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바보 코보(8)
아줌마의 난초 그림 같은 목선
점심을 먹은 뒤에 코보는 오리 상자를 망태기에 넣어 등에 지고 손에는 ‘코스모스’를 들고 철도다리 밑으로 갔다. 오리가 물에서 놀고 있는 동안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한참을 읽다가 멈추고 쟤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궁금해서 오리 다섯 마리를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고, 그러다가 다시 읽기를 되풀이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오리들은 모래톱으로 올라왔다. 이제 막 깃털이 나오는 날개를 파닥거리고 몸을 부르르 떨어서 물기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코보는 책을 덮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오리가 움직이고 있을 때는 손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손을 내밀고 다가서면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대며 달아나 버렸다.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가 아니면 상자에 넣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너희들 오늘 공부 많이 했어? 말 좀 해봐라, 응?”
코보는 졸고 있는 오리들을 잡아서 상자에 넣고 그것을 다시 망태기에 넣다가 문득 큰소리로 물어보았다. 오리들은 그저 삐삐, 소리나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여전히 못했다.
오리는 혹시 아주 어렸을 때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코보는 믿음이 있었다. 이 오리들은 다른 오리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지금은 비록 사람 말을 안 하고 자기들 말만 하고 있지만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있을 것이라는, 그러므로 꾸준히 사람의 생각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그렇게 열심히 정성을 기울이다 보면 오리도 마음을 열고 사람과 의 대화에 나서줄 것이라고 코보는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할머니의 무릎과 종아리를 주물러드린 다음 책을 펴놓고 큰소리로 읽다가 피곤해서 그만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천장에서 갑자기 사서 아줌마의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목덜미가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되풀이했다.
아이 참, 어디서 봤지?
코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그림은 더욱 선명해졌다. 도로 눈을 떴다. 천장에 그림은 여전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그림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할머니의 무릎과 종아리를 주물러드리고 도서관을 가던 길에 코보는 흠칫 놀라서 우뚝 멈췄다. 꽃집 앞이었다. 화분 몇 개가 길에 나와 있고, 유리창에는 마치 그려놓은 그림처럼 꽃대를 밀어 올린 난초 화분이 있었다. 그 난초 화분에서 나온 꽃대가 코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늘어진 난초 잎 사이로 우뚝 솟아오른 꽃대가 살짝 구부러지면서 꽃이 피어나는 바로 그 휘어진 부분이었다. 그 휘어진 부분이 낯익어서 한참을 보고 있는데 사서 아줌마의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코보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어대며 후딱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난초의 휘어진 부분에서 연상된 사서 아줌마의 목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코보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이건 아니야, 아니야, 소리가 가슴에서 메아리를 쳤다.
그럼 뭐지? 어디서 봤지?
난초는 분명히 아니었다. 난초가 그렇게 길고 매끄러운 느낌의 꽃대를 갖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실은 난초 꽃대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어디선가 보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난초라는 생각을 하고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사서 아줌마의 목을 보면서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의 그 주인공이 꼭 난초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면 어디 무슨 그림책에서 본 것인가? 하지만 대뜸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그림책이 없었다.
아이 참 미치겠네.
코보는 침을 삼켰다. 정신없이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정말로 자기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바람에 도서관에서의 시간이 금방 지나 버렸다. 강의실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열람실에서는 또 무슨 책을 꺼냈다가 도로 넣기를 되풀이했는지, 사무실에서는 또 어떻게 안마를 시작했다가 끝냈는지 하나도 실감하지 못한 채로 사서 아줌마의 입에서 나온 “아유 살겠다, 너무 고마워”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근데 말이야. 코보, 돈 필요하지?”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사서 아줌마는 책상 서랍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들고 있었다.
“누나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선불을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누나, 그 말을 듣고 나니 한겨울에 찬물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돌아왔다. 코보는 사서 아줌마가 내미는 봉투 하나를 얼결에 받았다.
“약속한 수고비야. 월급이라 해도 좋고.”
“월급이요?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요?”
“말했잖아. 한 달분 선불이라고.”
“왜요?”
“왜는 무슨 왜야, 코보가 일을 너무 잘해서 선불로 주는 거라니까.”
“그러니까 왜 선불을 주시는 거냐고요. 저는 뭐, 돈 필요하지도 않은데, 그런데 왜요.”
“필요하지 않기는 무슨, 누나가 다 아는데, 그렇잖아. 돈 써야 할 곳이 많잖아. 가장 먼저 전화도 살려야 하고. 요새 전화 없는 집이 어딨다고, 핸드폰도 아니고 집 전화를 요금 때문에 죽여 놓고 있다니 원, 세상에.”
전화, 그 한 마디에 코보는 다시 몽롱해져 버렸다. 온 몸의 열이 머리로 몰리는 것 같았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봉투를 내던지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굳어 버렸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은 벌렁거리고,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있었다.
“화 났나보네. 화 났어?”
“아뇨. 화 안 났어요.” “화 내지 마. 누나는 그냥 순수하게, 응? 정말이야. 돈 필요하잖아, 그렇지?”
“아이 씨이, 누나라고 하지 마요.”
“앗, 깜짝이야. 화 풀린 거지. 응? 그렇지? 생각해봐아. 전화가 죽어 있으니까 불편하잖아.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겨서 코보가 도서관에 안 나오면, 그때는 누나가 또 찾아가야 하는데 누나는 그게 힘들단 말이야.”
“알았어요.”
금방 울 것 같은 소리가 나왔다. 코보는 자신의 목소리가 몹시 못마땅했다. 견디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갈게요.”
코보는 봉투를 손에 든 채로 홱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왔다. 나온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도서관을 가나봐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실제로 도서관을 안 갈 자신은 없었다. 집으로 들어선 뒤에야 그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목덜미, 아줌마의 그 목을 안 보고도 살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자신이 없는 거였다.
어깨를 주무를 때마다 탄성을 지르는 사서 아줌마의 그 목소리가, 그 감탄사가 할머니의 그것과는 또 다른 면이 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살아서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아주 신나는 무엇이 있었다.
할머니의 감탄사에서 느끼는 기쁨은 언제나 슬픔이 살짝 깔려 있었지만, 사서 아줌마의 감탄사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무엇인가 신명 같은 것이 휘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야,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