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물이 될 수 있다면
초아는 태권브이 일당을 상대로 그라인더 사용법 강의를 시작했다.
그라인더를 잡을 때는 허리를 굽힌 자세에서 배에 힘을 주고 팔에 힘을 빼야 한다는 둥, 다리가 잘릴 수도 있으니까 각반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둥, 칼날이 돌아가고 있는 순간에는 절대로 자세를 바꾸면 안 된다는 둥,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거나 칼날 돌아가는 느낌이 뻑뻑할 때는 즉시 스위치를 꺼야 한다는 둥, 갑자기 무슨 학교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 자세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며 설명하는 초아의 강의를 태권브이 일당은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운동 신경이 좋은 그들은 금방 익숙해져 갔다. 세 명이 차례로 한 번씩 돌아가며 그라인더 스위치를 눌러보고, 그 다음에는 세 명이 차례로 한 번씩 돌아가며 스위치를 넣은 상태에서 콘크리트를 아무 데나 살짝 잘라보고, 그 다음에는 세 명이 한 번씩 차례로 돌아가며 콘크리트를 깊이 잘라본 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십오 센티미터 넓이로 선을 그은 다음 차근차근 천천히 잘라내는 본격적인 작업에서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몇 번씩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별 사고 없이 잘 해내고 있었다.
초아는 차츰 콘크리트 바닥에 선이나 그어주는 감독이 되어 갔다. 더불어 코보도 차츰 할 일이 없어져 갔다. 태권브이가 그라인더로 선을 따라서 자르고 나면 왼손잡이가 곡괭이질로 콘크리트를 부시고, 이빨이 그것을 긁어내는 식으로 일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곧 싫증이 날 것이고, 힘들기도 할 것이고, 그러면 이내 그만두겠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태권브이 다음에는 외손잡이가 그라인더를 돌리고, 왼손잡이 다음에는 이빨이, 그 다음에는 다시 태권브이가 그라인더를 잡는 방식으로 일은 계속 그들 차지가 되었다. 게다가 그렇게 잘라낸 것을 자기들이 곡괭이로 부수고 삽으로 퍼낸 뒤에 호스를 넣고 다시 덮기까지 했다.
할 일이 없어진 코보는 손님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참을 서 있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오랜만에 오리들 앞에 앉아서 ‘코스모스’를 읽을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낮에는 오리와 더불어 책 읽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기분이 착잡하긴 해도 어쨌든 태권브이 일당 덕분에 오리들과 함께 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
도서관에 갈 시간을 계산하느라 허둥거릴 필요도 없었다. 책 읽기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코보의 기분은 아주 묘했다. 태권브이 일당이 날마다 와서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뒤엉켜서 헷갈렸다. 초아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태권브이 일당이 왜 굳이 남의 동네까지 와서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만, 사서 아줌마를 생각하면 눈앞이 환해지면서 방금 목욕이라도 하고 난 것처럼 상쾌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안마를 하고 있을 때 사서 아줌마는 으, 으, 소리를 내며 목을 점점 늘어뜨리곤 했다. 으, 소리가 한 번 나올 때마다 목이 일 센티미터씩 늘어나는 것 같았다. 으 소리는 매우 기분이 좋다는 뜻을 품은 일종의 암호 같은 것이었지만, 이러다가 혹시 사서 아줌마의 목이 타조처럼 아주 길어져 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 코보는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그런 어이없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은 매번 그렇게 하면서도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떤 때의 사서 아줌마는 물 같기도 했다. 뼈나 가죽은 하나도 없이 오직 물로만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몸 전체가 늘어지면서 마치 모래톱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사라진다는 느낌이었다.
손으로 뼈를 만지고 있는데도 만지고 있다는 감각은 없이 마치 꿈에서 찬란한 별이라도 따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충만이 느껴졌다. 그런 순간이 오면 사서 아줌마의 입에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식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리 코보는 손매가 어찌 이렇게도 매우면서 달콤한지 모르겠어, 응?”
이 한 마디.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안마를 할 때마다 한두 번씩은 듣는 말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워서 코보는 매번 그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안마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서 아줌마는 앉은 채로 몇 차례 길게 숨을 내쉬고 마시기를 되풀이했다.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살아난 사람의 안도 같기도 하고, 산다는 것이 이렇게도 포근하고 기쁠 수 없다는 무슨 환희의 숨쉬기 같기도 했다. 마시거나 내쉬거나 숨을 쉴 때마다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목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가볍지도 않고, 너무 무겁지도 않게, 오르락내리락 하면서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지 않게, 마치 꽃이 활짝 핀 난초의 꽃대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움직이는 사서 아줌마의 뒷목을 코보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의 몸은 칠십 퍼센트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
문득 그런 말이 생각났다. 코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사람이 물이 될 수도 있어요?”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취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코보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아 있었을까. 첫 번째 말은 사서 아줌마가 미처 못 들은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들었다.
“물? 사람이? 그게 뭔 소리야?”
고개를 돌리는 사서 아줌마의 휘둥그레진 눈을 코보는 보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코보는 그 눈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듯이 도전적으로 거침없이 말했다.
“초아 누나가요. 물이 되고 싶어서, 물이 되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학교를 그만둔 거래요. 학교에서는 죽었다가 깨나도 그런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학교를 그만둔 거래요.”
“초아가? 그랬어? 몰랐네, 근데 왜 물이 되고 싶을까?”
“그러니까 사람이 물이 될 수도 있는 거냐고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은데? 사람은 죽으면 흙이 된다는 말이 있단 말이거든. 그런데 엄격히 말하자면 흙이라기보다 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겠지. 왜냐하면 시체가 흙 속에 계속 있지는 않으니까.”
뭐 이래.
코보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대답이 너무 싱거웠다.
“에이. 그런 죽은 물 말고요.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의 몸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물, 그런 물을 말하는 거예요.”
“미안해. 코보야. 누나가 말이야.”
누나는 무슨, 그것도 모르는 것 같구만.
사서 아줌마의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지만 코보는 벌써 이미 실망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사서 아줌마는 그것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정말로 대단히 미안한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서며 말하고 있었다.
“너무 어려워서 말이지. 무슨 말로 어떻게 어렵다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응? 누나가 좀 더 공부를 해서, 그때 말해주면 안 될까?”
“그때는 뭐, 저도 공부 다 했을 걸요?”
“응? 뭔 소리야?”
“저도 지금 사람이 물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그 공부 하고 있는 중이라고요.”
“아, 그렇구나, 참, 그렇겠다. 그럼 누나랑 같이 공부할까?”
“싫어요. 전 혼자 하는 게 좋아요.”
“나쁜 놈.”
사서 아줌마는 갑자기 이빨이라도 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사실은요.”
“응. 사실은?”
“이번에 누나라고 부를 생각이었거든요. 사람이 물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대답해 주시면 말이에요.”
“그래서 이젠 영원히 누나라고는 부르지 않겠다?”
“그렇겠죠.”
“독한 놈.”
사서 아줌마는 기어이 코보의 머리에 꿀밤 하나를 먹였다. 그 순간 코보는 이제 이 문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입에 붙지도 않는 누나 소리를 놓고 갈등할 일이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았다.
초아 누나는 왜 하필 물이 되고 싶다는 거지?
도서관을 나와서 한참을 걷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사서 아줌마가 왜냐고 물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해보고 있었다. 초아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하긴 물어보면 또 이상한 소리나 할 것이었다. “내가 아직 공부 중이라서 뭐라고 말은 못해.”하는 식의 그런 대답 말이다.
아무튼 물이 된다면 신날 것 같기는 했다. 수증기가 되어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이고, 커다란 나무의 수액이 되어 새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고, 땅 속으로 깊이 흘러 들어가서 언제 어디에 어떤 규모의 지진이 날 것인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우주선도 필요 없이 화성이나 목성 같은 별 세계로의 여행도 가능할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코보는 문득 나도 물이 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초아가 전보다 훨씬 대단해 보이고, 그리고 무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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