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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2/연애의 풍경

인연, 인연이었을까?


미국이 결국은 사람 죽이는 사업(?)을 벌여버린 오
늘, 나는 어쩐 일로 인연이 없는 여자가 자꾸 떠오르
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 결혼한 지 석달만에 남편이 죽은 여자, 그
여자와 잠시 옷깃을 스친 적이 있다. 물론 그녀가 결
혼을 하기 전이다. 그때 그녀는 약혼을 했었던가, 아
마 그랬던 것 같다. 그녀와 나의 처음 인연은, 이 정
도로 미미하고 기억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녀의 삶이 일상적으로 평온하게 전개되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그 뒤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
다. 풍문으로 멀리 그녀가 마침내 결혼을 했다는 얘기
를 들었고, 한때 같이 어울렸던 동아리 문우(文友)들
이 집들이를 갔다던가, 밖에서 만났다던가, 하여튼
한 다리 건너 소식이나 겨우 접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 접하는 소식 가운데 그녀의 남
편이 그만 혼자서 가버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결혼식
을 올린 지 석 달이 채 안 되었다던가, 석 달에서 며
칠이 지났다던가, 하여튼 처음 들을 때는 실로 멍멍하
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역시 남의 일인 까닭으로 나
를 강타한 충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또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는 서서
히 그녀를 잊어가고 있었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무엇
인가 끄나풀 같은 것이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모양
이었다.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은 상태에서 그녀는 육 개
월쯤 뒤 케나다로 갔다. 그때 나는 수원에 있었다. 공
항으로 가는 도중에 그녀는 내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인연인지 나는 그 날 대낮에 집에 있었다. 케이비에스
에서 피디를 하는 친구가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고, 전
화에서 그녀는 말했다.

마음을 잡으러 외국을 간다지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잡히겠느냐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해도 깊고
다같이 혼자 사는 몸들이니 편지라도 열심히 쓰고 받
고 하라고, 그렇게 권해서 전화를 했다고, 며칠 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다고, 그
녀는 그렇게, 한없이 더듬거리는 어투로 말을 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한없이 더듬거리는 어투로 내 주소
를 물었다.

"엽서라도 한 장, 이쁜 거 발견하게 되믄, 보내드리
고 싶어서요."

그리고 보름쯤 뒤에, 그녀는 정말로 한 장의 이쁜 엽
서를 보내왔다. 벵쿠버에 있다고, 거기서 육 개월짜
리 어학코스를 밟고 있다고. 그런 말이 씌어 있고, 그
리고 해변도시의 야경이 참 아름답다는 의례적이 말
이 덧붙여 있었던가, 아니다, 그 엽서의 그림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일 게다. 아름답다고. 야경이 참 아름
답다고.

나는 즉시 답을 썼고, 스무날 쯤에 뒤에 또 한 장의
엽서가 왔다. 그리고 또 엽서가 오고, 그렇게, 다섯
번쯤을 엽서로 간단하게 몇 마디 근황만을 알려오던
그녀가 여섯 번째부터는 봉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길다란 우표가 두 장이 붙어 있는, 그 봉함우편 속에
서 그녀의 얘기는 길었고, 바다 건너 아주 멀리 낯선
이들 틈에서 고독을 절감하는 사람답게 리얼했고, 그
리고 세밀했다. 손에 잡히는 듯이 세밀한, 그런 편지
가 일주일여 간격으로 오고, 그리고 갔다.

육 개월이 다 지나갈 무렵쯤 그녀는 현지 대학에서
종교를 선택했고, 학교에서 삼 개월간 아프리카로 선
교를 겸한 봉사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편지가 왔다.
삼 개월을 채운 뒤에는 본인의 희망과 종단의 심사를
거쳐 세계일주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물론 단순여행으
로서의 일주는 아니고,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일종
의 체험학습쯤 되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다양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
활을 깊이 들여다보는 그런 공부인 셈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답게 성실했고,
진지했고, 사려가 깊으니 어떤 심사든 통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삼 개월 뒤의 그녀는 귀국을 무기한
보류하고 세계일주에 필요한 훈련에 들어갔다. 그런
데 그녀와 나 사이에,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에 무엇
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 것 같다. 무엇이라고 딱히 규
명은 불가하지만 하여튼 뭔가가 있었다. 나는 편지를
매개로 그녀와 연애를 한다는 의식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 또한 그랬겠지만, 알지도 못하
는 사이에 뭔가가 생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그야말로 생뚱맞게도, 나에
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녁이었다. 라면을 끓여놓고 먹
으려던 참이었던가. 하여튼 뭔가를 먹다 말고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생각하기를, 어리석고 몽매하게도, 국
제전화는 요금이 비쌀 텐데 편지를 하지 왜 전화를 했
을까, 그러고나 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 뒤에, 그녀는 또 전화를 해왔다. 그
무렵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낙향을 드디어 결심
하고, 짐이며 이런저런 잡사들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
었다.

"저어, 사실은 여기, 서울이에요."

그녀는 그랬다. 이날평생 살면서 그때처럼 어리둥절
하고 멍해져버린 기억은 내게 별로 없다. 서울이라
니, 아니 왜? 언제부터? 하지만 나는 묻지도 못하고,
그냥 버버거리고만 있었다. 아니다. 뭐라고 말은 했겠
지만,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하여간 그녀는 서울에 와 있고, 며칠 전의 그 전화
도 실은 수원에서 한 거라고 했다. 서울에 와서 맨 처
음 시작한 것이 자동차운전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운행
실습을 핑계로 어떻게 수원에까지 왔었다고, 처음에
는 만날 생각으로 전화를 했지만 용기가 안 나서 그
냥 서울이라고만 하고 말았다고, 그녀는 그랬다. 바보
처럼, 버버거리는 어투로 그러다가는 뚝 끊고 침묵으
로 들어갔다.

나는 그날 저녁쯤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짐을 꾸리
는 중이라고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
어서 책속에 넣고 이사를 했다. 그리고 석 달, 아니
넉달쯤 뒤였던가. 나는 그녀를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책속에서 나온 전화번호를 보고서야 알았다.

자그만치 이십여 년만의 귀향이라 여러 가지 번잡스
런 일도 있고 그래서 미처 생각을 못했겠지만, 어쨌
든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래 부랴부랴 전화를 했더니, 그녀는 한참 동안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나무라는 어투로 이렇게 말했
다.

"거긴, 전화도 없어요?"

조용하고도 무거운 그녀의 그 목소리가, 뭔가를 참으
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그 이상
한 인기척이 내 영혼의 한켠을 헤집고 들어왔다. 밤
에 잠자리에서도 가끔 들렸다. 그녀는 그때 혹시 울었
던 것일까. 모르겠다.

나는 그때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당신은 내게 특별
한 여자라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을 아마 기억하
고 아파하며 가끔은 눈물도 흘리게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짐작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세계일
주 기회를 포기하고 서울로 와버린 것은, 어쩌면, 그
녀와 내가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에 생겨버린 그 어
떤 것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이제야 생각해
본다. 정말로 나는, 그때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오, 이 바보스런 멍청이.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그때 입시생들 과외지도로 생
활을 꾸려가고 있었고, 내가 전화를 한 그 시간은 막
강의에 들어갈 참이라서 오래 통화를 할 수가 없었
다. 그래서 그녀는, 한 시간 삼십분 뒤에 다시 전화
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런다고 말은 했지만, 약속
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로 벌써 오년, 아아, 그러고 보니 오년
이나 지났다.

아침부터 우울이 가득 장마구름처럼 몰려오는 오늘,
나는 그녀가 유별나게도 생각난다. 그 동안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라, 간간이 생각을 하기는 했지
만, 오 년 전 그 날,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사실은
입에 넣고 오물오물 껌을 씹듯이 오물거리다가 삼켜버
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내가 그때, 왜 그러고 말
았을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확실히 미친놈이라는 생
각이 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미친놈이기 때문에,
그녀의 친구에게도, 내 친구에게도, 그녀의 소식을 묻
는다거나 하지도 못하고 그저 가끔 생각이나 하고 있
는 것일 게다.

생각컨대 그녀는 아마, 지금쯤은, 성직자가 되어 있
을 것 같으다. 나는 어쩌면 그녀에게서 그걸 감지했
던 것인지도 모른다. 운명이라는 것이 가령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굴레로써 실재하는 것이라
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이라고 한
다면, 나는 어쩌면 그녀에게서 사람을 사랑하며 아이
를 낳고 안락을 느끼는 여자이기보다는 신 앞에 무릎
을 꿇은 자세로 언제까지나 엎드려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잔인한 후광 같은 것을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목소리가 아기 같았던, 아기처럼 작고 떨리고 느릿느
릿했던 그녀, 그녀의 그 목소리와 그리고 들판의 풀
잎 같았던 그녀의 얼굴을 나는 아마 앞으로도 오래 기
억하며 문득문득 청승스러워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 또는 알 수 없는 어떤
예감 같은 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는 하겠지. 적
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이
여세를 몰아 이땅으로 총구를 돌리지 않는 한은 그렇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