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문제가 시대의 화두로 부상한 요즈음 변호사들의 행보가 볼만하다. 과거사 문제가 명쾌하게 정리돼 버리면 어둠에
잠겼을 때와는 달리 변호사들의 업무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부쩍 초조해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서울변협 부회장 유정주씨 명의로 한 지역신문에 실린 미당 서정주에
대한 충고 내지는 변론 또한 예사롭지 않다. 유정주씨에 따르면 미당은 고향 고창을 무척 사랑했단다. 그래서 최소한 고창 사람들만큼은 미당을 놓고
가타부타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한다. 우선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미당에 대한 어떠한 평가를 하느냐, 그에 대한 호 불호의 감정이 어떠느냐라는 주관적 심정을 떠나서 고창 사람들은
미당에 대한 대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각자 가지고 있는 주관적 심정을 액면 그대로 표출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 고창 사람들끼리
고창지역 내에서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서와 같은 모양세로, 그를 탄핵하는 것은 삼가 하였으면 한다. 더욱이 우리 고창 사람들끼리 고창
지역 내에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다른 지역 내에 보다 더 강한 모양세로, 더 앞장서서 그를 탄핵하는 것은
반대한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이런 말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미당 서정주를 비난 혹은
비판하더라도 고창 사람들은 거기에 동조하지 말고 앞장서 손가락질을 하지도 말자. 각자 속으로는 미당을 못 마땅해 하더라도 그 속내를 밖으로
표출하지는 말자.
이것이 서울변협
부회장 유정주씨 명의로 고창의 한 지역신문에 실린 변론의 주요한 결론이요 간곡한 충고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충대충 적당히 비겁하게 살자는
얘기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양씨의 철권통치 기간 중 그런 일 많이
있었다. 속으로는 대통령 욕하더라도 밖에서는 절대 욕하지 말자. 다른 사람들이 욕해도 우리는 못 들은 척 귀막고 눈 가리고 열심히 술이나
마시자.
고창을 사랑했으니 미워하지 말자는 유정주씨의 논리대로라면
미당은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다. 한국을 사랑했기에 이민을 가지도 않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 즉 과감하고 단호하게 살인을 명령한 전두환을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우러러보기도 했다. 뿐인가. '신라초'라는 작품으로 역시 한국의 대표인 대통령 박정희의 고향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아첨을
떨기도 했다. 이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한 사람이니 속내로는 비록 그가 마땅찮더라도 그것을 입밖으로 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모든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대충 눈감고 모르쇠로 넘어가 주어야 한다.
미당의 행위를 용서하고 넘어가자는 주장은 차라리 소중하게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비겁하게 눈감고 귀막고 모르는 체
하자는 논리는 너무도 부당하고 모순에 가득 차 있다. 이는 미래를 걸레로 싸서 대충 방치해 두자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미래는
지금 우리의 것이 아니다. 아직 자라나는 중인 아이들의 것이다. 그들의 미래까지 가불해서 소비해야 할 만큼 우리는 지금 궁벽한가?
중국 근대문학의 거목이요 개혁사상가 루쉰은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패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정쩡한 온정주의로 손을 내밀었다가는 그 손이 덥썩 물리기 십상이다. 이완용이며 송병준 등등 그 후손들이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벌이는 재산찾기 소송은 그들이 뻔뻔해서라기보다 아무 짓도 못하는 우리의 푼수 같음에서 오는 밑져야 본전식 이벤트다.
현대 사회에서 변호사란 회계사나 공인중계사와 마찬가지로 자본을 축으로 움직이는
이익집단 내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적어도 대중들의 변호사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되어 있다. 과거에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일정 부분 양심과
결부되어 있다는 대중들의 인식이 있었기에 그 사회의 충고자 내지는 조언자를 자임하고 나설 수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바뀌었다. 아니 적어도
바뀌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얼마 전 새로 취임한 대한변협 회장의
불만은 우리 시대 변호사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그는 말했다. 여러 말을 했지만 요약하면 하나다. 변호사의 특권적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사법개혁을 중단해달라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보장해준 작은 틀 안에서 끼리끼리 크게
먹고 잘살겠다는 것이다.
개혁을 두려워하는 세력,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 변호사들의 모습이다. 이런 사상으로 엉뚱한 충고까지 하고 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고향이기에 나온 충정이라 해도, 사람이 해서 좋은
말이 있고 해서는 절대 안 되는 말이 있다.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미당 서정주를 어떻게 생각하냐?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유정주씨의 충고대로라면 비루하게 히죽히죽 웃어넘기거나 혹은 "아 나 지금 바쁜데" 하고
얼른 빠져 나와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