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봐.
어떤 여자가 말야. 그래, 여자야.
남자보다는 여자라야 해. 스물일곱에서 마흔 살쯤
의, 그러니까 한참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면서도 권태
가 무엇인가를 알 법한 그런 여자라야 해. 어쩌면 네
다섯 살쯤의 아이 하나를 등에 업고 조금은 휘청거리
는 걸음걸이의 여자라면 더욱 그림이 되겠지.
꼭 지금처럼 가을이 가을을 포기하고 겨울이 되어버
린 쌉쌀한 계절에 말이야. 어떤 여자가 포대기도 없
이 등에 애기를 업고 길을 가다가 멈춰서서 하늘을 쳐
다보는 거야. 약간 삐뚜름한 자세로, 고개도 절반만
들고, 보는 듯 안 보는 듯 한참을 그렇게 마치 비웃
는 듯이 하늘을 보다가는 옆에 사람에게 불현듯 이렇
게 묻는 거야.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아야 해? 나 말야. 나 어떻
게 살아야 해?
금방 죽을 것 같은 음성으로, 아니 어쩌면 어제나 그
제쯤 무덤에서 나온 것 같은 표정으로, 여자는 불현듯
이 그렇게 묻고는 멀뚱한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는
거야.
그때 그 여자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응? 당신이라면 말이야. 어떻게 하겠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겠어?
그 앞에 선 사람이 만일 성직자라면 신을 믿으라고
하겠지? 그러면 구원이 있다고, 그렇겠지? 그럴 거야
아마. 그리고 그 사람이 만일 정치인이라면, 자기네
당을 지지하라고 하겠지.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
면서 자기네 당을 지지하라고, 그러면 곧 좋은 결과
가 있을 거라고 하겠지. 그리고 또 적당히 게으르고
권태에 빠져 심심해하던 참의 윤리 선생님이라면 이렇
게 나오겠지. 인생이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
냐, 세월이 유수라 했으니 인생 또한 그와 같도다, 실
망하지 말라, 어쩌고......
그런데 그 사람이 나라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나라면, 나라면 말이야. 나는 아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그 여자의 눈만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애. 속으로
는 뭐라고 한 마디쯤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
지. 그래서 애가 마르겠지. 애가 타서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죽어라고 욕도 하겠지.
이게 뭐냐, 나는 이게 뭐냐. 아, 입......이 입은 뭐
하라고 있는 거냐. 뽀뽀하라고 있는 거냐. 밥이나 먹
으라고 있는 거냐. 도대체 뭐에 쓰라고 있는 것이냐,
이건, 이 입은 응? 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욕이나 하
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정말로 누군가의 어떤 말이 필요해
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일까? 앞의 성직자나 정치가
나 윤리선생 같은 류의 한 마디 달콤한 거짓말로라도
삶의 위안을 받고 싶어서 그런 막막한 질문을 던졌던
것일까?
아니겠지. 설마하니 그렇지야 않겠지. 인생이 얼마
나 깊은 굴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는 성직자
나 청치가가 윤리선생 따위 보다는 그 여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그런 질문도 한 번 해봤
던 것이겠지. 그런 질문은 원래가 질문을 한 사람 자
신이 답을 더 잘 알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
겠어?
그러니까 그 여자는, 그랬던 걸 거야. 세 치도 안 되
는 인간의 혀가 만들어내는 무슨 얄팍한 충고나 위로
의 말 따위가 필요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
던 거야. 그 여자는 다만 세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조
금이라도 좁히고 싶었던 거야. 거리 좁히기가 가능한
사람을 잠시라도 좋으니 한 사람쯤 만나고 싶었던 거
야.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려줄 그런 사람을, 이 세상
에 태어난 기념으로라도 하나쯤은 그런 사람을 그 여
그 여자는 만나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어떡하니. 이제야 난 그 소중한 것을 깨달았
어. 그때는 그것을 전혀 몰랐어. 그때 난 그 여자에
게 그런 한 사람이 못되고 말았던 거야. 들어봐.
그 해의 겨울도 다 가고 삼월이었어. 그러니까 봄이
라기에는 겨울 같은 그런 날씨에 난 산을 내려와서 작
은 도시의 어디 해장국집 같은 곳을 찾아가고 있었더
랬어. 죽기보다는 살기를 생각하면서 말야. 산을 내려
오자마자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금방이라도 주
저앉아 버릴 것만 같아지는 거야.
그래서 밥을, 오직 밥만을 생각하며 내달리듯 골목
을 걷는 중인데 아이를 업은 그 여자가 앞을 가로막
고 나타난 거야. 금방 멱살이라도 틀어잡을 듯이 달려
들면서 이러는 거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살아야 해?
이게 뭐야. 이 아득한 질문이 왜 나오는 거야. 나는
어리벙벙해서 그 여자를 멀뚱히 쳐다보고나 있었어.
그 여자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
고. 그러니까 그 여자는 그때 잠시 착각을 했었던 거
야. 무슨 일 때문인지 흥분해서 판단력을 잃은 상태
로 헤매다가 사람을 잘못 보고 달려들었던 거야.
잠시 뒤에 그 여자는 부끄러움과 그 어떤 치욕스러
움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도망
을 치듯 내 앞을 떠나갔어. 나 역시도 그 순간에는 어
찌나 놀랐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후
회가 돼. 그때 왜 좀 더 의연하지 못했는가 하고.
그런데, 그런데 말야.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여자
와 같은 느닷없는 질문을 누군가가 해온다면 나는 여
전히 그때와 똑같이 아득해질 것 같아.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말 것 같아. 또 모르지. 서로 얼굴 쳐다
보며 눈물 정도는 같이 흘려줄 수 있을런지도.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사
람이 사람을 붙잡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식의 아
득한 질문은 하지 말자고, 그런 질문으로 사람을 절망
스럽게 하지는 말자고.
아래 그림은 울부짖는 여인, 피카소

'전날의 섬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위체위를 거부한 여자 릴릿의 운명과 性戰爭 그 이후 (0) | 2002.11.03 |
---|---|
뭐지, 여자란 뭐지? (0) | 2002.11.01 |
완벽한 자살의 방법을 연구했었지 (0) | 2002.10.29 |
내가 참 무정하게 살아왔구나 (0) | 2002.10.28 |
겨울산 깊은밤 눈속에서의 커피 마시기 (0) | 2002.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