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마음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다. 큰일나겠다.
코보는 혼자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이 사람이라고,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할머니였다. 그러니까 할머니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살이라고 하는, 그렇게도 큰 비밀을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알아낼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알려고 해서 안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알아낸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같지 않은 사실이 코보의 입을 무겁게 했다. 눈도 깊어졌고, 생각도 넓어졌다.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달라진 그 모든 것들을 코보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초아의 걸음걸이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말을 할 때의 억양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바리, 바리라고? 물이 되고 싶다고?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난 때문에 자살한 아빠 엄마를 둔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초아 같은 사람이 아니면 그 어떤 사람도 그런 생각은커녕 그 비슷한 생각도 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초아의 말이 맞았다. 막연하게라도 아빠 엄마가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러니까 아빠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코보 자신은 엄청 행복한 편이었다. 행복해서 그런 어려운 생각을 해볼 수가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촉새 아줌마는 당장에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다음 날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코보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코보는 갑자기 무슨 굉장한 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가슴에 뭔가 가득 쌓인 것 같았고,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엇인가를 한 아름 품에 안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태권브이 일당도 예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왔다. 그라인더로 콘크리트만 자르는 게 아니었다.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맨땅도 그들은 곡괭이로 파 헤쳐서 삽과 호미로 긁어낸 뒤에 고무호스를 묻고 흙으로 덮었다. 약수터의 물을 마당으로 끌어들이는 모든 일을 사실상 그들이 독점한 셈이었다.
초아가 무슨 마술을 써서 그들을 그렇게 일 잘하는 노예로 부리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처음에는 있기도 했지만, 코보는 이제 그런 의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그렇게 열심히 내 일을 해준다 해서 너희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 해.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 말이 입을 근지럽게 하기도 했다. 그 말이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코보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입으로 직접 하는 말은 오히려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잠깐씩 말없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할 말은 충분히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태권브이는 돈 봉투를 받아간 그날 이후 한 번도 코보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이빨이나 왼손잡이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한참 떠들어대며 일을 하고 있다가도 코보가 나타나면 목소리를 낮추면서 슬쩍 외면해 버렸다.
코보는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한 시간 정도씩 의무적으로 나가서 하는 일 없이 얼쩡거리다가 돌아왔다. 마치 남의 집 일하는 데 구경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끔 고무호스가 묻힌 흙을 발로 밟아주기도 하면서,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슬그머니 돌아와서 오리 울타리 앞에 쭈그리고 앉아 ‘코스모스’를 읽었다.
오리는 가끔 날아가는 자세를 취해 보이곤 했다. 한 마리가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펴고 두세 번쯤 파닥거리다가 쏜살같이 도움닫기를 하면 다른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르고, 그러면 그때부터 오리 다섯 마리가 일제히 그렇게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마치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 하지만 날아오르지는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날아오른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버렸다. 날개는 이제 깃털이 거진 다 나와 있었다. 꽁지 깃털도 그럴 듯하게 나왔다. 다만 한 마리, 뽀야에게 엉덩이를 물렸던 녀석의 꽁지는 깃털이 영 부실했다.
뽀야는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초아가 집을 나서면 그 뒤를 따라나섰다가 오리 소리를 듣고 울타리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울타리의 보호 속에 있는 오리를 제까짓 게 어쩔 것인가. 쓸데없이 캉캉 짖어대며 두 발로 울타리 철망을 긁어대다가 낑낑거리며 돌아설 뿐이었다.
초아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오전 두 시간 오후 세 시간 매일 다섯 시간의 작업에 참여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감독만 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도 일은 일이었다.
태권브이 일당을 작업에 참여시킨 뒤로 초아는 말수가 줄어 있었다. 말수가 줄어든 초아가 진짜 초아라고 코보는 생각했다. 만나면 그냥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던 초아는 진짜 초아가 아니었다. 가슴 속을 흐르는 일흔 개의 강이 바싹 말라 있어서, 그래서 그렇게 말로라도 채우려고 떠들어댄 것일 뿐이라고 여겼다.
지나가는 태권브이 일당을 대범하게 불러 세울 수 있었던 까닭도 코보는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초아의 가슴 속을 흐르는 일흔 개의 강은 다 차 있는가? 그래서 말이 없이 항상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그 문제의 해답은 촉새 아줌마의 행동거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이년아’ ‘저년아’ 하던 촉새 아줌마의 입이 아주 말끔하게 씻겨 있었다.
말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욕이 사라져 있었고, 길에서 초아를 만나도 ‘응 너 여기 있었냐’하는 투로 살짝 아는 체만 할 뿐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거는 투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초아 역시 길에서 이모를 만나면 ‘또 어디 가?’하는 식의 가벼운 인사치레만 할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촉새 아줌마가 조카딸 초아를 가리켜 ‘이년아’ ‘저년아’ 할 때의 그것은 사실 조카딸을 대하는 태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사랑해서, 너무 사랑해서 하는 ‘이년아’ ‘저년아’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뭔가 미세한, 미세하기 때문에 오히려 뚜렷한, 그러면서도 뭐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무슨 질투심에 불타는 살기 같은 것이 문득문득 드러나곤 했었다. 너는 내 것인데 네 맘대로 어디를 가느냐고 고래고래 악이라도 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촉새 아줌마의 그런 태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사라졌는데도 본인은 그것을 의식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옛날부터 그래 왔었던 것처럼 아무렇지가 않게 자연스러웠다. 아줌마뿐만이 아니었다. 초아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듯 천연스러웠다. 흡사 두 사람이 밤새 어디 멀리로 가서 성격개조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코보는 그런 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면서도 누구에게 보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이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신 바싹 차려야 한다고, 안 그러면 큰일 날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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