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없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제대 날짜가 몇 달 앞으로 당겨진 서상경이 후배들을 몰고 와서 삼만 원짜리 매운탕 한 냄비에 광어 한 마리 팔아준 게 전부였다. 어쩌면 오늘 영업은 그걸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어제, 그러니까 일요일 날 잔뜩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싸우다가 기어코는 울면서 달래면서 돌아간 사람들은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음 일요일을 기다리며 어제의 흘러간 기분을 추억하며 떠들어댈까? 아무튼 월요일은 재미없고, 어른스럽게 말하자면 권태로운 날이다.
엄마는 "아유 몸이 텁텁해 죽겠네," 하면서 목욕을 갔다. 일하는 아줌마는 "딱 오천 원만 잃어주고 올게," 하면서 번영회 사무실 고스톱 판으로 달려갔다. 보나마나 아줌마는 누나의 흉을 보고 있을 것이다.
"글쎄 고 야물고 발칙한 지지배가 요새는 말이에요."
엄마는 아마 텁텁한 몸을 비누로 벗겨 내면서 하느님은 왜 일 년 삼백육십 오일을 죄다 일요일로 정할 생각을 못했을까,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그 목욕탕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언제인가 장사장이 아주 좋은 곳이라고 소개한 바로 그곳에서 값싸고 질 좋은 샴푸로 거품을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품이 사라지면 머리에 무스를 할 것이다. 맨 처음 누나가 무스를 했을 때 엄마는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었다.
"그렇게 허비할 돈 있거든 어미한테 영양제라도 한 통 권해봐라."
그날 저녁에 엄마는 장사장이 권하는 막걸리를 마셨다. 장사장이 특별히 주문해 왔다고 하는 홍어회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엄마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청승이 빗물처럼 흐르는 영암아리랑이었다. 곡은 영암아리랑이었지만 가사는 엄마의 창작이었다.
"가려거든 그냥이나 갈 일이지 어쩌자고 빚은 이렇게도 산처럼 남겨 놓았수…꺼으윽…이봐요, 장사장님, 이자를 꼭 그렇게 챙겨야만 되겠습니까."
머리에 무스를 시작하면서 엄마는 영암아리랑을 부르지 않았다. 누나는 언제부터인지 머리에 무스를 하지 않았다. 엄마의 꾸지람이 무서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월요일은 엄마의 몸이 텁텁해지는 날이다. 그리고 오후 네 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이것저것 참견하고 아는 체를 해대는 장사장의 공휴일이다.
엄마는 지금쯤 거울 앞에서 샴푸로 촉촉하게 부드러워진 머리를 탈탈 털며 나 많이 늙었지요, 하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누군가가, 엄마의 옆이나 혹은 뒤에 서 있던 그 누군가가 엄마의 귀에 대고 아냐, 아냐, 오히려 갈수록 젊어지는걸, 하고 따뜻하게 말해주며 앞머리를 빳빳하게 무스로 세워놓을 것이다. 장사장한테 빌린 돈으로 팔 톤짜리 선주 겸 선장이 되었던 아버지가 바다에서 주검으로 돌아오신 뒤로 엄마는 아닌 게 아니라 불쌍하리만치 늙었었다.
할아버지는 갯벌 쪽으로 푹신한 소파를 돌려놓고 앉아 태사아안이, 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낡은 뱃고동소리 같은 이상한 노래를 끝없이 흥얼거리고 있었다. 바다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한없이 달려가다가 길을 못 찾고 되돌아오는 듯한 할아버지의 그 음성이 나를 지루하게 했다. 할아버지와 누나는 그렇듯이 닮은 데가 많았다.
“여기, 이런, 그래, 이런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는 거야”
누나는 두 뼘이나 되는 회칼을 반 뼘짜리 금강석표 숫돌에 천천히 스윽슥 문질러대면서 눈을 반짝였다. 저런 바보 같은, 이 세상이 아니면 저 세상밖에 더 있어. 저 세상은 죽어서나 가는 곳이지 뭐. 나는 발뿌리로 수족관을 걷어차며 누나의 회칼을 빼앗았다. 해삼 한 마리가 순식간에 둘로 갈라졌다.
“건식아아!”
“왜 불러.”
“그러지 마아.”
“하건 말건 내 맘이야.”
누나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동강난 해삼 한쪽을 수족관 속에 풍덩 빠뜨렸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광어와 가자미들이 꿈틀거리고 놀래미들이 펄쩍 튀어 올랐다. 누나는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뭐라고 우는 소리를 질렀다. 쳇, 저는 광어를 산채로 껍질까지 벗기는 주제에 나더러는 해삼 한 마리도 건들지 말라고? 웃기지 마라.
누나가 미쳤다는 사실쯤은 이제 동네가 다 안다. 나는 동네 사람들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았다. 미친이라는 단어를 맨 처음 입에 올린 사람은 서상경이었다.
“어야 처남, 너네 누나가 암만해도 미친 것 같다?”
서상경은 누나를 자신의 색시로 점찍어놓고 있었다. 엄마는 잘해 보라고 후원을 했고, 할아버지는 반대도 찬성도 없이 모르는 체했다. 무엇보다 누나 자신이 때로는 수줍어하고 때로는 깔깔대며 촉촉한 혀를 있는 대로 쏙 내밀어서 메롱, 소리를 내는 등 서상경과 어울리는 시간을 좋아라고 했었다. 서상경의 얘기면 무조건 재미있어 하는 누나에게 서상경은 이따금 자신의 사격솜씨를 자랑하곤 했다.
사격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상품으로 받았다는 권총 모양의 메달을 누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것은 도금으로 속을 감춘 것이 아닌 진짜 금메달이었다. 비스듬히 쳐다보면 무슨 열쇠처럼 생겼고, 똑바로 바라보면 권총 모양으로 보이는 그 금목걸이를 받아 들고 누나는 그때 "아유 어쩌면 이렇게도 탄탄하고 귀여울까," 하면서 웃음을 배시시 깨물다가는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서상경을 외면했다. 그러나 금세 얼굴을 펴고 서상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던 누나가 언제부터인지, 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처럼 세상사 부질없다는 투로 웃음을 잃고 풀이 죽어갔다. 서상경이 어디서 재미있는 얘기를 주어와도 전혀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모르는 체했고, 심지어는 그런 얘기를 입에 담고 다니는 서상경이 경멸스러워 죽겠다는 듯 그 커다란 눈에 흰자위를 가득 담고 노려보기까지 했다.
누나는 아마 서상경에게 자신의 브래지어 호크를 최소한 두 번은 끌러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서상경이 강제로 끌렀거나. 어느 쪽이건 누나도 그게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상경은 제대하면 대학을 마치고 장차 무역회사의 사장님이 된다고 했었다. 나는 서상경의 처남이 된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나가 왜 저 모양이 되고 말았는가? 아무리 여자는 믿을 게 못 된다지만 누나 도대체 왜 그래? 하고 내가 따지고 덤빌라치면 그때마다 누나는 자신의 그것을 시인의 마음이라고 우겼다.
“시인은 어제를 바라보며 내일을 터득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제부턴 시를 배워봐.”
그러면서 누나는 금목걸이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자기는 이제 서상경과 마주 서기도 싫다는 듯 그것을 나더러 서상경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서상경 역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라고 하는 그 빌어먹을 괴물이 언제부터 누나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하기야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못생긴 사내가 언제부터 우리 금나라 횟집을 드나들며 어떻게 정신을 흔들어놓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사내는 머리통이 엄청 크고 흰머리가 절반인 긴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있었다. 나는 맨 처음 그 사내를 발견했을 때 가분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서상경이 어느 날 도깨비의 사생아라는 별명을 새로 지었다.
듣고 보니 가분수보다는 도깨비의 사생아가 훨씬 어울리는 것 같았다. 도깨비의 사생아는 엄격히 말해서 손님도 아니었다. 우리 금나라 횟집에서 가장 값싼 삶은 오징어 한 마리를 시켜놓고 두세 시간씩 탁자를 차지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그가 우리의 매상에 도움을 주었다고는 단연코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도깨비의 사생아를 발견한 것은 물론 누나의 수상쩍은 행동 때문이었다.
우리 금나라 횟집은 분업화가 제법 잘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님들이 돌아간 뒤의 탁자를 치우는 등 실내 청소가 전문이었고, 나는 할아버지가 치워놓은 깨끗한 자리를 골라 손님을 안내하고 술병이라든가 먹을 것들로 다시금 어질러놓는 게 전문이었다.
엄마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먹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돈을 정확히 받아내는 계산 전문가였고, 아줌마는 매운탕 끓이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리고 누나는 칼 한 자루로 펄펄 뛰는 생선을 무수히 난도질해 내는 역시 그 방면으로 전문가였다.
불거진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생선의 껍질을 순식간에 벗겨내고 내장을 훑어낸 다음 살코기를 보기 좋고 먹기도 좋게 삭삭삭 발라내는 누나의 칼질은 정말이지 봐줄 만했다. 누나의 그 뛰어난 칼질은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엄마가 누나에게 배워야 할 입장이었다. 그래서인지 누나에게는 자존심 비슷한 게 있었고, 손님이 들거나 말거나 여간해서 인사를 하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홀에서 주문을 받는다거나 시중을 들어주는 일은 더욱이나 없었다.
공휴일 같은 날 손님이 떼로 몰려와서 할아버지와 내가 정신없이 바쁠 때, 엄마나 아줌마는 더러더러 짬을 내어 우리의 일손을 돕기도 하지만 누나는 절대 그러는 법이 없었다. 얄밉게도 자기 맡은 일만 후딱 해 치우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홀 안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서 있기 일쑤였다.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누나가 어느 날인가, 거짓말처럼 새하얀 사발 가득 홍합 삶은 것을 담아 들고 총총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 외따로 앉아있는 웬 사내 앞으로 가더니 "우리 집의 서비스에요," 하면서 탁자 위에 얌전히 올려놓는 것이었다.
서비스라니. 싸구려 오징어 한 마리에 비싼 홍합 한 사발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제도가 우리 금나라 횟집에 있었던가? 단연코 그런 전례는 없었다. 그것은 수학 공식으로 말하자면 플러스 마이너스 니콜 제로가 되는 장사였다.
그런 어이없는 서비스가 한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엄마도 아마 몰랐을 것이고, 알아도 모르는 체 넘어가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깨비의 사생아는 사흘이 멀다고 찾아와서 누나의 일방적인 홍합 서비스를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그냥 먹어 치웠다. 엄마는 마침내 누나를 불러 경고를 주었다.
“지집애가 뭐 할 일이 없어서 그딴 거렁뱅이 같은 사내한테 꼬리를 치냐,너 미쳤어? 미쳐도 이쁘게 미쳐야지.”
하지만 누나의 미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도깨비의 사생아는 변함없이 찾아와서 삶은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를 주문했고, 누나는 어김없이 따끈한 홍합을 서비스했다.
도깨비의 사생아는 대개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는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서 아마 시라는 것을 끼적이는 것 같았다. 누나는 자주자주 일손을 멈추고 외따로 앉아 있는 그 사내에게 그야말로 미친 여자처럼 혼자 일방적인 미소를 보내곤 했다.
“너어? 계속 그러면 죽는 수가 있어.”
엄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면서 이차 경고와 함께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차 경고가 있은 지 며칠 뒤에는 삼차 경고, 삼차 경고와 함께 엄마는 기어이 누나의 손에서 회칼을 빼앗아 들고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엄마의 그런 위협은 할아버지의 엉뚱한 참견 때문에 별다른 실익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게지, 에미야말로 웬 쓸데없는 참견이냐.”
엄마의 일이라면 좀체 아는 체를 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그 한 마디는 엄마의 기세를 팍 꺾어놓았다. 엄마가 그처럼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아마 장사장 문제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엄마는 그런 점에서 약간은 물렀다. 나는 장사장이 나의 새아버지가 돼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엄마는 바보처럼 자꾸 숨기려고만 하고 있었다. 장사장은 어선도 세 척이나 갖고 있었고, 홀아비인데다 우리한테서 매달 집세라든가 이잣돈을 받아가는 어쨌든 사장이니까 새아버지로 들어온다 해서 손해될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서상경만 우습게 되고 말았다. 엄마의 입장이 그렇게 되고 보니 서상경을 응원해 줄 사람은 이제 나 한 사람뿐이었다. 서상경은 시인이라는 게 얼마나 가난스럽고 위험한 종자인가에 대해 열심히 입을 놀렸다. 서상경의 선전이 아니더라도 나는 시인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중3 때 담임을 맡았던 시인 선생님의 피로 얼룩진 초라한 말로를 내가 어떻게 잊어먹을 수 있겠는가.
선생님은 시험을 치른 다음 날이면 가끔씩 수업을 작파하고 아이들을 몰아 산골짜기로 들어간다든가 자줏빛 나문재가 끝도 없이 펼쳐진 갯벌로 여중생들을 불러 집단미팅을 시켜주는 등으로 해서 아이들한테 인기가 꽤 좋았었다. 그렇지만 학부모들이나 다른 선생님들은 선생님의 그런 수업 방식을 몹시 못마땅해 했고, 선생님은 어느 날인가 기어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쫓겨난 뒤로 선생님은 <내가 죄인인가 당신들이 죄인인가>라고 켄트지에 빨간 매직으로 큼직하게 써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아침마다 스스로 벌을 받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 있는 선생님을 모르는 체하고 후딱 교실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용기 있는 아이들은 더러 선생님 앞으로 나아가서 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모르는 체하고 달아나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걸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아니다. 우리는 사실상 교장선생님한테 달려가서 멱살을 잡든지 어쩌든지 하여튼 당당하게 따지지 못하고 그처럼 바보가 되어 있는 선생님에게서 어떤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던 선생님이 어쩌면 저렇게도 형편없이 망가져 버릴 수 있단 말이냐.
그런데 선생님은 망가지는 선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우리들의 배신감을 확실하게 굳혀놓기라도 하듯이, 선생님은 어느 날 술을 마시고 기차와 대결한다고 큰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기차에 치어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짝궁 영만이는 운 좋게도 현장 가까이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분위기를 비교적 상세히 동냥할 수 있었다. 영만이의 얘기에 따르면 선생님은 그날 왼손으로 수첩과 만년필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소주병을 든 채 비틀거리면서 철로 변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잠깐 한눈을 하는 사이에 기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깜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뭐가 언제 어떻게 잘못 된 것인지 선생님은 이미 철로 한가운데에 흩어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너의 힘이 센가 나의 힘이 센가 물어보자 저 흔들리는 갈대를 붙잡고> 그날 선생님의 수첩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영만이는 그날 나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는 갑자기 질질 짜면서 "우리 쇠주나 한 잔 할까?" 하고 마치 직장에서 쫓겨난 어른처럼 말했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다. 단 것도 같고 쓴 것도 같고 무슨 맛인지 애매했다. 맛도 모르는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 우리는 그날 세상을 잊어 버렸다. 그 바람에 우리는 열흘이 넘도록 가슴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불량학생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고, 영만이는 자기 아버지한테 죽도록 얻어맞았다. 학교에서는 정학처분을 내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날 저녁 세상을 잊은 채 학교로 달려가서 유리창을 서른 장이나 박살내고 교장실 문짝을 망가뜨려 놓은 다음 그 자리에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난동을 부린 기억이 전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서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의 죽음을 놓고 사람들은 한동안 말들이 많았다.
“그 사람 알고 보니 무슨 교조주의라나 뭐라나를 했다더구마안.”
“얘기를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원. 교조주의가 아니라 전교조였어, 전교조라고 그 왜 선생들 데모하는 거 있잖아.”
“전교조나 교조주의나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게 그거지 뭐.”
어른들의 그런 입담과는 달리 영만이는 선생님을 자유주의자라는 꽤나 고상하고 어려운 표현으로 두둔했다.
“선생님은 아주 순수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신 분이셨어.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들한테 그런 사상을 심어주려고 애를 쓰셨던 거야. 그런데 우리가 선생님의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만 배신감을 느끼셨던 거야”
세상에, 어른이 아이들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죽음을 생각했다니. 나는 물론 영만이의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헷갈렸다. 헷갈리고 알 수 없는 무서움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어쨌든 선생님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시인이라는 사람은 본디 그렇게 무서운 종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랑할 때는 한없이 명랑하고, 허약할 때는 또 어처구니없게 허약하고, 허약하면서도 엄청난 사건을 일으켜서 사람의 심장을 졸아들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는 그런 시인이라는 종자와 함께 하는 미래를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믿지 못할 종자를 매형으로 모셔야 하는 불행 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아아 누나를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받아야 한다. 나는 서상경이 비번이거나 혹은 몰래 초소를 빠져나올 때마다 그와 마주앉아 누나의 문제를 의논했다. 서상경은 시인이라는 족속들이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어떻게 헝클어트리고 짓밟아놓는가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설명을 했다.
얌전한 처녀 가슴팍에 구멍 뚫어 바람 들어가게 만들기, 착실하게 돈 잘 버는 장사꾼 마음에 술을 먹여 금고 엎어놓게 만들기, 영리하고 순진한 학생 머릿속에 이상한 불씨를 집어넣어 유리창 깨트리고 데모하게 만들기 등등 서상경의 판단에 따르자면 시인이라는 것은 놀부의 마음에다 사기꾼의 행동력까지 갖춘 아주 질이 나쁜 잡초였다. 옳은 말이었다. 부지런히 일을 해도 돈이 벌릴까 말까 노상 위태로운 세상에서 어찌 그렇게 삶은 오징어나 시켜놓고 앉아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탕진한단 말이냐.
“그런 자들은 이 사회에서 영원히 씨를 말려야는 건데 말야. 쓰발, 눈 딱 감고 에므식스틴 한 정 꺼내다가 바방 갈겨 버릴까?”
“에이 형, 그건 살인이잖어”
“문제는 그거야. 현행법상 살인이 된다는 거. 나는 전과자까지는 되고 싶지 않은데, 어이 씨.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형법은 아주 잘못 됐어”
서상경은 자줏빛 나문재가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갯벌로 돌멩이 하나를 힘껏 내어 던졌다. 콩알 만한 게들이 구멍을 찾아 뽀르르 기어가는 모습이 멀리로 보였다. 빛을 잃고 서서히 스러져가는 붉은 태양이 자줏빛 갯벌을 맑은 선혈처럼 빨갛게, 그러면서도 어딘지 무슨 죽음의 소식처럼 어둡게 느껴지는 무거운 볕을 하염없이 쏟아 붓고 있었다. 나는 조록싸리 하나를 꺾어 들고 그것을 잘게 분질렀다.
“이러면 어떨까. 형이 형네 자가용으로 우리 누나를 납치하면, 응?”
“짜샤, 그건 구식이야. 요새 여자들이 납치한다고 말을 듣는 줄 아니. 심리학적으로도 그건 좋은 방법이 못 돼.”
“그럼 뭐야.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궁리하는 거 아냐, 인마. 차라리 그 새끼를 납치해 버릴까.”
“도깨비의 사생아를? 그 인간을 뭐에 쓰게?”
“족치는 거지. 그 여자는 내 색시니까 넌 꺼지라고.”
“그렇지만 그 인간은 우리 누나한테 뭘 선물하지도 않았고,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리고 시인은 독종이라 때리면 때릴수록 강해진단 말야. 그건 내가 알아.”
“맞아, 그건 그래. 네가 아주 잘 지적해 줬어. 야아, 이거 어디 산뜻하고 혁명적인 대책이 뭐 없나?”
그랬다. 우리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도깨비의 사생아는 우리에게 그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차라리 누나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활동을 벌인다든가, 아니면 최소한 그 비슷한 수작이라도 건네고 있었다면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마도 불행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도깨비의 사생아는 누나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이따금 누나의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기는 눈치이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횟수도 그리 빈번하지는 않았다. 더욱이나 그는 나갈 때도 거의 말이 없이 출입문을 나서고는 했다. 수고하시라는 말 한 마디 인사도 없었다. 내가 만일 어떤 여자에게 홍합을 서비스 받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 여자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나갈 때는 수고하시라는 인사도 건성으로가 아니라 각별히 신경을 써서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도깨비의 사생아는 통 그런 인사성이 없었다. 반면에 누나의 인사성은 참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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