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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2/한번 더 한번만 더

진보는 왜 판판이 깨져 왔는가

노빠,

며칠 전 어느 후배에게서 들었던 이 두 글자가 내 머릿속을 장악한 채로 영 떠나지를 않는다. 탄핵정국이라는 어이없는 사태를 맞이하여 칼럼이랍시고 몇 꼭지 쓴 글을 놓고 내가 노빠라는 것이다.

 

 노무현 광신도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이 용어의 기원은, 과문한 까닭으로 정확하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지난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고자 고용된 이른바 한나라당 아르바이트 요원(?)들이 넷상에서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민주노동당 당원이자 진보논객으로 널리 알려진 진중권이 그대로 받아쓰기 하더니 민노당의 공식 용어가 되어 버렸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그래, 한나라당과 민노당은 어쩌면 통하는 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빠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나는 침묵을 해야 옳았던 것일까.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삼천 번을 되살아난다 해도 나는 내가 몸 담고 있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다.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아니다 싶은 일을 발견하면 그것이 비록 허섭스레기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발언을 해야 한다. 보고서도 못본 척, 관심없다는 투로 내용없는 사랑 얘기나 끄적거린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 자의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바꾸고 싶지는 않다.

  

 민주주의를 국가구성의 기본강령으로 채택한 이후 우리는 한 번도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극단적인 반민주주의를 죽어라고 반복 학습해 왔을 뿐이다. 이번의 대통령 탄핵 사태는 반민주주의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탄핵을 발의한 민주당은 굳이 이번의 사태가 아니더라도 역사의 발전법칙상 김대중씨의 퇴진과 더불어 소멸되어야 할 운명을 안고 있었다. 그들의 지난 업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겠지만, 바야흐로 명실이 상부한 민주주의의 싹이 트려고 하는 시대에 민주당이 할만한 역할은 더 이상 없다. 민주당의 구성원들은 결코 민주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계보정치의 달인 권노갑씨가 우리의 미래에 어떤 희망을 줄 수 있는가.  마당발로 알려진 재정부분 전문가 김상현씨의 능력이 아직도 유효한가.  박상천씨는 한나라당의 박희태씨와 더불어 대표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꼼수정치의 도사 정균환씨 역시 국회의장이나 노리고 있을 뿐 희망을 창출해낼 능력은 이미 없어 보인다. 하나같이  국가에 유효한 정책을 연구하고 개발하기보다는 장막 뒤에서 행하는 잔머리 굴리기식 밀실정치에나 능한 사람들이다. 조폭의 논리인 의리나 열심히 강조하는 정치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끌려가서 얻어맞고 고문당하는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럭저럭 유효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민주당은 소멸될 운명을 안고 있는 집단답게도 시대의 이런 흐름을 읽지 못했다. 그들은 의리, 오직 의리라는 두 글자에만 사로잡혀 국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해보려다가 소멸의 시기를 앞당긴 셈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이 우리의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정당이라는 데에는 한 치의 의문도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개인적으로 민노당을 회의한다. 민노당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 포스트에 엘리트주의자들이 전진배치되어 있는 까닭으로 나는 민노당을 회의한다.. 비정규직의 관점에서 볼 때 정규직 노동자들은 완전히 귀족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후생복지를 위해 비정규직의 피를 빨아간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울산의 현대 패밀리를 보면 이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같은 부서에서 거의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정규직은 일일 삼교대에 퇴근하면 <한마음회관> 같은 데서 수영도 하고 테니스도 하고 그림 그리는 공부도 하고 등등 문화생활을 즐기지만 비정규직은 아니다. 그들은 퇴직금조차 보장되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위해 퇴근한 뒤에도 무엇이든 장사를 하거나 아니면 쪽방에 들어앉아 소주병으로 울분을 달랠 뿐이다.

 

  최근에 들어와서 민노총이나 민노당이 비정규직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갖는 척하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척일 뿐이다. 노동조합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정규직원들이 임금협상을 한 번 벌일 때마다 비정규직의 급여는 깎이거나 최소한 일거리부담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만 모르는 척 해버린다.  직설적으로 까놓고 말하자면 그들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꿀 뿐이다. 그것이 엘리트주의자들의 실체다.

 

 진보를 기치로 내건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고자 하는 조급증을 노출시키고는 해 왔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내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인정하지 않고 조롱하거나 비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수 쪽에서 보자면 <저희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사이에 에너지는 낭비되고 고갈된다. 그리하여 결전의 그 날이 왔을 때, 민중의 의식은 이미 보수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진보 진영은 그야말로 <끼리끼리 몇 명이서> 비분강개나 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어제의 동지였던 사람들이, 몇 차례의 쓰잘데없는 싸움을 거치는 동안 감정이 골이 패이고, 다시는 얼굴도 안 보겠다는 투의 무슨 원수지간 같은 사이가 되어 버린다.

 

 안티조선과 진중권의 경우는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주 역설적이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진중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보수를 자임하는 진영에서 유효적절하게 사용해먹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진중권은 선거 며칠 전에 자신의 글들을 삭제하는 용단(?)을 내린 바 있다. 자신이 별 생각없이, 아니 눈앞의 적(?)에 치중해서 뱉아낸 말들이 더 큰 적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전략을 수정하기로 한 건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진보를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의 의식속에 "내가 제일이다' 하는 엘리트 내지는 선민주의가 잠재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고로 그들은 자신들의 극단적인 사고가 통하지 않겠다 싶으면 아예 다른 극으로 질주해 버린다. 요컨대 입으로는 진보를 말하면서 행동은 즉 투표행위는 보수로 가버린다.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의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감정적인 선택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진보를 말할 수 있을까? 이번 17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런 점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한 이벤트였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