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1)

두꺼비네 맹꽁이 2021. 1. 25. 10:43

 

소리

 

자기가 죽는 일시를 명확하게 아는 자는 행복할까?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내 나이 일곱이던가 여덟 살 무렵 그런 내용의 토론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토론은 아니었다. 갑자기 죽은 누군가의 추도행사를 끝낸 뒤에 몇몇의 스님과 유가족 그리고 남녀 불자들이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심상하게 주고받는 얘기를 곁에서 열심히 경청한 것일 뿐이다. 그 나이에 무슨 할 일이 그렇게도 없어 죽음에 관한 얘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던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스무 살 즈음의 어느 날 나는 가슴에 시퍼런 식칼을 품은 채로 버스 안에서 책을 읽다 말고 책갈피에 이렇게 쓰고 있었다.

 

개가 식탁에 오를 날짜를 통보 받고 그것을 기억한다 해도, 그래도 개는 아마 먹이를 놓고 동료들과 쟁투를 벌이는 치열한 정열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굳이 개가 되어볼 필요는 없으리라. 사람의 슬픔은 죽음을 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뒤를 모른다는 데서 사람의 슬픔은 억울한 누명처럼 극명하게 드러난다. 개는 죽음 뒤에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선험적으로 안다고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개의 행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의 행복이란 먹이를 놓고 치열하게 쟁투하는 것, 지든 이기든, 설령 패배가 예상된다 해도, 싸움의 행위가 개의 행복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죽음에 관한 어른들의 토론을 귀담아 들은 이후로 내게는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딱히 누구를 닮았다고 추론할 수도 없는 그 목소리는 마치 숙주처럼 내 안에서 은밀히 자라다가 적절한 여건이 조성되면 불쑥불쑥 한 번씩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때로 칼을 대면 쩍 갈라지는 잘 익은 수박처럼 머리통이 순식간에 절개되는 헛된 공포감을 유발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밤에 짝을 찾아 헤매는 소쩍새처럼 애끓는 희망으로 몸서리를 치게 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두려움과 슬픔과 처절함 따위들은 나로 하여금 아무 데나 주저앉는 대신 아무 데로나 뛰어가게끔 이끌어준 내 삶의 동력이었다고 여겨진다.

 

돌아서지 말아라.

돌아가지 말아라.

 

그것이었다. 나를 자살하지 않고 열심히 살게 해준 목소리.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를 않았다. 여덟 살 이후로 줄곧 내 의식의 언저리를 떠돌던 이 목소리가 활동을 중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내 삶이 마침내 끝나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그런 결론을 끌어낸 것은 아니었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다하도록 그 목소리가 들리지를 않았다. 끝났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끝나버린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얼마 뒤인가부터 그 목소리가 다시 내 의식에 잡히기 시작했다.

 

돌아서지 말아라.

돌아가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