기대나 관심이나 원망 같은 것들을 조금씩 갉아서 매일을 연명해 온 까닭에 더 이상은 뜯어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기호로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안다.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얻어지는 익숙한 지리멸렬은 꿈이나 열정이나 관심 같은 것들이 죽은 자리에서 기어 나오는 바이러스라는 것을.

 

그리고 한 가지 더 미리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정해지면 기술적인 문제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현재 개발된 상품은 많지만 아무 기술이나 권해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님께서는 우선 자신의 욕구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명확히 해 두셔야 합니다. 그게 선행되지 않으면 살인의 쾌는 반감되거나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칼의 기술을 선택했을 경우 님께서는 일찍이 죽어버린 줄 알았던 심장의 강한 박동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죽어가는 자의 뜨거운 피가 오래 전에 죽어버린 님의 피를 소생시켜 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칼의 기술은 지리한 일상에 대한 환멸이 욕구의 동기가 된다 하겠습니다. 생매장이나 밧줄의 기술은 담백하고 깔끔하긴 하지만 심폐기능 향상에 별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밧줄로 목을 조이는 컨셉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동기가 될 때 권하는 상품입니다. 열정의 측면에서 보자면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분들이지요. 생매장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상품은 사채업자 같은 분들이 못 받은 돈 대신 사람을 받고자 할 때 주로 권해드립니다. 가끔은 정치권에 계시는 분들이 배신감을 치유코자 할 때 생매장의 기술을 응용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님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첫째 욕구의 동기를 명확하게 하셔야 하고, 둘째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신가요. 오늘은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신가요.

 

아빠는 담배를 피워 물고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커서를 깜빡거리는 방식으로 아빠의 시선을 잡아둔다. 아빠는 충혈된 눈을 끔벅거린다. 눈물이 나온다. 한숨이 길게 터진다. 나는 대체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 왜 죽여야 하는가. 아니 그보다도 언제부터 이런 욕구를 갖게 되었던 것인가. 복잡하다. 살인이 이렇게도 복잡한 절차와 동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 줄 미처 몰랐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만두기에는 그 매력이 너무도 새콤달콤 쌉쌀해서 절로 침이 넘어간다. 입술이 타고, 목도 타는 것 같지만 물 생각은 나지 않는다. 아빠는 다 타버린 담배를 비벼 끄고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날카로운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 깨우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면 엄마의 화살은 남편에게로 향할 것이다. 아니 아직도 그놈의 채팅질이야. 출근은 안 한다 이거지. 좋아. 그렇다면 난 들어가서 잘 거니까 애들 밥이나 퍼줘. 내 속옷이랑 이불도 좀 빨아서 널고.

담배연기가 허공에서 둥글게 굴렁쇠처럼 구를 듯이 꿈틀거리다가 풀어진다. 그리고 다시 동그라미 하나가 생긴다. 아빠는 동그라미 속에서 시계를 본다. 시계, 세상이 확 망해버린다 해도 죽지 않고 망하지도 않을 저놈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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