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아들 하나 딸 하나 아이들이 차례로 문을 나서고, 뒤를 이어 아빠가 나서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경로당 출근을 할 무렵이면 엄마는 컴퓨터를 켠다. 이 시간쯤이면 엄마는 대개 반라 상태가 되어 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스웨터를 벗어 던지고, 이 방 저 방 돌며 빨래거리를 집어다가 세탁기에 넣는 사이 어느새 치마도 벗겨져 반바지 차림이다.
“나 나간다.”
할아버지의 이 한 마디는 일종의 신호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한 마디 신호에는 민감하다. 마치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것처럼 엄마는 가뿐하게 팬티 차림으로 청소기를 집어 든다. 청소기를 돌릴 때는 리듬을 타야 한다. 리듬을 타지 못하면 청소는 곧 노동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노동이 아닌 놀이로서의 청소를 할 때 가슴에서 출렁거리는 젖무덤의 율동을 엄마는 특히 좋아한다. 그러므로 브래지어 따위는 순식간에 끈이 풀려 구석으로 처박힌다. 햇살이 야만적으로 창문을 뚫는다거나 보슬비가 추적거린다거나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날에는 팬티도 구석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다. 이런 날 몸에 무엇을 걸친다면 예의가 아니다. 처음 세상에 나올 때 그랬듯이, 엄마는 아주 익숙하게 뒤로 발랑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며 악, 악, 마음껏 원없이 소리를 질러본다. 사타구니의 치모가 꼬불꼬불 기형적으로 몸을 뒤틀어대며 부끄러워, 부끄러워 소리를 내는 듯하다. 컴퓨터에서는 발라드풍의 노래가 나온다. 엄마는 그 노래의 가사를 모른다. 가사는 모르지만 곡조는 몇 번 들어봐서 귀에 익었다. 엄마는 귀에 익은 곡조에 멋대로 가사를 붙여 흥얼거린다.
강도가 문을 따고 들어와서 나를 협박해주면 좋겠네, 좋겠네. 아아,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청소를 마치고 빨래를 탈탈 털어서 널고 나면 배가 고프다. 하지만 엄마는 참는다. 카페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남편 흉을 보고 아이들 걱정을 하고 시아버지 험담을 늘어놓은 뒤에서야 엄마는 고추장으로 빨갛게 밥을 비벼놓고 식탁에 앉아 너는 어쩌면 이렇게도 새빨간 것이냐 아이 먹고 싶어라, 어쩌고 중얼거리며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그리고는 어디 먼 데로 여행이라도 떠날 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한다. 스타킹도 새 것으로 꺼내 신고, 깔끔한 속옷을 입고, 겉옷도 정장 차림으로 골라서 입은 다음 거울 앞으로 간다.
“이런 나를, 누가 은행강도라고 짐작이나 해볼 수 있겠어, 응?”
그렇다. 엄마는 결코 은행강도 타입이 아니다. 배는 불뚝 나왔고, 허리는 한 아름이나 되고, 종아리는 못난이 무를 빼다 박았으며, 눈 꼬리는 힘없이 쳐진 데다 입술은 또 너무나 도톰하다. 세상에 이렇게도 제 멋대로식 몸매를 가진 은행강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거, 그러기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감을 갖고, 심호흡을 하고, 단정하게 마치 기도라도 하듯이 자리를 잡고 앉아 엄숙한 표정으로 메신저를 불러낸다.
안녕. 오늘도 안녕하시지?
권총 문제는 어떻게 돼 가는지 궁금해.
말했잖아. 우리나라에서 권총 구하기는 너무 어려워. 어려워서 비싸. 그 돈이면 차라리 풍족하게 며칠을 즐기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그러기에 총보다는 회칼이 훨씬 낫다고 하는 거지. 회칼은 무엇보다 팀웍이 중요해. 팀이 엉성하면 당연히 실패하겠지? 혼자서 나설 생각은 절대 하지 마.
물론이지. 난 사실 그런 용기도 없어. 혼자서 어떻게 은행 직원을 제압하고 그 많은 돈다발을 챙기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런데 우리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야? 회의는 치명적인 독이라고 누차에 걸쳐 설명을 했거늘. 그놈의 몹쓸 독부터 제거해야겠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확실한 목적을 정해놓도록. 강도를 해서 얻은 수입을 어디에 어떻게 쓰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만 되니까.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그 돈이야 까짓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돼버린단 말이거든. 그렇게 되면 일도 어려워져.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하는데 이 각오의 조건이 목표라는 걸 알아둬야 해.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각오 아니라 그 선생님이라도 말장난이기 십상이니까.
엄마는 돈의 목표를 생각해본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본다. 무엇으로 목표를 삼을 것이냐. 너무도 많다. 남들처럼 아들놈 과외도 시켜줘야 하고, 딸년은 과외도 과외지만 간판 바꿔주는 일이 급하고, 냉장고도 쌍문형으로 바꾸고 싶고, 벌써 몇 년째나 비실비실하는 남편 보약도 해주고 싶고, 여름에는 선풍기 대신 에어컨도 돌려보고 싶고, 어지간하면 시아버지를 재혼시켜 딴 살림을 내보내고 싶기도 하고, 남들처럼 아파트에 가서 한 번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등등 끝이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끝도 없이 늘어나는 돈 써야 할 곳 어디에도 엄마 자신에 관한 항목은 없다. 엄마는 그것이 억울하기보다는 뭐랄까, 신기하고 대견하고 기특해서 눈물이 나오려 한다.
그래, 바로 그것이야. 내 한 입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강도를 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거. 이게 중요해. 만에 하나라도 일이 실패했을 때, 그때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할 거란 말이거든. 그때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만일 성공했다면 내 한 몸 돌볼 여유도 없이 가난한 이웃을 먼저 구제했을 것이다, 하고 말이지. 생각해봐. 시청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감동을 하겠어. 집구석에 처박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줌마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동감을 표하지 않는 자 있을까? 없지. 아 그래, 저거야, 바로 저거야.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저렇게 진취적으로 용감하게, 과감하게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는 거야, 그게 사는 거야. 이러지 않겠어?
그래서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의 은행강도는 실패해도 성공한 것이 된다. 정말로 성공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 성공이기보다 실패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뭐냐. 우리의 은행강도 모의는 실패가 목적이란 말이냐. 엄마는 잠시 헛갈린다. 눈꺼풀이 저 혼자 바르르 떤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소리가 쌕쌕 이상한 음악소리를 낸다. 섹스가 생각날만한 시간도 아니련만 이게 뭐람. 엄마는 투덜거리다가 문득 그 한 단어에 생각이 미친다. 섹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것을 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바쁘고 고단하게 살아 왔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지? 아니다. 이런 맥 빠지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신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음모는 음모이기 때문에 은밀하고, 은밀해서 신이 난다.
가만,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권총. 권총은 구하기가 어렵다. 어려워서 비싸다. 회칼은 구하기도 쉽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 그런데 그 뺀질뺀질한 은행원들이 회칼 정도에 굴복할까. 안 하면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팀워크가 중요하다. 중요하다는 말이 다시 엄마를 긴장시킨다. 몸이 달아오르고, 침이 꼴깍 넘어간다. 엄마는 벌떡 일어서서 아까 정성을 다해 입었던 정장을 훌훌 벗어 버리고 주방으로 달려가 물을 마신다.
밖에서 대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아니다. 잠시 뒤에는 주먹으로 탕탕 두드릴 것이다. 엄마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저놈의 지지배는, 오늘따라 왜 저렇게 빨리도 기어들어오고 지랄이람, 어제도 엄마는 그랬다. 그제도 그랬고, 그 그제도 엄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면서 부랴부랴 컴퓨터를 끄고, 컴퓨터를 끈 뒤에는 느긋하게 천천히 일어서며 시계를 보고, 시계를 본 뒤에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기 시작한다.
“어머나 세상에, 시간이 벌써 이게 뭐람, 미쳤어, 내가 정말로 미쳤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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