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집으로 가져온 초아
코보는 초아가 집으로 가져온다는 학교가 굉장히 큰 무엇일 거라고 생각했다. 크지 않더라도 최소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무엇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아가 가져온 것은 노트 한 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트 한 권도 아니고 노트 석 장이었다. 노트 한 권에 설계도와 설명이 그려져 있고 씌어 있었다. 그것이 딱 석 장이었다.
열람실에 있을 때 소리가 들렸다. 사서 아줌마가 기쁜 목소리로 “어머 초아네, 정말 오랜만이야.”했고, 뒤를 이어 초아가 “안녕하세요, 코보 여기 있지요?” 했고, 다시 사서 아줌마의 목소리가 “저기, 열람실에.” 했다.
코보는 그 모든 소리를 듣고서도 못 들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숭을 떨자는 것은 아니었다. 초아의 목소리만 들리면 항상 그랬다. 육체의 어떤 부위가 갑자기 기능을 잃고 정지해 버리곤 했다.
“어이 코보 선생, 이것 좀 볼래?” 초아는 다짜고짜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그런 뒤에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코보는
초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노트를 한 장 넘겼다. 초아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아무리 그래도 내 얼굴은 한 번 보고 해야지.”
“건들지 마. 나 지금 바빠.”
“오, 그러셔? 그럼 열심히 하던 일 하셔.”
소리와 함께 초아는 사뿐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정말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서 아줌마가 뭐라고 한 마디 했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정답게 뭐라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정말로 나가 버리네?
코보는 은근히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앉은 채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동네 뒤에 있는 작은 약수터와 동네의 전체적인 모양을 그린 그림이었다. 약수터에서 집까지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다음 그림에는 집 주변의 골목과 집안 마당의 풍경이 장독대와 개나리꽃 나무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그림에는 마당의 개나리꽃 나무 앞에 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울타리가 쳐진 웅덩이 안에서 오리 다섯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코보는 그림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노트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나, 누나, 초아누나, 우리 마당에다가 연못을 파는 거야?”
사서 아줌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은 초아는 웃지는 않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벌써 얘기가 다 된 것 같았다. 사서 아줌마가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그러니까 수돗물을 쓰면 물값 부담이 많으니까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약수를 끌어들인다? 야아, 정말 좋은 아이디어다. 대단해. 초아는 정말 대단해.”
사서 아줌마는 연신 웃어대며 박수를 쳤다. 그러다가 문득 정색을 하고 나섰다.
“그런데 말이야. 뒷산의 약수를 어떻게 마당에까지 끌어들이지?”
“물은 일단 길을 찾으면 높은 곳을 만나도 스스로 오르고 내리고 하거든요. 고무호스를 묻을 거예요.” “아, 고무호스. 거리가 꽤 될 텐데?”
“제가 대충 계산해 봤는데요. 천 미터도 안 돼요. 기술적으로 하면 육백 미터 정도에서 끝낼 수도 있고.” “기술적이라면 어떤?” “골목을 따라서 하게 되면 구백 미터 안팎쯤 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웃 주민들의 협조를 구해서 그 집 옆이나 마당 그리고 담장 밑을 가로지르게 되면 오백 내지 육백 미터 정도에서 끝낼 수 있어요.”
“그렇다 치고, 그러면 땅을 어떻게 파지? 인부를 사야 하나?”
“아뇨. 코보와 제가 할 거예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한 달이면 돼요.”
“둘이서? 그 힘든 일을?”
“힘 안 들어요. 겨울에 얼지 않을 정도로만 호스를 묻으면 되니까. 그리고 저는 돌이나 콘크리트를 자르는 그라인더도 쓸 줄 알아요. 그래서 가져왔어요. 사실은 용접도 할 수 있거든요. 요번에 배웠어요.”
“세상에, 용접을? 그것도 다 배워?”
“사람이 하는 일은 다 배울 수 있다는 철학으로 대하면 못 배울 게 없어요. 저는 뭐 용접은 아직 전기용접만 할 줄 알고요. 산소용접은 아직 못 배웠지만 곧 배울 거예요.” “아이구, 힘들겠다. 숙녀가 별 것을 다 배우네, 이제 보니. 대안학교가 그런 데였구나아?”
“힘 하나도 안 들어요. 그리고 우리는 대안학교라고 안 해요. 진짜 학교라고 하지. 사실은 학교라는 말도 잘 안 써요.”
“그러면 뭐라고 해?”
“연습장이라고도 하고, 훈련원이라고도 하고, 단련장이라고도 하고, 그때그때 어울리는 말을 골라서 쓰죠. 다들 자기가 알아서 하고 싶은 과제를 선택하고, 선생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약간의 조언만 하실 뿐이거든요.”
“그나저나 마당에다 오리 연못을 만들자면 돈도 꽤 필요할 것 같은데? 내가 뭐 협찬할 것은 없을까?”
사서 아줌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초아가 즉각 나섰다.
“일단 고무호스는 돈 주고 사야 되고, 이웃집 담을 손댔을 경우에는 시멘트도 약간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이모가 맡아서 관리하는 제 돈이 있으니까 조금, 아주 조금만 빼서 쓰면 돼요.”
“그게 무슨, 안 돼. 그건.”
초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코보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돈 있거든. 아줌마, 저 또 가불해 주세요.”
코보는 얼결에 말을 해놓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가를 알았다. 살짝 창피하기도 하고, 면목이 없기도 했다. 절로 고개가 수그려졌다.
“넌 맨날 아줌마래지? 결혼도 안 한 내가 아줌마니? 나쁜 남자.”
사서 아줌마는 억울하고 얄미워 죽겠다는 투로 눈을 하얗게 흘겨가며 툴툴거렸다. 그러다가는 죽는다고 웃어대었다. 한참을 큰소리로 웃어대다가 문득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가불이 아니라 정식으로 보수가 나갈 거야, 이번에는.”
고맙습니다, 기어드는 소리로 코보는 한 마디 했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초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마음이 급해서 다리가 마구 꼬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초아는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가자. 이제부터 실사를 해야 해.”
“실사? 실사가 뭐야?”
“현장을 둘러봐야지. 그래야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지.”
“알았어, 얼른 가자.”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코보는 걸음을 멈추고 초아를 보았다.
“근데 학교는 어디 있어?”
“학교?”
“아이 씨이, 학교를 가져온다고 했잖아.”
“넌 여태 뭔 얘기를 듣고 있었냐?”
“뭐?”
“네가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 그 안에 학교가 있는 거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지만,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고 중이기도 하거든.”
“이잉, 시시해. 뭐야 이게.”
“넌 시시할지 몰라도 난 안 시시해. 아주 중요해. 내가 선택한 과제가 그것이니까. 난 이번 일로 리포트를 써야 하거든. 너도 그게 왜 중요한지 차츰 알게 될 거야. 세상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거든.”
코보는 눈을 깜빡깜빡 하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초아는 오른쪽 손을 내밀어 코보의 왼쪽 손을 잡았다.
“누나, 천억 곱하기 천억이 몇인 줄 알아?”
“그런 것은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야.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고.”
“뭐야.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넌 지금 은하계의 별을 말하고 싶은 거지?”
“어? 누나도 알고 있었어?”
“천문학자들이 말하기를 우리 눈에 보이는 은하계에 천억 개 이상의 별이 있고, 그런 은하계가 또 천 억 개 이상이라고 말했을 때 그 천억은 1,2,3,4, 할 때의 그런 천억이 아닌 거야.”
“그럼 뭐야?”
“생각을 그만큼 넓게 해야지만 뭐가 보여도 보인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상상을 해야 한다는 거. 공주가 자기네 아버지를 살리는 약수를 구하기 위해 온갖 종족의 아이를 낳고, 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절대로 죽는 법이 없이 낯선 곳을 끝없이 여행하는 것처럼 말이야.”
“에이 그건 바리공주 이야기잖아.”
“천억 개의 별을 품고 있는 천억 개의 은하계와 바리공주 이야기는 같은 거야. 왜냐하면 바리공주는 지금도 천억 개 이상의 은하계 어디쯤에서 아이를 낳고 있거나 약수를 찾고 있을 테니까.”
“나도 가고 싶다. 약수를 찾아서.”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동네로 들어서면서 끝이 났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차린 뽀야가 쪼르르 달려 나오면서 왈왈대고 있었고, 촉새 아줌마가 뽀야 뒤를 따라 나오면서 “저년은 집에 왔으면서 집에도 안 들어오고 사내꼭지나 쫓아다니고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어쩌고 그렇게 속사포를 쏘아대는 까닭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나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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