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화려한 꽃들이 져버린 뒤에 이제야 내 차례가 되었다는 듯 푸른 이파리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곤궁한 여인의 바늘로 뜬 속옷 레이스를 보는 것처럼 까닭도 없이 무언가가 참을 수 없어지게 하는 황록색의 작은 꽃이 있다.
누구나 마음의 아득한 곳간에 함부로 발설하기 어려운 꽃그림 하나쯤은 그려두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저마다의 비밀이고 아무에게도 나누어줄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어서 무덤에까지 품고 가는 게 온당하겠지만 그러나 아우야, 누구든지 가령 내 뒤를 쫓아와서 허리띠를 움켜잡고 “당신의 마음 꽃은 무엇이지? 말해봐. 말해 보라니까” 하고 눈을 부릅뜬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아 그래요, 그래, 나의 그것은 대추 꽃이에요” 이렇게 자백해 버리고 눈을 감겠다.
눈을 감으면 대추 꽃이 보인다.
꽃 같지도 않은 황록색의 작은 꼿들이 온 세상 가득 휘얼렁거린다.
전시대에 혹시 대추 꽃을 노래한 웅숭깊은 시인이라도 있을까 싶어 도서관을 뒤져 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붉은 입술 하얀 치아에 모란 난초들만 눈에 밟히는 것은 분명 내 마음의 문이 닫혀졌다는 증거일 게다. 감옥이다.
마음에 감옥을 지어놓은 자는 세월과의 잔인한 입맞춤 행사에서 언제나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마련이라는 금세기 어떤 소설가의 진술은 새겨들을 만하다. 그가 제시한 나침반에 따를 것 같으면 나는 지금 스물한 살일 수도 있고 일곱이나 혹은 열한 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흔아홉 살인지도 모르겠다. 그야 어떻든, 대추꽃이 분분이 흩날리는 이 아지랑이 철에 내가 희망하는 내 나이는 열아홉이나 서른세 살이 적당하다.
대추 꽃이 무슨 시간의 개념을 무용하게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지는 않겠다. 이를테면 내가 세월의 흐름에서 한 발 비켜난 신선 같은 위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야, 일곱 살 소년과 마흔한 살 장년의 영혼을 마치 방금 잡은 돼지의 간을 주무르듯이 꺼내서 천평칭(天平秤)에 올려놓고 한 십년쯤 그 변화의 추이를 지켜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 그래,돼지. 볼품없이 짧은 다리 네 개가 둘씩 둘씩 묶여진 채로 바둥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수퇘지 한 마리가 떠오른다.
아우야, 언제인지 기억에도 아슴한 그 시절에 너는 눈물을 글썽이며 집나온 거위처럼 고개를 내두르고 있었다.
형님, 돼지는 왜 죽었는데도 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지요?
죽었기 때문이라구요?
그러면 산 돼지의 간에서는 김이 안 나오는 걸까요?
집안 어른 가운데 누군가의 회갑 때였던가. 아니면 누군가가 돌아가셨을 때였던가. 너는 아마도 방금 전까지 꽥꽥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던 돼지가 순식간에 해체되어 피빛의 돼지고기로 변해 버리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떡이다 술이다 들뜬 축제 분위기에는 관심도 없다는 양 우물가의 돼지털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꼬부랑 할아버지같은 어린 아우를 나는 그때 무슨 말로 일으켜 세웠던가. 그 대목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나는 단지 의혹으로 가득 찬 아우의 얼굴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의혹…….
그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띠처럼 두른 권총 주머니에 흰쥐를 넣고 다니시는 아버지가 항시 굳은 표정으로 나를 감시하던 그 시절에 너는 의혹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엉뚱한 집요함으로 간단없이 나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형님, 형님은 왜 형수님이랑 늘 같이 안 살고 어쩌다 한 번씩만 같이 사세요?
형님은 왜 아버지하고 마주 앉으면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눈을 감아 버리세요?
아버지는 왜 가슴에 흰쥐를 품고 다니시느냐고 형님은 왜 못 물어보세요?
형님,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경찰서 건물은 엄청 큰집이잖아요. 사람의 눈은 발가락보다도 더 작구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집이 이렇게 작은 눈 속으로 쏙 들어올 수가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큰 집이 이렇게 작은 눈 속으로 들어왔는데 저는 왜 아프지도 않지요? 제가 욕심쟁이라서 그럴까요? 아아 저는 욕심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이다음에 혁명가가 될 거예요…….
2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직업이라든가 살림살이라든가 마음의 쓰디쓴 연민 같은 것들을 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버린다는 게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고기나 떡을 버리기는 만만해도 여분의 금반지나 애인에의 추억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아우야, 몇몇 사려 깊고 용감한 회의주의자들은 아내라든가 남편을 기꺼이 버리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마음까지도 마치 접시의 물을 비우듯이 버려 버리고 있다는 풍문에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세계 내에 또 하나의 단단한 세계를 구축하고 들어앉아 보다 아늑한 사랑의 영원한 지름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숨겨진 전설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사랑이란 건 말입니다, 형님!”
아우야,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그때에 너는 말했었다.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모험인 한편으로…….”
그때에 너는 아직 젊다고 보기에도 무엇한 사춘기였지만 투지와 논리는 젊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젊었지만 초로의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했다.
“사랑은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혁명의 방식이어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아우의 사랑학 개론을 나는 그때 조용히 경청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그게 무엇이었던가. 아마 추억의 논리였을 것이다. 사랑이란 추억의 생채기에서 흘러나오는 분비물을 빨아먹으면서 떠나는 무한계의 여행이고 또 그래야만이 온당하다는 얘기로 아우의 논리를 반박했을 것이다.
어쩐지 낯익어 보이는 우수에 찬 눈매라든가 쓸쓸하게 웃을 때의 입술 모습, 딱히 어디가 어떻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어디선가 본 듯한 걸음걸이, 그런 애매한 느낌들이 사랑의 마음을 촉진시키고 그렇게 스스럼없이 일어난 사랑이야말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거라고 나는 한동안 정신없이 지껄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억은 혁명의 상대가 못 된다는 사실을 나는 차츰 깨달아야 했다. 혁명이란 본디 추억의 푸대자루를 까뒤집어서 그것을 불쏘시개로 함과 동시에 식량으로도 삼는 슈퍼맨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혁명은 혁명이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힘이 느껴지는 반면 추억은 어딘가 지리멸렬하고 힘이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다. 아우와의 논쟁에서 패배한 형은 출구없는 감옥을 짓고 들어앉았다. 그때에 집을 떠나는 남편을 아내는 붙잡지 않았다. 그때에 아내가 나를 붙잡았으면 나는 아마 내 불만의 직접 화법으로써 아내의 따귀를 올려붙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눈으로 말해요>따위 부드러움은 처음부터 그 설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심성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라는 은유의 화법이 우리 사이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가 나의 아내로 들어오던 그날에 우리의 은유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날개가 꺾여 있었다.
그런데 아우야, 인생이라는 신비로운 노정에서는 잃었던 것이 왕왕 다시 돌아오는 수도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상실이란 원래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실에서 오는 슬픔의 무게를 줄여볼 요량으로 우리는 마음에 감옥을 짓는다.
감옥에서 혼(魂)을 만나 혼의 도움으로 잃었던 것을 복원하고 태양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헛된 자기위안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아우야, 나는 이제 너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그 방법을 놓고 저울질을 해 보았다.
처음에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두루 탐험한 중년의 꼬장꼬장한 무직자를 생각했다. 말하자면 싸르트르의『구토』라든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같은 형식의 소설을 한 편 만들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 자신 철학에의 소양이 일천한 탓으로 사변적인 용어는 남의 손에 들린 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두번째로 생각한 사람은 거푸집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노동자였다. 거푸집전문 노동자로 하여금 거침없이 활달한 용어로 아우와 형 사이의 장벽을 해부하고 처방전을 내놓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또한 내가 노동자들의 어딘가 그 교활해 보이면서도 꾸밈이 없는 그런 질박한 용어를 몰랐다. 감옥은 견고했다.
애초에 출구를 고려하지 않았던 탓으로 빠져나가고 싶을 때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우야, 내가 너에게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일종의 몸부림쯤으로 이해하고 육화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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