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나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죄를 안다>
<죄는 밖에서 오고 벌은 안에서 나온다>
<환경은 나를 나도 모르게 죄인으로 만들고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죄를 심판한다>
<나를 죄인으로 만든 것은 타인이지만 나의 죄를 심판할 권리는 오직 나에게 있다>
<나는 나의 죄를 심판할 자격을 갖는다>
<타인은 그 누구도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 죄의 유무를 거론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한 문장씩 대충 음미하면서 나는 혜련이의 아파트로 갔다. 그런데 그녀는 뭐를 잘못 먹었는지 크게 변해 있었다. 그 며칠 사이에 그녀의 블랙홀은 파괴되어 버렸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제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나는 물론 나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현관 신발장 옆에 쪼그리고앉아 울고있는 여자를 모르는 체하고 밖으로 나와버린 나의 잘못은 사실 컸다. 그렇게 나갔다가 사흘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네였다.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도 <지금 이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거였다. 나는 어안이벙벙해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이라니. 뭐가 어째서 마지막이란 말인가.
그날 밤새도록 코를 킁킁거리며 집 안을 돌아다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럴 리는 없다고 나는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후각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설마하니 오 분도 채 머물지 않고 떠난 진후의 냄새를 맡았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설령 냄새를 맡았다 해도 그렇다. 그녀와 진후의 관계는 과거의 일일 뿐 현재를 구속하는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아무 말도 못했다. 현실을 해부하고 나를 해명할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만일 약간이라도 시간적인 여유를 나에게 주었다면 나는 아마 정신을 수습하고 어떠한 방식이 되었건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고자 노력을 했을 터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어리둥절해서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흡사 미친 여자처럼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더니 식칼을 들고 왔다. 그것도 칼끝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거꾸로 들고 왔다.
“가세요. 가시고, 다시는 오시지 마세요”
그녀는 식칼의 끝을 자신의 목에 바싹 들이대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차 잘못 움직이면 식칼의 뾰족한 끄트머리가 그대로 그녀의 살거죽을 밀고 들어가서 절개한 다음 식도 깊숙이 힘차게 들어갔다가 뒷덜미 쪽으로 관통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자기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그녀의 식칼보다는 그녀의 그 가시라는, 가시고 다시는 오시지 마시라는 극존칭어가 한없이 멀고 두렵게 느껴져서, 쭈볏쭈볏 뒷걸음을 걷다가는 현관 문턱에 걸려서 무릎을 한 번 꺾고, 일어서자마자 돌아서서 정신없이 달려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내 귓속에서 마치 장마철의 개구리 울음처럼 시끌거렸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어째서 개구리 울음소리로 치환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우리는 어린 시절 교과서를 통해 개구리 울음소리를 배웠다. 작은 개구리는 개골개골 울고 큰 개구리는 개굴개굴 우는 것이라고. 최영장군이 어떻게 왜구들을 물리쳤는가를 배우듯이 개구리는 어떻게 우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배웠다. 이를테면 수학공식을 외우듯이 개구리의 우는 법칙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구리는 이제 영원히 개골개골 아니면 개굴개굴로 울어야 했다.
내가 만일 그 시절에 개구리는 어떻게 우나요? 라는 내용의 시험지를 받고 마지막마지막이라고 썼다면 선생님은 틀림없이 빵점을 주고 덤으로 체벌까지 내렸을 것이다. 아무튼지 혜련이한테 그런 끔찍스런 위협을 당한 뒤로 내 머릿속에 입력된 개구리의 개굴개굴 소리는 마지막마지막으로 치환되어갔다. 혜련이를 생각하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귓속을 헤집어놓을 듯이 시끌거리고 그러면 혜련이의 얼굴이 갑자기 개구리로 변신해 버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명사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찾아가서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을 정도로 나는 그 말이 싫다. 그렇지만 아우야, 나는 여기서 그 단어를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마지막이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것 같다. 내가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아내의 배란일자에 맞춰 집을 찾아갔던 날 아우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형님은 형님이면서도 왜 형님답게 처신을 못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동생한테 뭔가 좋은 충고도 좀 해 주시고 그래야잖아요. 십육 년이나 연하인 동생이 왜 십육 년이나 연상인 형님한테 이런 식의 충고를 해야만 하죠?”
저녁도 꽤 늦은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수돗가에서 발을 씻고있는 나의 곁으로 너는 소리없이 다가와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이라기보다 일종의 낭독에 가까웠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어떤 사건의 판결문을 읽어 내리는 재판관의 음성이 어쩌면 그런 음색일는지도 모르겠다.
희미한 달빛 속으로 들려오는 너의 나직한 음성이 내 가슴을 달구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나는 사실 형이 형다운 게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단지 십육 년이나 연하인 아우가 별안간 대견스럽게 여겨졌을 뿐이었다.
그날 밤에 우리는 처음으로 한 자리에 앉았다. 삼각형의 구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나는 아랫목 앉았고 너는 윗목에 앉았다. 나의 아내이자 너의 형수인 대서사의 딸은 뒤란문 쪽으로 앉아서 과일 깎았다. 방 안의 불빛이 너무 환한 탓이었을까.
바깥에서와는 달리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나는 아우가 새삼스럽게 대견하다고 여겨져서 방으로 불렀을 뿐 특별히 할 말은 없었다. 얼결에 너를 방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나는 아우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침묵은 일견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이런저런 의미없는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과일을 먹었다. 그때에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가 핵심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또한 핵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의미없는 얘기들을 한두 마디씩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으로 의미있는 것들을 반추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무엇을 의미롭게 돌아보고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마는 아마도 혜련이를 보고 싶어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너의 형수를 쳐다보고 싶어했을 것이고 너의 형수는 자신의 답답한 운명의 갈피들을 넘겨보고 있었을 것이다.
“형님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너는 무슨 얘기 끝에서인가 불쑥 물었고 그래서 나는 아마 “글쎄, 너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되물었을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것을 새로운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도 혁명의 공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쎄다. 나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구나”
아우야, 그날 밤 우리의 그런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있었을 것이다. 크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그런 식의 대화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얘기나 노닥거려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 속에서 나는 다시금 혜련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나는 네가 그만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품을 했다. 아내는 고개를 반쯤 수그린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뭔가 초조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너는 뭔가 안타까워하는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네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보여준 자신없어 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에 너의 그런 심사를 조금이라도 눈치채거나 혹은 읽어줄 만한 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내가 두번째 하품을 했을 때 너는 마지못해 하는 자세로 일어섰다.
기억한다. 그날 밤 나를 바라보던 너의 안타까운 시선을. 아우야, 너의 그 눈빛을 새로이 떠올린 것은 혜련이에게 <버림>을 받고 여기저기 며칠인가를 떠돌다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기차를 탄 그날이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으로 기차를 타기는 탔지만 그러나 집으로 곧장 들어갈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그래서 읍내의 중앙공원을 배회하다가 안면있는 사람들과 부딪쳤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삼표양초 오백 자루와 구절초꽃 백여 다발을 특별히 주문해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버지 몰래 집으로 들여갔다는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30
일 년여만에 다시 찾은 고향에서 너는 그렇게 하나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흰쥐를 상대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싸움을 벌였다고 하는 너의 그 이야기를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은 듣고 있지 않았다. 얘기를 듣고있는 어느 순간 홀연히 떠올라온 그날 밤 너의 그 얼굴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차마 입이 열리지를 않는다는 투의 그 안타까움......
그렇다. 아우야, 나는 무수히 떠도는 너에 관한 소문들을 취합한 뒤에서야 그날 밤 네가 나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핵심을 알게 되었다. “형님은 형님이면서 왜 형님답게 아우를 대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아우한테 충고를 들어야 하느냐”는 너의 그 한 마디 속에 참으로 많은 말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나는 결국 혜련이한테 버림을 받아야 했던 셈이다.
아우야. 어른들은 대부분 너를 이야기할 때 “인성이 파괴된 자”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네 또래의 젊은이들은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타인일 뿐이다.
타인이 타인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인들 못할까. 타인은 타인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지시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것이다. 그들과는 한 발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나는 그러면 어떤가. 그들이 모르는 이야기 한 대목을 알고있는 나는 아직 너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 역시 여느 기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너를 <인성이 파괴된 새끼>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알관된 침묵이 나의 그러한 견해에 어떤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나 말해야 옳을 것이다.
아우야, 너의 하숙방에서 발견되었다는 한 통의 속달우편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 편지를 발견했다는 네 친구의 얘기에 의하면 너는 집으로 내려오기 이틀 전에 이미 하숙방을 정리해놓고 있었다. 평소의 너답지 않게 옷가지들은 옷걸이에 꿰어서 가지런히 걸어 놓았고 일기장을 비롯한 개인의 <비밀문서>들은 모두 없애 버렸다. 그리고 책을 모두 꺼내서 방 한가운데에 세 줄로 높이 쌓아놓고 시위현장에서 마스크 대용으로 사용하는 손수건을 겸한 커다란 보자기로 덮어씌운 다음 그 위에다 가장 민감한 비밀문서라고나 할 수 있는 편지 한 통을 올려놓았다. 누구든지 그 방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제일 먼저 그 편지를 발견할 수 있게끔 너는 그렇게 치밀한 계산을 해놓고 있었다.
도련님,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제 몸에 아이가 생겼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저는 지금 가슴이 너무 뛰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오세요. 와서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이 짤막한 내용의 속달우편을 개봉하기 직전에 너는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었다. 너는 다음날 있을 대규모 <전투>에 학과의 대표로써, 소위 주동자 중의 한 사람 역할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루 온 종일 마라톤 회의에 참석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돌아온 참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서클룸이든가 총회 사무실 따위 발을 뻗을만한 곳 어디 아무 데서나 잠시 눈을 부치고 말았을 터이지만 너는 그날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예감 때문에 하숙으로 돌아왔다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하숙집의 마루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바꿔 주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바꿔준 전화기 속에서 아버지는 너와의 모든 인연을 끊는다고 하셨다.
만약에 얼굴을 보이면 그 즉시 권총을 꺼내겠다는 쓸데없는 말씀 한 마디까지도 아버지는 후렴처럼 덧붙이셨다.
<사자의 큰 고함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선(禪)가의 싯귀가 무색할 정도로 너의 가슴은 충격에 어지간히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최후통첩은 예사로울 수가 없었다. 입술을 씰룩이며 천장을 쳐다보는 감상의 시간은 비록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너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떠올리며 슬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언제까지나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는 몸이었다.
<인륜>과 <대의>의 틈을 열고 밀려오는 슬픔을 감출 요량으로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너에게 하숙집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아까 낮에 편지 왔었어. 속달이래여. 도장은 내가 찍어줬구......”
31
아우야, 기도하는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 기차의 흔들림에 따라 흔들거리고 있는 너의 모습을 나는 지금 본다. 요 며칠 사이 벌써 몇 차레인지 모르겠다. 너는 그렇게 무시로 나를 찾아오고, 나는 그렇게 무시로 너를 찾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다. 이야기는커녕 서로의 눈을 마주본 적도 없었다.
너는 언제나 고개를 약간 수그린 자세로 말없이 거기 어디에 앉았거나 혹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너에게로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고 먼발치에서 너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득히 먼산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먼 산과 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인가 그날의 장면들이 떠올라온다. 내가 목도하지 않은 그날의 장면들이, 마치 그날 내가 거기에 있었던 듯이나 생생하게 떠올라온다.
거기에는 물론 네가 있다. 어느 장면에서나 너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너는 그날 오후 3시쯤에 기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즉시 읍내로 들어와서 슈퍼와 꽃집을 번차례로 방문했을 것이고 슈퍼와 꽃집의 주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너는 중앙공원으로 올라가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귀신고개 근처 어디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한가롭게 짹짹이던 참새들이 부산을 떤다 싶은 어느 순간 참새들의 기척은 사라지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중앙공원에서 읍내로 다시 내려왔지만 그러나 아직은 초저녁이었다. 시간을 좀더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너는 어깨를 움추린 채 거리를 서성이다가는 다소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계를 보았다.
우리집의 저녁 식사는 일곱 시로 정해져 있었는데 네가 들여다본 시계는 일곱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는 이제 설거지에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는 수첩을 꺼내서 한참 동안 뭔가를 적어넣은 다음 집으로 향했다. 전통 한옥 구조에 서양식의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인 집 근처에 당도했을 때 너는 어깨를 더욱더 움츠렸다.
가슴이 뛰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바로 저기에 있건만 높은 담장과 육중한 대문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전할 것은 전해야 했다.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서울에서 부랴부랴 내려온 이유가 소멸되는 것이다. 너는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써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밤톨만한 돌멩이 두 개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놓았다. 걷다가는 좌우를 살피고, 담장으로 훌쩍 턱걸이를 했다.
봐야 할 사람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너는 심호흡 한 다음 돌멩이를 던졌다. 두 개를 다 던질 필요도 없었다. 한 개를 던지고 두 개째 던지려고 하는 순간 창호지 저편으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돌멩이가 떨어지고 그림자가 나타나고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은 거의 동시였다. 그림자의 행동은 민첩하고 또한 신중했다.
너는 그림자를 쳐다보며 허공에다 손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크게 그렸다. 동그라미를 발견한 그림자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너는 전달사항이 적힌 수첩을 뜨락으로 홱 던지고는 담장에서 내려섰다.
아버지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열시 정각이었다. 어머니는 대개 아버지보다 삼십여 분쯤 늦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숙면을 취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을 너는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다시금 시간을 죽였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얼핏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러나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날 때마다 너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를 잇따라 뿜어내면서 너는 담배연기 사이로 어른거리는 너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그림이 담배연기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러나 갈피를 잡기는 어려웠다. 몇 살 때 어떤 일이 어디서 있었는지 너는 알 수가 없었다. 뒷뜰의 빨래줄에 걸려있던 성숙한 여인의 속옷을 몰래 걷어다가 밤새 들여다보고 있는 너 자신의 모습을 너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어느 시기의 일인가는 알 수 없었다.
윤리의 시작과 끝이 애매한 것과 마찬가지로 너의 시간은 그렇게 헝크러져 있었다. 요컨대 너의 사춘기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너는 다만 까닭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흥분과 그리고 안타까움으로 점철돼 있는 너 자신의 사춘기를 기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처럼 뒤엉킨 기억 속에서도 한 가지 기억만은 뚜렷한 경험으로 남아 있었다.
하기는 그렇다. 누추하나마 이름을 붙이기로 하자면 <첫경험>이라고나 할 수 있는 그날의 일을 너는 아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은 네가 고등학교 삼 학년이던 그 해의 십일월 초, 그러니까 너 자신의 장래 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심한 언쟁을 벌이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법대를 지원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완고함에 맞서다가 지친 너는 차라리 가정대를 지원하겠다는 말로 아버지의 심기를 바싹 돋아놓았다.
아버지의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고, 때에 맞춰 흰쥐가 머리를 내밀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흰쥐의 번뜩이는 눈초리가 항복을 요구하는데도 너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그대로 앉아계실 수만은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너의 귀뺨을 올려부쳤고, 너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한달음에 마당을 가로질러 데문 밖으로까지 나섰지만 그러나 너는 멀리 가지는 않았다.
사실 너는 달리 갈만한 곳도 없었다. 네가 갈 곳은 그때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중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였겠지만 너는 사사로운 일로 마음이 괴롭거나 아버지와의 의견충돌로 불만이 분출할 때는 으레 형수를 찾았다. 그날도 그랬다. 대문 밖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운 너는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와서 형수의 방으로 갔다.
“형수님, 저 차라리 죽어버릴래요”
“도련님도 차암,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씀을 다 하세요”
“쓸데없는 말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진정하세요. 진정하시고 저하고 얘기 좀 해요”
너의 형수는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네가 초등학교 오륙 학년 무렵부터였겠지만 너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피고 귀여워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사실 가까이에 있는 도련님을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피고 귀여워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만한 일이 없었다.
먹을 갈아 묵화를 치는 것도 하루 두세 시간이면 족했고, 밥하고 빨래하는 작업 역시 하루 네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잠자고 화장하는 시간을 여덟 시간으로 잡는다 해도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하루가 하루도 변함없이 스물네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는 게 그녀에게는 아마도 지옥이었으리라.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준 사람이 도련님이었다. 어느 하루 뒤뜰의 빨래줄에 널어두었던 속옷 한 벌이 감쪽같이 없어진 뒤로 도련님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도 했지만, 그림자는 그림자로 남아있지 않고 시나브로 희망의 빛이 되어갔다. 없어진 속옷 한 벌의 은밀한 힘은 컸다.
자신의 속옷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용도로 쓰여질까에 대해 그녀는 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러자 예전에는 없었던 수줍음이 그녀의 마음에 생겼다. 예전에는 남자가 아니었던 남자를 남자로써 상상하고 난 뒤에 생긴 수줍음,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련님 곁으로 바싹 다가가게 해 주었다.
그녀는 내심 당혹스러웠지만 저절로 다가가는 마음을 잡을 수는 없었다. 도련님은 이제 그녀의 아들 같은 존재이기보다 친구 같은 사람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마음을 기대일 수 있는 어떤 기둥이랄까 믿음 같은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국화주 한 잔 떠다 드릴까요”
그날 밤 그녀는 어미를 살짝 올리는 식의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 평면적으로 말했다. 그때에 그녀의 머리는 아득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그녀에게 평면적인 관계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을 터이었다. 국화주는 어머니가 담궈놓은 아버지의 술이었다. 뒤뜰 감나무 밑에 묻어놓은 항아리 속에는 항시 국화주가 있었다. 그날 저녁 며느리는 그렇게 대범하게도 시아버지의 약주를 떠다가 도련님에게 먹였다. 아버지와의 언쟁에서 파생된 마음의 격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도련님은 몇잔의 국화주에 취했다.
그날 저녁의 잠자리는 두 사람 모두에게 두려움과 떨림과 평온함과 아늑함과 살을 에이는 아픔과 그리고 오랜 방황에서 마침내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안도의 한숨소리 등등 온갖 것들로 버무러졌을 것이다.
너는 그날의 일을 생각하다 말고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또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가까웠다. 슈퍼와 꽃집에서는 약속대로 삼표양초와 구절초꽃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집에서는 또한 형수가 대문의 빗장을 빼놓고 있었다. 너는 가을 달빛이 빚어놓은 처마의 그림자 속으로 합류해 들어갔다.
초저녁에는 개가 짖었지만 이제 개는 짖지 않았다. 처마의 그림자를 따라 뒤채로 다가서고 있는 네 앞으로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었다. 이어서 여인의 부드러운 손이 너의 목을 감싸안았다. 너는 여인의 얼굴에 입을 맞춘 다음 여인의 몸을 가볍게 밀어냈다. 너에게는 아직 준비한 물건들을 방으로 옮겨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너는 의아해하는 형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양초와 구절초꽃들을 한아름씩 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형수님, 형수님하고 저하고 오늘 혁명을 일으킵시다”
옮길 것을 다 옮기고 방으로 들어선 너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지꺼리고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혁명이라는 용어가 그처럼 아무 데서나 쓰여질 수 있는 것인가? 형수는 어안이벙벙해서 도련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혁명이라니요, 도련님......”
“혁명이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이 되어있을 때,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를 죄인의 길로 인도해 낸 그 어떤 대상을 향해서 내가 뿜어내는 불꽃인 것입니다, 형수님”
“도련님의 말씀은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건가요?”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의 의식을 갖고있는 건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불꽃을..... 꼭 그래야만 하나요?”“
“제 생각으로는 그래요. 꼭 그래야만 해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수는 없나요?”
“다른 방법이라면, 설마하니 형수님께서는 멀리 어디로 도망을 놓자는 생각으로 저를 부른 건 아니겠죠?”
“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아이가, 아이가......”
“뱃속의 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떳떳한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겁하면 뱃속의 아이도 비겁해져요”
“아,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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