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고 바람 치는 날 벌들을 보고 있자니 그 존재하는 방식이 참 기막히다.
지구상에서 허공을 나는 것들 중 날개가 가장 초라한 것을 찾자면 필경 벌이지 않을까 싶다.
나비는 날개가 몸통보다 최소한 두세 배는 된다. 잠자리의 날개는 나비보다 작지만 그래도 벌에 비하면 그 면적이 대단하다. 배짱이나 메뚜기 같은 종류는 몸통이 날개보다 훨씬 크기는 하지만 날개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 결코 그 면적이 가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벌들은, 이 녀석들의 날개는 도대체가 보면 볼수록 기막히다. 어찌 저것을 날개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보던 내가 그만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최장 4킬로미터까지 날아가서 꿀을 수집해 온다. 오다가 바람을 만나면 툭 떨어지고, 굵은 빗방울을 만나도 역시 툭 떨어진다. 날씨가 바로 좋아지면 집에까지 돌아오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아카시아 철이면 마음껏 욕심껏 몸에 가득 꿀을 실어 나른다. 게다가 적을 만나면 가미가제 특공대 식으로 침을 발사하고 저는 죽어 버린다. 지가 살려고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아닌 다른 무엇을, 어쩌면 동료를 살리기 위해 침을 발사하고 저는 죽어가는 것이다. 뭐냐 이거. 어쩌서 이런 어이없는 천형을 살게 되었단 말이냐 응?
비 오고 바람이 몰아치니 집 생각이 난다. 집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보니 쬠 웃기기는 한다. 집을 갖지 않는 삶이야말로 어쩌면 행복일 거라고 입에 거품을 물던 시절도 있었던 내가, 움막 하나 몇 년 손보았다고 집이니 뭐니 하고 있으니 왜 아니 웃기랴. 여하튼 뭐 웃기더라도 집은 집이다. 그 집의 안부가 오늘따라 무지 궁금하다. 연못에 수련은 피었을까. 떠나오기 전에 열심히 산란을 해댄 붕어와 잉어는 드디어 새끼가 나왔을까.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었을까. 도룡뇽은? 삼 년째 나랑 같이 살아온 두꺼비 세 마리는 금년에도 나왔을까. 마당에 잔디는 무지 많이 자라 버렸겠지? 아하, 창포, 노랑 창포는 지금쯤 피어나고 있겠지? 보라색 창포도 아마 입을 열기 시작했을 거야. 아 참 딸기, 딸기도 익어가고 있겠지? 뽕나무에 오디도 익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고, 채리는 이미 익어서 까치들이 다 먹어 버렸겠지. 고추랑 토마토랑 심어놓은 것들, 그것들은 이번 비에 무사할까. 아하, 이런 이런, 끝도 없구나. 끝도 없이 이어지는구나. 그러고 보니 그동안 참 많이도 일을 벌여놓았다. 석류 삽목해 놓은 것들은 지금쯤 뿌리를 내렸을까. 양귀비는 이미 아침마다 빠알갛게 사방을 장식하겠지. 복숭아도 곧 익어가겠다. 금년에는 드디어 모과꽃이 우수수 피었는데 그것도 열렸겠지. 아이고 정신 없어라. 그만 뚝,
그만 뚝 하고 전화기를 만지작거려 본다. 며칠 전 후배녀석이 집에 한 번 다녀와 본다고 했는데 다녀왔을거나? 빌어머글 놈이, 다녀왔으면 어떻더라고 저떻더라고 얘기를 좀 해주면 어디 뽀드락지가 나냐. 비러머글놈. 어쩌고 투덜대며 전화를 해보는데 안 받는다. 얼래, 네가 왜 내 전화를 씹는다냐? 아니지 참, 씹는 거야 아니겠지. 수영장이나 뭐 그런 데 가 있겠지. 그만 잊자고 애를 쓰며 다시 벌들을 들여다보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기가 몸부림을 친다.
“아 형님, 전화 하셨네요.”
“응 했다. 잘 사냐.”
물어볼 것이 엄청시리 많았는데 다 잊어 버렸다. 아니 하나도 생각이 안 나버린다. 엉뚱한 안부말이나 지껄이다가 끊을 즈음에야 퍼뜩 생각이 나서 마당에 꽃들 안녕하시더냐 어쩌고 한 마디 했던가 어쨌던가. 녀석의 입에서 연못에 수련이 피기 시작했고요 어쩌고 하는데 그만 내가 이유도 까닭도 없이 막막해져 버린다. 그리하여 속절없이 아 그랴, 알았다, 잘 살아라, 하고 그만 끊어버렸는데, 끊고 나니 내가 지금 이 무슨 짓이고? 싶어진다.
아카시아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적어도 한 달은 앓아누워야 할 것 같다. 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 하나만 가지고 뛰어든 일. 이렇게도 온 몸을 자근자근 조져대는 중노동인 줄은 꿈에서도 몰랐다. 억시게 뻑시게 온 몸을 요구하는 이 일을 그렇다고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고 끝까지 가보기는 가보겠는데 뒷날이 쪼매 겁스럽기도 하다. 내가 약해지고 있는 건가. 비겁해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니면, 보수화되어 가는 것인가? 보수라는 것이 꼭 무슨 괴물이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이 보수화되면 그 독선과 위선과 탐욕이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아서 두렵다는 거다.
그러지는 말자. 다 해도 그런 것은 하지 말자. 다 해도 그런 것만 하지 않도록 나를 좀 콱콱 물고 쏘아다오, 벌들아. 그리하여 오늘, 보수진영의 저 영웅적인 소년 이승복의 아포리즘을 흉내내어 보수가 싫어요, 하고 말이나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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