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추억
"넌 키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런 질문을 받고도 순간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위대하다. 당황하지 않았다 해도 곧바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는 찌질하다."
그녀의 저작 <키스의 힘> 중에서
키스를 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모아서 활용하면 인간을 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마른 갈대숲을 지나니 불에 탄 무덤들이 보인다. 누군가 담배꽁초라도 던졌던 모양이다. 바람이 차다. 내 뒤에서 물이 들어온다. 물은 짠 내를 풍기며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를 지나 구불구불 갯고랑을 익숙하게 잘도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물은 아래로만 흐르는 게 아니다. 달이 차 오르고 해수면이 임산부처럼 둥글게 솟아오르면 고요하던 물은 갑자기 광포해져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위로 올라간다. 그럴 때의 물은 이미 물이 아니다. 물의 그런 변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물 속의 고기를 낚는다고 나섰다가 물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아까부터 개 한 마리가 따라온다. 나를 따라오는 것인지 물을 따라 그냥 올라가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신경이 쓰여서 걸음을 멈추고 녀석이 먼저 지나가 주기를 기다렸지만 녀석도 멈춰 선다. 나를 따라오고 있었으면서도 나를 따라온 게 아니라는 투로 갯벌 쪽을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다가는 아예 뒷다리를 접고 차분히 자리를 잡더니 나를 쳐다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나는 결코 녀석의 눈을 쳐다보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녀석의 행동이 예사롭지가 않다. 나도 저처럼 그렇게 다리를 접고 차분히 앉아 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구경하라는 뜻인 것일까? 개는 갯고랑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는 물거품들을 보면서 그것을 즐기겠지만 나는 그것을 보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들 것이다.
나는 개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슬그머니 돌아섰다. 가능한 한 노을도 보지 않고, 물을 따라 날개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갈매기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갈대숲에서는 아직도 바스락바스락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소리는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을 것이다. 갈대숲 전체가 나를 따라 이동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두려움도 많고 장난기도 심한 누이와 나의 정혼녀는 이렇게도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돈다. 그러고 보면 바람은 언제나 그녀들의 편에서 그녀들의 삶에 훈수를 주고 있었던 것도 같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늦가을의 어느 날 정혼녀는 자신의 죽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검은 숫염소를 끌고 갈대숲을 가로질러 경사가 심한 산으로 들어갔다.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한 손에는 염소의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에는 칡넝쿨을 휘어잡고 정신없이 비탈을 올라가는 그녀의 선홍빛 치맛자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누이는 그 시간에 블라우스 단추를 모두 열어놓은 채로 갈대들 사이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식칼을 갈고 있었다. 독이 올라 그 무렵에 막 누런빛을 띠기 시작하는 억센 갈잎이 누이의 희고 보드라운 젖가슴이며 허벅지를 베어 여기저기 도처에 토막난 실낱처럼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그때 내가 정혼녀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발견하고 산비탈을 향해 달려가던 중이었는지 누이를 찾아 갈대숲을 뒤지던 중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누이는 바로 앞에서 칼을 갈고 있었고 정혼녀의 치맛자락은 그새 산을 넘어가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고 정혼녀가 사라져 버린 비탈 쪽을 올려다보면 환청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오토바이 소리가 귓속에서 가득 부르릉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이건 내가 아니잖아. 이렇게 돼버린 내가 나는 싫어, 싫단 말이야.”
누이는 달처럼 둥글게 솟아오른 자신의 배를 칼등으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칼을 가고 있었는지 누이의 손과 발목은 뻘에서 방금 나온 사람처럼 잿빛을 띠고 있었다.
“너 지금, 그 칼로 뭐 하려고 그래?”
“끄집어 낼 거야. 난 싫어. 내가 이렇게 되는 거 난 싫단 말야.”
“바보야, 식칼은 공양간에서나 쓰는 거야. 이리 줘.”
“싫어. 가까이 오지 마. 난 오빠를 찌를 수도 있어.”
“식칼은 김치를 썰거나 냉이를 캘 때 쓰는 거야. 사람을 찌를 수는 없어.”
“오빠는 못해도 난 할 수 있어.”
“좋아. 그렇다면 내가 해 줄게. 그건 네 몸이야. 네 몸을 네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야. 몰라?”
죽음이 누이를 유혹한 것은 아니었다. 누이는 삶의 희열은 알아도 죽음의 도도한 매력은 아직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인 구조에 대해 잠시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었다.
일찍이 그녀를 유혹하고 희열에 들뜨게 한 것이 그것이었다. 자신이 여자라고 하는, 분홍빛 속옷을 걸치면 나비처럼 가뿐하게 섹시해지는 그녀 자신의 신체적인 구조가 그녀를 유혹했을 뿐이었다.
“길 가다가 소나기 한 번 되게 맞은 셈으로 치려무나.”
뒤틀리거나 일탈된 생명을 많이 치러온 어머니는 담담한 어조로 누이를 달래고 위로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더불어 슬퍼하며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려본 웅숭깊은 보살에게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의 곁가지는 물론이고 그 뿌리까지 속속 들여다본 어머니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피가 뜨겁고 잔망스러웠다.
나는 누이가 갈숲에서 갈아놓은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을 화선지로 겹겹이 싸서 가방에 넣어두고 때를 기다렸다. 잠자리에 들면 내 자신의 숨소리가 오토바이 소리로 들렸다. 음식을 씹어도 내 입안에서 귀로 전달되는 그 소리가 오토바이 소리로 변해 버리는 환청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검은 숫염소를 끌고 산을 넘어 읍내로 들어간 나의 정혼녀는 열흘 만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열흘 동안 잠은 한숨도 안 잔 것 같았다. 어디를 잘못 건드리면 이내 쓰러져서 다시는 못 일어날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녀의 육체 깊은 곳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틈입했다는 것을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것은 누이의 배를 불러 오르게 한 것과 동일한 유전인자를 가졌을 것이었다. 안 그래도 저놈이 수상한데, 아주 수상해, 오래 전부터 의심을 갖고 별러오던 참이었다. 길이건 길이 아니건 아무 데나 멋대로 자기 식의 길을 뚫어가며 부릉부릉 소리를 내고 다니는 오토바이의 사내. 정혼녀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검은 숫염소는 그 사내의 길양식으로 소비되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배가 불러 오르기 전에 길을 나서기로 했다. 딴에는 서둘러 뒤를 쫓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서둘렀다. 그러나 마음만 분주하게 움직일 뿐 몸은 마음에 미치지를 못했다.
고통이 극에 달하는 누이의 해산을 보고 난 뒤에서야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길을 나섰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칠 년이 걸렸다.
나는 걷고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내는 우리고장을 떠날 때 이미 어느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곳에 영혼의 은신처를 따로 마련해두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칠 년여의 세월을 투자해서 찾아낸 것은 죽여야 할 그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의 가죽일 뿐이었다.
피안.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어쨌든 그 인간은 그때 내 가슴속의 보잘것없는 식칼 한 자루 따위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산이며 들이며 세월을 지나 유유자적 무엇인가 조롱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언제 버려도 아쉬울 것 하나도 없다는 투의 그런 빈 푸대자루 같은 몸뚱이 하나로만 그 인간은 달랑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죽여야 할 그 인간은 그렇게 칠 년여 동안이나 집요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나를 유인해서 나로 하여금 내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끔 상황을 조성해놓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 그랬는가. 그랬는가. 그랬다. 그런 것 같았다. 그 인간이 소지한 교묘한 흉기에 의해 내 자신이 살해되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나는 그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칠 년여 동안이나 그의 뒤를 추적한다고 추적했지만, 그 인간은 내가 흉내도 낼 수 없는 정교한 살인기술을 개발해놓고 마치 한여름 밤의 도깨비불처럼 멀리서 매혹적으로 깜빡거리며 저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을 유인해서 서서히 죽여 오고 있었다는 지독한 패배감으로부터 나는 좀처럼 자유롭지가 못했다. 그 인간은 그렇게 아주 지능적으로 나를 죽여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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