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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

 

죽은 자의 추억

 

구름이나 바람소리 따위에 자주 한눈을 파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어떤 일을 해도…….

그런데 구름에 한눈을 파는 행위 자체는 일이 아닌 것일까.

아니겠지. 아니라고 해야겠지.

 

남행열차 무궁화호 안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줄곧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구름과 일이라는 단어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 걸로 미루어 아마도 그랬었던 것 같다. 기차가 달리는 일곱 시간 여 동안 내내 그렇게 구름과 일과 성공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팔 년 전, 칠 년만의 귀향길이었다.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하다못해 풀뿌리 하나에게라도 성공하여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적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팔 년 전, 비록 아무 일도 성공은 못했지만, 날아갈 듯이 가벼운 영혼으로 나는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굳은 땅이라도 거부하지 못할 것 같은, 삼각형 모양으로 끝이 잘 벼려진 삽 한 자루가 그때 내 소지품의 전부였다.

 

차창 밖의 풍경은 가도가도 물기가 없이 삭막하고, 때로는 미친 듯이 화려했다. 갈잎이 버석거리는 이월,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실을 끊어먹고 하늘 높이 솟구치는 연을 좇아 고개를 뒤로 젖히는 아이들의 발밑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들리는 듯했다. 손에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들고 줄 끊어진 연을 좇아 뛰어가던 소년이 우뚝 멈춰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낯익은 그 얼굴, 누구인가, 누구일까. , 소년은 어쩌면 길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울지는 말아라.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법이다. 소년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꼿꼿한 자세로 하늘을 보거라. 그래야 한다.

 

하늘을 보는 자는 노예의 조건을 거부한다.’

 

게오르규. , 그가 생각났다. 25, 그러자 갑자기, 옆구리에 작은 바구니를 끼고 우렁을 잡던 어린 처녀가 방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림이 떠올랐다. 물에 젖은 긴 머리카락이 앞 뒤 좌우로 마치 육체를 탈출하는 그녀의 영혼인 양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녀가 잡은 우렁은 바구니를 빠져나와 방죽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흡반을 대고 그녀의 머리를 장식하며 그녀와 같이 흔들렸다. 고무신짝을 손에 들고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보던 소년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차창 밖의 삭막한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갈잎이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이월, 이월이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 양지쪽에 뿌리를 내린 동백은 그새 피보다 붉은 꽃송이를 뚝뚝 떨구고 있었다.

 

은선암의 뒤란 벼락바위 아래 작은 석곡 사이의 춘란들은 지금쯤 겨우내 감춰둔 꽃대를 한창 밀어 올리고 있으리라.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 있어도 참지 못하고 덩달아 온 몸을 뒤척이는 풍경 소리가 누이의 숨결만큼이나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때로는 심장을 노리는 창끝처럼 서늘하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향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서 있는 벼락바위를 보고 있노라면 쉭쉭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까치독사마저도 두렵지 않고 악수를 하고 싶어져 버리는, 가끔은 누이동생이나 비구니들의 몸에서 풍기는 낯선 향기를 들이마시고는 취해서 어쩔 줄을 몰라 숲 속을 헤매다가 비탈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던 이런 곳으로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는 이팔청춘 열아홉이었다. 미움의 대상이 필요한 시기였다.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이거나, 모든 것을 다 좋게 보려고 해서는 내가 살아가기 어렵다는 충격적인 인식이 그 시절의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을 분명히 해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

그 해의 삼월, 깎아지른 바위의 틈새에서 춘란이 고개를 수그린 채 화봉을 열고 혀를 내미는 그 해빙의 계절 어느 오후에 나는 가슴에 칼을 품고 길을 나섰다. 어머니가 이따금 묵화를 치는 화선지 몇 장으로 둘둘 말아 감은 식칼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앙다물고, 갈숲을 따라 구불구불 길게 늘어선 방파제를 따라 걷고 있을 때 버석거리는 갈대들 사이로 점점이 찍힌 물감처럼 이제 막 머리를 내미는 푸른 새싹들이 보였다.

 

그것도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젊음, 젊음의 피, 들끓는 그것의 요구하는 바는 인간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여야 할 그는 물론 나쁜 인간이고,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제 그를 죽이고 나면, 아아, 나쁜 인간이 될 것이었다.

나의 꿈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 착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척척 해내는 존재,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나의 성공이었고,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여겼다.

 

죽여야 할, 당연히 죽여야 한다고 내가 심판을 내린 그 나쁜 인간의 행로를 파악하는 데만 육 년여가 걸렸다. 그 뒤를 추적하느라 잠 못 이룬 세월이 또 일 년여, 모두들 좁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땅이 경우에 따라서는 지구 전체의 면적과 맞먹는 규모로 확장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눈을 봤다. 그때, 잠깐, 칠 년여 만에 찾아낸 그 인간에게서 맨 처음 발견한 것이 그것이었다. ,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인간의 눈은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맑고, 닻줄처럼 집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투명함과 끈질김이 공존한다는 것은,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아, 나는 그 순간에 이미 퇴각의 시기를 놓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구름을 봤다. 그때, 잠깐, 그 인간의 눈을 보고 난 뒤에 하늘의 구름을 봤다. 눈이 부셨다. 이상한 일이었다. 구름과 빛을 동시에 발견해 버리다니. 그것이 말하자면 내게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실수였다. 살인을 표방하고 나선 자에게도 그런 여유가 허용되는가? 그것은 관용이나 법칙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름이 흘러가는 사내의 그 눈 속에 내가 선 채로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구름 저편에 숨어있는 태양을 보고 말았다.

 

구름이, 칼이, , 쓰러지려 한다, 내가.

 

일이 왜 그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내게 그때 가령 눈이 없었다면, 그리고 심장이 잠시라도 펌푸질을 멈췄었다면, 마침내 살인 한 건을 성공했다고 웃음을 씨익 흘리며 돌아설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때의 일은 돌아볼수록 아쉬웠다.

어디서 어떻게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마당에서 갑자기 펄쩍펄쩍 뛰고 있는 미꾸라지를 잡아서 남몰래 숯불에 구어 먹을까 말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끝내는 잡지 못하고 소낙비를 핑계로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의 아쉬움과는 종류가 다른 뭔가 참을 수 없는 미련이 내부에서 나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랬다. 사내의 눈에서 흘러가는 구름과 함께 흘러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그 순간에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느 순간 번뜩이다가 사라진, 구름의 사이로 한순간 강렬하게 쏟아진 그것이 결국은 내 심장을 관통한 칼끝이었던가 보았다.

고백을 해야겠다. 나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무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나는, 그가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그저 죽여야 할 인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과 사람의 차이는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이었고 그는 내가 죽여야 할 인간이었다.

백 번을 생각해도 나는 착하고 그는 나쁜놈이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이해하지 못한 채 구름 속의 칼을 먼저 봐버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그의 가슴에 칼을 깊이 찔러 넣기는 고사하고 그 앞에 온전한 자세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후들후들 떨고만 있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오늘을 기다렸어. 누군가 나를 죽여주는 그 날을, 내가 나를 죽이기는, , 그 일은 너무 어려운 작업이야.”

 

그는 낡은 오토바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만큼이나 생의 피로에 그을리고 지쳐 있었다. 어쩌면 여름날의 외투처럼 쓸데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고독이라고 하는, 스스로는 벗어버리기 어려운 그 무거운 것을 그는 누군가 벗겨내 주기를 고대하며 그때까지 오토바이를 몰고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온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의 관계를 가령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을 한다면,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는 쪽은 필경 가해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피해자가 그것을 알아버린다면, 모르면 좋겠지만 어쨌든 가해자의 고통을 피해자가 알아버린다면, 그때부터 가해자의 고통은 피해자에게 전이되어 피해자 스스로 가해자인지도 모른다는 혼란에 빠져버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목을 길게 빼서 내게 내밀고 있었지만, 나는 칠 년여 동안 벼려온 칼날을 꺼내보지도 못했다.

 

베풀어봐. 선행을, 나를 죽여주는 보시를 베풀어 보라구. 왜 못하나.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비겁하군.”

그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비겁하다.

돌아서지 마. 돌아가지 말고 뜻을 펼쳐봐. 당당하게 펼쳐보란 말이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는가. 너는 내가 죽임으로 해서 가볍게 영생을 하겠지만 나는 너를 죽임으로 해서 마음에 철갑옷을 걸친 채로 한평생 허덕허덕 비탈을 올라가야 할 것이다. 아니었다. 이것이 아니었다.

죽여야 할 사내를 죽이지 못하고 돌아설 때 한 생각이 창끝처럼 뇌수를 찔렀다. 진즉에 버렸어야 할 몸뚱이었구나, 내가, 너무 오래 간직해 왔어, 이 남루한 몸뚱이를, 그러자 갑자기 죽음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한 십여 년 연락이 끊겼던 오랜 친구가 신 새벽에 무서리를 밟고 마당으로 들어서서 어이 친구 일어나, 감성돔 낚으러 가게, 하는 것 같았다.

 

되도록이면 깔끔하고 고상하게 죽고 싶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울어주는 이 없이, 아무도 나의 주검에 손을 대지 못 하게,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조차 나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하게 오월의 아지랑이처럼 눈이 부시게 조용히 죽는 것이 그나마 내가 내 자신에게 차려야 할 예의라 여겨졌다.

깔끔한 죽음의 방법에 관한 연구는 내 나이 열 살 이후 스물 살 이전 시절에 많이 해두었었다. 눈앞에 뭔가가 보이는데도 그것이 무엇인 줄을 몰라 허둥거려야 했던 시절, 꽃도 같고 나비도 같고 무슨 도깨비도 같이 현란하기 짝이없는, 그러다가도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리는, 없다가도 어느새 나타나서 손으로 와락 나꿔채면 손에 가득 잡힌 것 같지만 펴보면 아무것도 없는, 그 지독한 갈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죽음이었다.

 

파격과 배신이라고 하는, 이를테면 어머니의 돈을 훔친다든가 나를 의지하고 싶어 자신의 젖가슴을 내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누님의 가슴에 슬픔의 송곳을 박아놓고 달아나는 따위의, 죽음보다는 다소 복잡한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우회로도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때는 생각만 열심히 해두고 실천은 못한 채 가출로 뚜껑을 닫아 버렸던 죽음의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를 이제 비로소 활용하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감격스럽기도 했다.

내가 내 무덤을 파고 나를 묻는 것은 사치가 아니고 잔망스런 객기도 아니다. 자살에의 염원을 무슨 귀걸이나 반지처럼 끼고 다니던 시절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래, 묻어야지, 묻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