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그녀는 앵무새처럼 웃는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그 무슨 시니컬한
모노드라마 속의 배경 음악 같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누군가를 비웃는 투의,
조롱하는 투의 목소리가 그야말로 일인극 배우의 그것처럼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저게 무슨 짓일까. 왜 그럴까. 아이고 참말로 우스워 죽겠네.
아니 왜 가만히 와서 엿보고, 엿보다가 내가 보면 얼른 도망가고,
내가 안 보는 체하면 또 와서 엿보고, 차암 못 났다. 못 났어.”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정리해보면 이런 말이 된다.
그가 왔다.
나를 엿본다.
엿보임을 당하는 내가 그를 보는 순간 그는 달아난다.
처음에는 내가 그 소리에 완전히 속았다. 용산의 참사와 연쇄살인범에 관한
뉴스가 연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고 있었던 까닭에 섬뜩하기도 했다.
혹시, 혹시? 에이 설마. 그러다가 생각은 결국 그녀를 데리러 온 누군가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다른 그 누구도 볼 수 없고 오직
때가 된 사람의 눈에만 띈다는 그이, 내심으로 그런 존재를 상상하며 나는
침울했다.
드디어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는가?
하지만 아니었다. 사태를 예의주시해본 결과 텔레비전 화면이 그녀를 흔들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텔레비전 화면이 어둠 속에서 창문에 되비쳐 그녀의
상상을 부추기고 있었던 거였다. 화면이 바뀔 때, 그러니까 화면이 바뀌는 그
순간이 그녀의 눈에는 당신을 엿보던 그 누군가가 얼른 돌아서는 순간이고,
새로운 화면이 펼쳐지면 그 시간은 돌아간 그 누군가가 다시 와서 당신을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텔레비전 화면을 되비쳐주는 유리창이
거울 같은 판유리가 아닌 격자무늬를 중심으로 다른 여러 가지 문양이 혼재된
불투명유리인 까닭에 그림은 하나도 구체적인 것이 없고 추상적이다.
구상이 한시적인 우주의 표면이라면 추상은 우주의 영원한 작동원리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유리창에 비치는 추상을 통해 무슨 원리를
발견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소리를 듣고, 무슨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화사했던 시절은 이제 눈을 감아야만 보인다
그녀는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다. 이 말은 정확하지가 않다.
그녀는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녀는 하루 종일 물과
함께 지낸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적어도 그녀 자신에게는 그렇다. 그녀는 늘 씻고 있고, 그래서
누구보다 깨끗하고, 그래서 더 이상 씻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만 한 번
더 씻는다고, 씻었다고,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항상 그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오래 전부터 그래 온 것도 아니다. 이제
겨우 석 달, 아니 두 달이나 되었는가. 어쩌면 한 달이 채 못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렇게도 그동안 그녀에게 무심했었다.
“얼른 얼굴 씻어요, 밥 먹게.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나 씻었어.”
“언제요?”
“음마, 일어나서 두 번이나 씻었고만.”
누가 봐도 잠자리에서 금방 일어난 행색인 채로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얼굴을 손가
락으로 짚어 보이다가 두 손을 활짝 펴서 내미는 그녀를 보고 있는 내 입에서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만다. 까치집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카락하며
만지면 금방이라도 구겨질 듯한 얼굴에 무슨 그림이라도 그리다 만 것 같은
허옇게 말라붙은 입가의 침 자국 같은 것들이 희극배우를 연상케 해서만은
아니다. 방금 전에 얼굴 씻고 발도 씻은 사람한테 어찌 그리 모진 누명의 씌우
느냐는 투로 정색을 하고 바라보는 그녀의 너무도 진지한 표정에서 나는 그만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명인사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유명인사들의 사리사욕과 관련한 일화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가진 돈이 이십 몇만 원밖에 없다는 담화로
전보다 한층 더 유명해진 전직 대통령 그이는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허망
하게 우리를 웃겼던가. 그 말씀은 지금도 가끔 술자리 같은 데서 언급되며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잠시나마 값진 웃음을 안겨주는 배역을 맡고
있으니 아마도 그 생명은 영원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진지함이 전직 대통령의 그것에 비견할 만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진지함에는 전직 대통령에게서 발견되는 비장한 위엄이
없는 대신 천진무구함이 있다. 위엄과 천진무구는 굳이 분석할 필요도 없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갖거니와, 그녀의 이 천진무구가 나를 통쾌하게 웃게
하고 그리고는 이어서 비장하게 웃게 만드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른이라고 믿고 고개를 숙였던 사람에게서 천진한 아이를
본다는 것은 그 어떤 말로 설명을 해도 일단은 통쾌하고 그리고 비장하다. 이
양가적 감정이야말로 어쩌면 웃음의 근원 같은 것은 아닐는지.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의 주관적인 감정이고 해석일 뿐이다. 한 걸음 사이를
두고 나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집은 모자간에 똑같이 미쳤어, 아니 노망이 들고 말았어.”
만약에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화답해야 할
것이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하지만 감사하게도 아직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 육십대 이하 연령층에서는
할 말 없다는 투로 외면해 버리지만, 육십대 이상 계층에서는 “아이고
어쩌까”하고 혀를 차며 안쓰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짧은
한 마디, 말로는 다하지 못하겠다는 투의 따뜻한 시선에서 나는 매번 까닭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참지는 못한다.
그렇다. 나는 웃을 수 있는 세상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내 귀는 자면서도
열려 있다. 잠 중에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웃기 위해서 열려 있다.
말하자면 나는 항상 웃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 안 자. 내가 무슨, 자고 있간디. 봐봐. 눈 뜨고 있제.”
태중의 아이처럼 잔뜩 구부린 채로 잠든 그녀가 말한다. 아니 혼잣말을
한다. 자다 말고 누구에게 무슨 힐난을 들었던 것일까. 그 소리는 분명 원망
이나 증오와는 전혀 다른, 그렇다고 기뻐서 하는 것도 아닌 마음에 작은 섭
섭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어떤 것. 죽을 정도로 미운 것은 아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미워 죽겠어,
하고 눈을 홀길 때의 그런 것 말이다.
어쨌든 잠결의 그녀는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잠결에서도 웃는다. 웃고 있노
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시냇물처럼 흐르기 시작하고, 마침내 나는 잠에서
깨어 이런저런 상상의 성을 짓고 허물기를 되풀이한다.
그녀는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와서 자애로운 내 어머니가 되었다가 이제
다시금 아이가 되어 저렇게도 천진하게 무구한 꿈을 꾸며 나를 웃겨주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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