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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세상 끝에서 세상을 만나다(1)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밤새 기차에 흔들리고 아침에는 또 버스에 흔들렸다. 그러고도 흙 속에 자갈이 들어박혀 뾰족뾰족한 개천길을 따라 한참이나 걸었건만 바다처럼 생긴 것은 보이지 않는다. 끝도 없이 누렇게 펼쳐진 갈대 숲을 지나면, 그러면 겨우 바다를 만날 수 있다는 느티나무집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젊은 엄마는 배가 고프다는 처음 생각은 잊어버리고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줌마, 여기 만세주도 팔아요? 술 이름이 만세주라고…….”

느티나무 집에서는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갈대 숲이 한눈에 보인다. 보기에는 사람 한 명 끼여들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고 평평해서 아득하건만 그 안에도 길은 있나보다. 무성한 갈대들 속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꽃상여를 실은 트럭이 북소리를 사방으로 뿌리며 느릿느릿 움직인다. 북소리가 마치 살아서 나른나른 춤을 추는 것 같다. 공기 속을 파고드는 민들레홀씨처럼, 둥 둥 둥 단조롭게 울리는 북소리에 화려한 색깔이라도 입혀주듯 새들이 잇따라 날아오른다. 날아오른 새들은 그러나 멀리 달아나 버리지는 않고, 트럭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기를 되풀이한다. 북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올랐다기보다는 이제 새들이 북소리와 꽃상여를 산 쪽으로 인도해 가는 것만 같다.

 

엄마, 엄마, 뭐야, 저게 뭐야?”

머리에 묶은 하얀 방울을 촐랑거리며 한달음에 달려오는 어린 딸은 마냥 신기한 모양이다. 사실은 젊은 엄마 자신도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 줄을 몰랐다. 느티나무집 주인 아주머니의 혼자 궁시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듣고서야 그것이 죽은 이의 영혼을 잠들게 하는 꽃상여라는 것을 알았다. 죽은 이가 어떤 섬의 촌장이었고, 풍장굿인가 하는 단체의 단장이었던 까닭으로 북소리를 울려준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풍장굿이 무엇이고 왜 북소리를 날아다니는 민들레홀씨처럼 그렇게 뿌려주는 것인가는 이해하지 못했다. 배를 타고 섬을 나와서 다시 트럭을 타고, 트럭을 내려서는 또 사람들의 어깨를 빌려 산을 오르게 된다는 그 죽은 이의 가는 길이 너무도 복잡하고 멀다는 아득함 때문에 모르는 것은 일단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배우는 것이란다. 한꺼번에 다 배울 수는 없는 거야. 세상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여러 가지 말들 가운데 하나를 그녀는 어린 딸에게 들려주기로 한다.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말속에는 느티나무도 있었고 갈대도 있었다. 말로만 알고 있던 느티나무를 그녀는 방금 전에 보았고 그리고 갈대도 보았다. 아 저게 말로만 듣던 그 갈대라는 것이로구나, 다소는 감격해서 술 한 잔을 따라 마시고, 바다는 어떻게 생겼을까, 잡지며 달력 같은 데서 사진으로나 보았던 바다를 막연히 상상하고 있던 그녀에게 홀연히 나타난 꽃상여의 행렬은 죽음이라기보다 오랜 꿈속에서 이제 막 깨어난 거대하고 화사한 꽃의 얼굴로 다가왔다.

 

이사가는 거야. 어떤 아저씨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사가는 거야.”

우리도 이사가는 건데, 그치 엄마.”

머리에서 탱글탱글 흔들리는 하얀 방울 같다. 어린 딸의 목소리와 그 눈빛은, 너무도 투명하고 초롱초롱해서 만지면 이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엄, 우리도 가는 거지. 그러니까 어서 밥 먹자.”

밥은 싫어, 나도 술 먹을래.”

아 참 그렇구나. 우리 혜미에게 술 권하는 걸 잊어버렸네. , 한잔 하고, 안주도 먹고, 많이 먹어야 해.”

싫다, 안주는 안 먹을 거다.”

먹어야 해. 배가 고프면 안 돼.”

그래도 싫어, 나 배고프고 싶어.”

배가 고프면 이사도 못 가는 거야.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는데 그래도 싫어?”

얼마나 많이? 하늘만큼 땅만큼? 너무 멀다 엄마. 힘들다. 이사가 어디야? 왜 아직도 우리는 이사 못 온 거야?”

으응, 그건 말야. 여기서 저기로 가는 거야. 여기가 마음에 안 드니까 저기로 가는 거야. 여기 세상이 아닌 저기 세상으로 가는 거야. 힘들지 않은 세상을 찾아서 사람들은 그렇게 이사를 가는 거야. 그래서 먼 거야. 멀고 또 멀고, 너무 멀어서 배가 고프면 못 가는 거야, 알았지?”

거기 가면 아빠도 만나는 거지?”

아빠? 아빠, 그러엄, 우리 혜미 언제 오나, 그렇게 기다리고 계실 걸. , 그러니까 우리 혜미 배고프지 않게 많이 먹어야지. 술도 한잔 더 할까?”

.”

 

갈대 속의 꽃상여는 움직이는데도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다. 둥 둥 둥 단조롭게 울리는 북소리조차도 이제는 한 장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커다란 화판에 꽃상여와 트럭과 그리고 북소리를 정교하게 그려서 펄럭거리는 만장들과 함께 가을의 햇볕 속에 가만히 널어놓은 것만 같다.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보며 졸음처럼 눈을 가늘게 늘어뜨리고 있던 주인 아주머니가 어느 순간 고개를 홱 돌리더니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녀는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내던 중에 탁 걸고넘어지는 무엇인가, 돌멩이 같은 것에 발뿌리를 채이고 허방을 디뎌버린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린다. 처음에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히고, 나중에는 기가 막히고 말문도 막혀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만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지금, 너희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어디서 남의 귀한 딸을 훔쳐다가 이런 못된 장난질이야 이게 응?

기가 막히기는 젊은 엄마도 주인 아주머니에 못지 않다. 숫제 머리끄덩이라도 잡아서 흔들어댈 듯이 무섭게 노려보며 달려드는 주인 아주머니의 서슬에 놀란 그녀는 턱을 덜덜 떨며 어깨를 움츠린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안간힘을 다해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훔친 거 아니에요. 제 딸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훔치겠어요. 정말이에요. 제가 낳은 제 딸이에요.

 

딸 같은 소리 한다. 네 나이가 몇이나 됐다고 이런 딸이 있단 말야. 아직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것이. 어디 주민등록증 좀 보자. 내놔봐, 내놔보라니까.”

근데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왜냐고? 하아, 저런 콩알만한 것에게 술을 먹이고서도 왜냐고?”

아니에요. 우리 혜미는 술 잘 먹어요. 태어날 때부터 먹었는걸요. 그런데 그게 어때서, 왜 이러세요?”

이런 원, 세상에 이런, 군소리 말고 내놔봐, 주민등록 내놔봐.”

저기, 그건 없는데요.”

없다? 없어? 그러면 그렇지. 너 이리 나와, 파출소 가자.”

억세다. 칼질을 많이 해서일까. 금방이라도 어디를 갈기갈기 찢어서 던져버릴 것만 같은 주인 아주머니의 억센 손아귀에 팔목을 잡히는 순간 젊은 엄마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처음부터 무슨 대항을 목적으로 일어섰던 것도 아니었다. 놀라서 일어섰다가, 놀라서 앉아버린 것일 뿐이다. 젊은 엄마가 그렇게 포기해버리자 이번에는 어린 딸이 주인 아주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찢어낼 듯이 매달린다.

 

우리 엄마 때리지 말아요. 우리 엄마는요. 스물한 살이나 먹었어요. 나는 다섯 살밖에 안 먹었는데요. 우리 엄마는요. 때리지 말란 말이에요.”

요 콩알만한 것이, 이거 놔, 안 놔, 이거 놓지 못해.”

콩알만 안 해요. 나는 혜미에요. 아줌마는 내 이름도 모르면서 뭘, 우리 엄마는 혜미 이름도 알고 다 알아요. 아줌마는 바보, 우리 엄마 때리지 말란 말이에요.”

잘 벼려진 칼날 같다. 독이 오른 고양이 같기도 하다. 허벅지건 어디건 닥치는 대로 쥐어뜯고 물어서 찢어놓을 것만 같은 어린 계집아이의 날카로운 쇳소리에 주인 아주머니는 놀라서 뒤로 물러선다. 정말이지 콩알만한 어린것이다. 이 어린것의 어디에서 이런 살인적인 이빨이 튀어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당혹스러움과 두려움과, 까닭을 알 수 없는 미안스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는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뜯어보다가, 그러다가 기어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만다. 이 애가 정말로 저 애의 딸인가보네, 아이고야 세상 참 기막히기도 하지.

괜찮아, 괜찮아.”

 

젊은 엄마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빗으로 빗겨주며 주인 아주머니를 노려본다. 술이 사람에게 좋은 이유는 한 가지나 혹은 두 가지만 열성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점이란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가끔 말해주곤 했다. 눈앞에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고,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한두 가지 것만 열심히 보게 하는 힘이 술에는 있는 거라고, 그래서 잊어버려야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 툭하면 술집을 찾는 거니까 나쁜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 아줌마는 술장사를 하면서도 아직 그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아줌마 참 이상하네요. 사람이 술을 먹는 까닭도 모르면서 술장사를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한 마디 툭 쏘아주고, 그리고 밖으로 홱 나가버리고 싶지만, 그러나 참기로 한다. 낯선 곳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죽는 순간까지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세상의 가르침을 그녀는 오래 전 가랑이를 파고든 생채기의 흔적처럼 간직하고 있다.

트럭을 탄 꽃상여는 이제 갈대 숲을 다 벗어났다. 새들은 더 이상 날아오르지 않는다. 붉고 푸르고 하얗고 노란색의 만장들은 여전히 펄럭거린다. 날카로운 가을 햇살을 한껏 머금은 그것은 깊은 밤 도시의 네온사인처럼 화려하고 현란하기조차 하다. 논두렁과 밭두렁 그리고 산비탈로 이어지는 산 그림자 속에 그림처럼 서 있는 트럭에서 사람들이 잇따라 뛰어내리고, 둥 둥 둥 아스라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의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꽃상여가 내려진다.

 

, 저거 이동통신이다, 그치 엄마?”

바라보면 논두렁을 지나고 밭두렁을 거슬러 올라, 곧바로 이어지는 산비탈의 꼭대기에 서 있는 거대한 간판을 손짓해 보이며 어린 딸이 깡총거린다. 서울에서나 대구에서나, 광주에서나 대전에서나, 바다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디에서나 보아온 익숙한 간판인 까닭으로 멀리서도 금방 읽어낼 수 있나보다. 세상은 그렇게도 소리없이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안 배우겠다고 버티지도 않았지만, 배우겠다고 나서본 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동적으로, 공기처럼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와서 너는 나를 알고 있지, 알고 있잖아, 끊임없이 속삭이며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흔들어 어지럼증을 앓게 하는 아지랑이처럼, 털스웨터에 엉겨붙은 보푸라기처럼 가끔은 거추장럽기도 한 그것들을 털어 버리는 방법으로는 술이 제일이다, 하는 가르침을 준 것도 세상이다. 제가 낳고 제가 죽이는 게 결국은 세상의 이치라는 것까지도, 젊은 엄마는 알고 있다.

엄마 나 술 취했어, 자고 싶어.”

업히고 싶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데도 어린 딸은 익숙해졌다. 길에서 아침의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길에서 저녁을 보내며 길에서 나이를 먹어온 어린 딸은 오래 전에 이미 시인이 되어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 깊은 곳의 한 점 티끌을 건져다가 모란꽃을 피우고, 나비가 날아들게 하고, 그것을 금방 죽은 원숭이의 해골로 만들어놓고 이게 왜 이렇게 되었지? 뜻밖이라는 듯 의아해하면서 싱긋이 웃는 요술쟁이가 바로 시인인 것이라고 어떤 남자는 말했다.

 

어떤 남자, 하고 중얼거리다보면 그 어감이 좋아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빙긋이 웃고는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누구지, 하는 의문이 생기면 그녀는 또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게 된다. 그러니까 그 어떤 남자는 다만 어떤 남자로만 있어야 한다. 천원짜리 지폐에 가려진 얼굴이어도 좋고, 십만원짜리 자기앞수표의 얼굴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도 좋다. 어떤 것도 다 좋지만, 누구냐, 하는 의문에 끝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떠올라오는 하나의 뚜렷한 얼굴만은 그러나 안 된다.

슬프다. 너를 보면 바다에 떨어진 별이 우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얼굴이 필요치 않은 남자의 목소리를 그녀는 오랫동안 간직해왔다. 들고 다니는 핸드백 속의 빨간 립스틱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흘러내리는 브래지어 같기도 했다. 거울 앞에서 한참씩 그 말을 음미해 볼 때, 그럴 때 그것은 정말이지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말이라기보다 손으로 만져지는 하나의 물건 같았다.

너는 바다 같구나. 어린것이 너무 깊고, 너무 너르구나.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왔다가 떠날 때는 바다를 얘기해주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디 먼 나라의 전설처럼 들리던 바다가 차츰 그녀에게 익숙해졌다. 바다, 바다, 하고 마치 입안에 사탕을 넣고 굴리듯이 중얼거릴 때 그녀는 자기 자신이 바다가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다가 무엇이지? 어느 날 그녀는 생각없이 얻어맞고 당혹스러워졌다. 바다가 마치 손에 잡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떠오르는 그림이 없었다. 목이 타는 듯이 말랐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바다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바다, 바다, 하고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다가 사라져갈 뿐이었다. 바다는 그녀 스스로 찾아 나서야만 한다는 것을, 그녀는 시간과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겨우 알아차렸다.

암튼 이쪽으로 계속 가다가 왼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오면 또 그쪽으로 가봐. 지금은 물이 빠지는 때라 조개를 잡는 사람도 있고, 뭐 금방 알 수 있지.”

 

무엇을 깜빡 잊어먹고 갔다가 되돌아오는 모양이다. 꽃상여가 실려간 방향에서 반대편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던 초로의 할아버지가 길을 묻는 사람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자신이 하는 말을 도로 주워담기라도 하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간다. 그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갈대잎에 옷깃 스치는 소리가 무슨 새의 부드러운 가슴털처럼 온 몸에 붙어 있다는 느낌인 채로 그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본다. 언제나 이렇다. 제아무리 사소한 인연이라도, 할아버지거나 아저씨거나, 옷깃을 스친 남자를 떠나보낼 때면 그녀는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져 버린다. 어디에 큰 불이라도 난 것처럼, 서둘러 옷을 입고 신발을 찾아 신고 허둥지둥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녀는 마치 자기가 남자의 등을 떠밀어서 억지로 보내버린 것처럼 미안함과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씩을 어쩔 줄 몰라하고 했다.

여자는 모진 데도 있어야 수월하건만 큰일이다. 생전의 어머니는 딸의 앞날을 손금보듯 알아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잔정만 그렇게도 많아서 어쩔까, 어쩔까……. 그녀는 그때 어머니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잔정이라면, 그 반대어로써의 큰정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해보았을 뿐이었다. 정도 커야 좋은 것일까. 잔정은 뭐고, 큰정은 또 뭐지? 느닷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을 쫓아갈 여유가 없었다. 연탄가스가 지독하게도 코를 찌르는 십이월의 산비탈이었다. 왕대포집 네 글자가 술 취한 조문객처럼 비뚜름하게 덜컹덜컹 흔들리는 바깥쪽 창문을 쳐다보며 어머니는 거대한 유산이라도 남기듯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미안하다,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낳아서 미안하다.

그것을 유언이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때 어머니가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연탄가스가 너무 지독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아무 소리나 그냥 해보는 거라고 여겼다. 열세 살이라는 나이의 무게가 너무 가벼웠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쉽게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는 전설 같은 믿음이 그녀에게는 심어져 있었다. 술꾼들에게 이년저년 욕먹고 얻어맞는 것을 취미로 알고 살아온 어머니가 울고 싶을 때면 눈물 대신 배시시 웃어가며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그런 전설들이 꾸역꾸역 나오곤 했다.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가 죽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새끼를 낳는 고양이처럼 갸르릉갸르릉 소리를 대던 어머니에게서 더 이상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어머니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선언한 사람은 다음날 아침 꿈자리가 영 의미심장해서 와봤다고 하는 이모부였다.

 

정말이다. 그놈의 꿈자리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절대로 나 여기 안 왔다, 그럼. 어머니에게 연탄집개로 사타구니께를 모질게 얻어맞고 개처럼 소리를 질러대며 뛰쳐나간 뒤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모부가 정확하게 때를 알고 나타난 것이 그녀는 우선 놀라웠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반가움이기도 하고, 두려움인가 하면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떨림이기도 했다. 한 번만, 한 번만, 하고 졸라대던 그녀의 열한 살 때와 별 다름이 없이 이모부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풍선처럼 신비하고 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조바심이 있었다. 꿈에서 말이다. 내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시가 말이다. 그 왜 옥희 너도 알지 않느냐. 그때 내가 너에게 조목조목 일러줬거늘 그새 잊어버렸단 말이냐? 이런, 이런, 그나저나 큰일났다, 무슨 돈으로 꽃상여를 만들어서 바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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