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예의-관방제림에 관한 추억
가을이군요. 가을비예요. 두런두런 속알속알 속삭이듯이 조용하게 내리는 이 비가 퍽이나 로망틱스럽습니다. 걷고 싶다고나 할까. 걸음에는 뭔가 철학 비슷한 냄새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이 비는 그것조차도 아닙니다. 걷다가 그냥 앉아서 오랜 시간 사람도 무엇도 아무런 그림자를 의식함도 없이 그저 키스나 하면 똑 맞을 듯한 그런 비.
지난 장마의 무지막지한 기억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요. 장마 뒤의 막무가내식 폭염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지난 토요일부터 문득문득 치수의 문제를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관방제림을 보고 난 뒤의 영향 탓이겠지요. 담양에 있는 관방제림 그것은 사실로 내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유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관방이란 官防이요 제림은 提林입니다. 관에서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홍수를 막아냈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물을 관리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니까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은 국가의 중요한 사업이었고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물을 관리하지 못하는 왕은 곧 퇴출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저수지는 국가의 관리를 받습니다. 관리뿐만이 아니지요. 제방을 축조하는 것도 역시 기획에서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국가가 도맡아서 해 왔습니다. 따라서 굳이 관에서 했다는 식의 명칭까지 붙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담양의 그것은 굳이 관방제림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그 명칭을 접했을 때 무지하게도 옛날 공무원들이 손수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서 둑을 쌓고 기념으로 나무를 심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설익은 강아지 뭐 어쩐다더라고 글자만 놓고 어설피 해석을 했던 것이니 참 하품 나오는 상상력이었던 것이지요.
내가 어렸을 적에 울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큰 비가 내리면 마을 사람들이 집집에서 한 명씩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물길을 트거나 막는 노동인데 임금이 없었지요. 저수지를 축조할 때도 그런 식의 울력으로 노동력을 동원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벽골제다 뭐다 하는 저수지들도 다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어이없는 시스템이 수천 년 동안 가동해 왔습니다.
수세 또는 물세가 그것이지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 저수지의 물로 농사를 지었으니 물값을 내라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수천 년 동안 국가의 명령 대로 물값을 내며 농사를 지어 왔습니다. 고부의 조병갑이 같은 인간은 한 번으로도 모자라서 물값을 두 번 받으려고 헛발질 하다가 결국 갑오농민혁명에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은 실패했지요.
그래서 물값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고 역사와 함께 최근까지 작동했습니다. 내 기억에 따르면 물값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세 개 마을 단위로 한 명씩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인력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도 아마 천문학적인 액수였을 겁니다. 이 천문학적인 비용은 당연히 굶어죽는 농민들이 부담했던 것이겠고요.
이런 어이없는 시스템을 퇴출시킨 것이 농민운동이고, 농민운동에 이론적 근거와 현실적 힘을 보태준 것이 대학생들의 농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군수와 시장들은 이장을 동원해서 농활팀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온갖 잔머리를 굴렸지요. 그러나 역시 잔머리는 잔머리, 그런 잔머리가 얼마나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아, 이야기가 한참이나 옆길로 빠져 버렸군요. 담양의 관방제림은 이렇게도 내게 약간의 흥분과 수다스러움을 주고 있습니다.
연인원 삼만 여명의 농민들을 동원해서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는데 관례대로 울력이라는 이름의 노동력 착취를 하지 않고 임금을 지불했다는 것, 그래서 명칭도 명실상부하게 관에서 사업을 했다는 뜻의 관방제림이라 했다는 것. 이만하면 충분히 흥분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때는 바야흐로 중국에서 북학의 같은 실사구시 학문이 들어오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관례를 따르지 않고 동원한 농민들에게 임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아마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요새말로 하자면 개혁파 중에서도 이른바 극좌파들이나 그런 일을 과감히 단행할 수 있었을 텐데 글쎄요, 당시의 부사 이름은 기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필경은 많은 고생을 했겠지요.
이 대목에서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면앙정 반듯한 마루 위에 사내가 하나 반듯한 자세로 누워서 기대승이다 고경명이다 하는 이름자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의 머리를 받혀주는 다리 하나가 있군요. 여자입니다. 요컨대 사내는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나, 저 아래서 사람들이 올라옵니다. 두 사람은 부끄럽고 민망해서 후딱 일어나 먼 산을 보지요. 그런데 올라오던 사람들도 부끄럽고 민망하다는 듯이 후딱 등을 돌려 내려가 버립니다.
관방제림을 축조할 당시 담양에 살았던 농민들이나 공무원들은 아마도 최소한 이 정도의 가슴은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을비에 젖은 자의 청승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