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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5)

 

풍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키스를 해요. 외로울 때는 키스를 해요. 그리운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외로울 때, 그럴 때는 키스를 해요. 온 몸에 힘이 빠져서 죽을 것 같을 때, 더 이상은 살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 키스를 해봐요. 그러면 금방 살 것 같아질 걸요? 살고 싶은 욕망도 마구 생길 걸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녀의 저작 <키스의 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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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다. 내가 신기하다. 지금 내가 나라고 말하는 여기 이 내가, 나라는 인간이 돌이나 풀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돌이나 풀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물을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어디에 종속되거나 기생한 상태가 아닌 주체적 존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니다. 보다 깊이 들여다보자면, 나는 지구에 기생하는 숙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래, 이것은 중요하다. 인정해야 한다.

그야 어떻든 나는 지금 나를 느끼고 있고, 그 느낌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탓으로 다만 신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신기함이란, , 탐구의 절정에 다다른 자가 마주쳐야 하는 외로움 같은 것은 아닐까?

 

, 그것이 있었구나. 외로움.

 

외로움이 가령 질서와 제도를 허용하지 않는 이 세계의 이면이라면,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밀림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런 깊은 구멍을 발견하고 내 스스로 뛰어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마 이 세상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외로움이란 필경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이 엄청난 증거를 방부처리해서 영구히 보존할만한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해보자.

 

아홉 살 이후 십대 시절에는 내가 죽고 싶었다. 죽음이라는 그 한 가지 문제에 전념할 할 수 있었다. 열아홉 살 이후 이십대 시절에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살인이라는 그 한 가지 문제에 에너지를 총력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삼십대,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그러면서도 그 어떤 일에도 깊은 흥미와 열정을 갖지 못하고 말아버리는, , 이 삼십대란 대체 무엇인 것이냐?

그게 우유부단이라는 거예요. 우유부단, 알겠어요?”

지난 날 내 옆에서 나보다 먼저 잠이 들고 먼저 깨었던,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한 여자의 그런 진단이 나를 아마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을 것이다. 그녀가 내 곁을 비우고 떠나간 뒤에도 그 말은 무시로 떠올라 눈을 반짝이게 하고 머릿속을 꽉꽉 채워놓았다.

 

아 우유부단, 우유부단, 세상을 가령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미련하게 양분을 한다면, 우유부단은 아무래도 좋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여겨졌다. 아내가 그것을 혐오하니까 좋다고 애써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명석한 두뇌와 직관력, 그리고 두부를 자르듯이 단칼에 처방을 내리는 그 확실한 언어구사에는 늘 감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격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감격은 언제나 그 한순간뿐이었다.

감격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제법 연구도 해 보았지만 답을 얻지는 못했다. 머릿속에 넣고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하다 보면 어느새 에너지가 소멸되어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의아해 하기 일쑤였다. 감격이라는 것이 가령 떡이라든가 닭고기 같은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따위 맹랑한 헛소리만 목구멍에 걸린 가시랭이처럼 남아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도 필경은 그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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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벌레들이 집을 짓고 들어앉아 나를 뜯어먹고 있다는 생각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도 없었지만 할 만한 일을 찾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긴 이 험한 세상에서 삼십 년 이상이나 병치레 한 번 없이 잘 살아 왔으니 이젠 그럴 때가 된 것도 같았다. 벌레가 나를 먹으면, 나는 벌레가 되고 벌레는 내가 되어 내 행세를 하게 될까?

서기 이천 년까지만 사람으로 살아도 과분하게 오래 사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서른 살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청춘예찬론에 빠져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인식하기도 했었다.

 

서른 살 안에 죽어야지만 그나마 청결하고 당당한 자기 자신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찍 죽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회의주의자들의 그런 열정적인 바이러스를 내 스스로 받아들이기까지 했었던 내가 그 뒤에 얻은 것은 무엇인가? 서른이 되기 전에 내가 나를 흙에 묻어야 한다는 굳은 결심으로 삽을 들고 미친 듯이 땅을 파기도 했었지만 나는 결국 서른 살 고개를 넘어서고 말았다.

삽을 들고 은선암을 다시 찾았던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 뭐가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었나?

 

, 책을 읽었더랬다. 오랫동안.

이광수의 무정과 유정에서 윤동주를 지나 사르트르 그리고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백 페이지 이상씩 읽어야 한다는 의무를 걸어놓고 마치 골대에 골 넣기 연습을 하듯이 그것들을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단어 하나에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독, 백년동안의 고독, 거기에 잡혀 버렸다. 더 이상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부유하며 아무것도 못하게 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잠 못 이뤄 괴로워하는 자의 지독한 영혼이 내 영혼을 접수해서 요리조리 살피다가 그만 팽개쳐버린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아무 개울에나 대책도 약속도 없이 놓아버리는 불자들의 방생하는 미꾸라지처럼 내 영혼은 자유의 뿌리를 발견했다고 박수치며 좋아라 하는 순간 그것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벼락처럼 한 생각이 머릿속을 쑤시고 들어왔다. 이런 짐승, 짐승, 그것이었다. 논리적인 어떤 이유는 없이 내가 짐승 같았다. 그러나 곧 짐승도 못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짐승은 적어도 자기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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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체인지에 대해 깊이 연구를 좀 해봤으면. 고속도로에 나갈 때면 버릇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반드시 인터체인지와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하겠노라고, 그러나 돌아오면 이내 잊어 버렸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망각을 가능하게 하는 정열이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지는, 그러나 문득 정산을 해보면 아무 한 일도 없어져 있는 삼십대의 도둑놈 같은 정열이 나는 끔찍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끔찍하다는 감정마저도 결국은 정열인 것 같았다. 계획도 없이 받아들이고 만 이놈의 삼십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

아내 모르게 남편이 책을 읽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내는 크게 화를 냈다. 사업을 한다고 일을 벌여놓은 사람이 하루 중 대부분 시간을 도서관에 바쳐오고 있었으니 무슨놈의 사업이 계획대로 될 수 있었겠느냐는 게 그 이유였다.

 

내가 가령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든가 <정부의 부동산대책 맹점 뚫어보기> 같은 책을 읽어오고 있었더라면 아내도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 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책은 아닌 것이다. 그야 어떻든 나는 아내의 그런 지적을 받고서야 비로소 내가 그 동안 아내에게 숨긴다는 의식도 없이 아내 모르게 책을 읽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내가 아내에게 뭔가를 크게 잘못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내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책을 읽어온 것은, 그것은 말하자면 미안해야 할 일이긴 해도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만 될 정도의 범죄행위는 아니라는 게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사업이래봐야 뭐 구멍가게도 못 되는 수준의 일수장사이기는 했지만, 크든 작든 돈으로 돈을 불리는 그 일은 대부분 후배가 맡아서 잘 처리해 내고 있었다. 은선암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의 일심암 시절에 은사골을 오르내리며 유년기를 같이 보낸 두 살 아래의 믿을만한 후배였다.

십 년 이상 대웅전 신축 불사를 준비해 온 어머니의 일편단심을 훔치고, 여기저기 아무 데나 불려가서 밤새워 푸닥거리를 해주고 모아놓은 누님네의 돈까지 죄다 훔쳐들고 나와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이 그 후배였기 때문에, 믿을만한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겨놓다시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대학을 나왔고, 회계사시험까지 합격한 아주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대학을 나오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아내는 양심적인 회계사 면허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질투를 하는 것인지 어째서인지, 아내는 그 후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뢰하지도 못했다. 말이 많고 임기응변이 능해서 교활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그런 기분대로만 하자면 아내와 후배는 죽어서라도 같은 자리에 앉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사람의 감정은 변하는 법이었다.

아내가 별거를 선언하고 집을 나간 지 한 달이 채 못 된 어느 날 나는 매우 신선한 사실을 발견했다. 가장 싫은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게 사람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 이것은 사실 대단히 흥미롭고도 충격적인 앎이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특별히 미워하면 그것은 미움이 아니라 관계의 혁명적인 재편을 모색하는 정교한 기술이라는 것,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만큼 삶이 흥미롭게 여겨지는 순간이 또 있을까.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된다는 말은 유행가에서나 가능할 뿐 실생활에서는 불가하다는 따위 생각을 내가 평소에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미워 죽겠다던 후배에게 자기라고 부르며 살살거리는 아내의 심리적 변화는 매우 흥미로웠다. 머릿속은 더불어 대단히 복잡하고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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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를 내가 왜 이렇게 부담스러워해야 하는가. 열심히 분석해 보니 그놈의 독서가 주범으로 떠올랐다. 책읽기를 통해서 나는 세상과 나 사이에 깃발을 꽂아놓고 내심 경주를 벌여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 자신이 꽂아놓은 깃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탈환하지 못한 채 승리의 영광은 세상에 내주고 말았다.

독서의 유래를 더듬어보면 오래 전 내가 죽이기로 했으나 죽이지 못한 그 사내와 선이 닿는다. 그 인간을 찾아서 헤매는 동안 나는 줄곧 심심풀이 무슨 알사탕처럼 읽을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그것을 먹어치웠다.

그때의 그 버릇이 그대로 남아서 결혼을 하고 사업이랍시고 벌여놓은 뒤에까지도 나를 관리해 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인간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죽여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 것도 필경은 그놈의 독서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동안 그렇게 읽어온 것이 무엇이었나? 글쎄.

숫자를 헤아려보면 십오 년 가까이나 뭔가를 열심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어온 것 같지만 십오 년이라는 햇수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독서는 경제원칙에 크게 위배되는 행위임이 틀림없다. 오 이런, 세상의 모든 읽을 것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진시황을 비롯한 그 계통의 모든 선험자들에게 뒤늦은 박수라도 보내야 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