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어머니에게서 배운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여. 너 쌀 있냐? 한 가마이 가져갈래?"
"먼 쌀을요, 쌀이 어디
있다고."
"아 있응게 가져가라고 허제."
"논 한 마지기 없는 집에 먼
쌀이다요?"
"지랄헌다, 아 논 없으면 쌀도 없으란 법이라도 있다냐?"
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마을 이장 생활 십오년 만에 논이고 밭이고 다
없애고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으로 근근히 연명해 온 어머니시다.* 그것조차도 환갑을 넘어서부터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포기하고 버려진 땅에
땅콩이나 한줌씩 수확하는 걸로 당신의 건강을 겨우 증명해 오셨다. 그런데 쌀이라니.
"먼 쌀인지는 몰라도 저 쌀 있어요."
"그짓말 허고 있네. 아 도둑질 한 것
아닝게 얼릉 와서 가져가."
"그짓말 아니에요. 저기 김제 사는 후배가 한 가마 가져 왔다니까요."
"그려어?
그러믄, 그려라."
어머니는 그렇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즉각 전화를 끓어버리신다. 처음의 신명이 난 듯한
목소리와는 현저하게 다른 풀죽은 목소리다. 자식들이 뭔가를 달라고 하면 좋아서 얼굴에 꽃이 활짝 피고, 필요 없다고 하면 섭섭해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이 고개를 떨구는 어머니다. 심근경색으로 덜컥 쓰러지셨다가 수술 받고 깨어난 뒤로 자식들의 반응에 더욱 민감해지셨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그 쌀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가져오기로 했다. 그런데 다른 일 때문에 바로
가지는 못 하고, 열흘이나 뒤에 갔더니 쌀은 이미 없어진 모양이다. 아마도 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와서 가져갔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주신
것이겠지만, 그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덮어놓고 돈 팔만원을 내놓으신다.
"너 이놈 갖고 아산 농협에 가서 잉, 한 포대 사서
가져가라."
"네에?"
"왜야?"
"아, 다 큰 자식놈이 늙은 어머니한테 돈 받는 법도
있다요?"
"지랄헌다. 늙은 것은 뭐, 에미도 아니라냐?"
"에이, 그게 아니고요."
"아니고
뭐고 얼른 받어. 이거 그냥 생긴 돈이여."
"뭔 돈이 그냥도 생긴다요?"
"머시냐 저기, 불우이웃돕기라고, 나 수원 가서
며칠 있을 때 이장이 전화로 물어보더라, 그리서 통장 번호 불러주었더니마는, 와서 본게 팔만원이 들어왔더랑게."
입이 안 열린다. 할 말이 없어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이제 얘기 끝났다는 듯 돈
팔만원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바늘질거리를 챙기신다. 이웃에서 누가 반코트를 주었다는데 그것이 몸에 맞지를 않아 북북 뜯어 가지고 다시 바늘로
꿰매는 중이시다. 그나저나 저 돈 팔만원을 어떻게 지혜롭게(?) 거절할 것인가. 어머니는 자식의 그런 속내를 이미 알아봤다는 듯 돈을 툭 쳐
보이며 한 번 더 채근을 한다.
"아 얼른 집어서 넣어."
"어머이, 어머이는 환갑도 넘고, 칠순도 넘고,
그런데도 혼자 계시니까 불우이웃이 되지만 자식은 아직 환갑도 안 넘었어요. 그러니까 그 돈은 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어머이가 써야 맞는
거예요. 이치가 안 그러겄소?"
"쓸잘데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넣어. 나는 그거 아니라도 있어. 정부에서도 나온당게.
볼래?"
어머니는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주섬주섬 가방이며 서랍이며 뒤적이더니 통장
하나를 꺼내들고 활짝 펴 보인다.
"봐라 여, 생계비가 얼마냐, 삼만원이냐, 그리고 또, 경로 머시냐, 이것이. 응,
경로우대다, 경로우대가 얼마냐."
"에이 됐어요. 됐어. 미치겠네 그냥."
"왜야? 왜
미친데?"
"아이 누가 들을까봐 챙피해서 그렇죠."
"음마마, 무시 챙피해야?"
쌍심지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때 어머니의 표정이, 꼭 그랬다. 쌍심지. 삼사십대 젊은 어머니라면
그 표정은 썩 무섭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그 쌍심지를 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나온다.
"그럼 안 챙피해요? 늙으면 뻔뻔해진다더니, 그 말 하나도 안
틀리네."
"염병하네. 내가 도둑질 했냐? 어째서 챙피하데?"
"어머이는 그게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불우한
이웃이 되어 도움받는 것이?"
"자랑은 무슨, 자랑할 것도 없던가보다."
"그럼 왜 자꾸 그런 얘기를 해? 사람
부끄럽고 면목없게."
"그것이 왜 부끄럽데? 해도해도 안 되면 얻어먹기도 하는 것이 사람인 것이제. 도둑질보다는 몇천
배나 낫겠다. 이치가 안 그러냐?"
해도해도 안 되면 얻어먹기도 한다......말문이 막힌다. 도둑질보다야 몇 천 배 낫다는
대목에서는 더더욱 입이 무거워진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다. 침묵은 곧 수긍의 의미가 되고, 그렇게 되면 불우한 이웃 어머니에게
주어진 돈 팔만원은 꼼짝없이 자식의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 그래 쓸데없이 아무 말이나 입에 올리고 만다.
"어머이, 국가라는 것은 말이에요. 당연히 그런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예요."
"오살헌다. 이날평생 뺏어가는 법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그런 법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다. 옛날 같으먼
나 같은 사람 진작에 굶어 죽었어야."
섬뜩하다. 어머니의 직관은 이만큼이나 예리하다. 뺏어가는 법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주는 법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이 말을 어리석은 책상물림 식으로 표현하자면 "합법적인 착취시스템이 있었더니라"가 된다.
누가 이런 어머니를 어리석다고, 무식한 농사꾼일 뿐이라고 말해 왔던가. 자식은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돈 팔만원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화장실이라도 가는 척 슬그머니 일어나서 빠져 나오는 것밖에는, 어머니를 설득할 그 어떤 합리적인
논거도 자식에게는 없다. 돌아보면 자식은 그 동안 줄곧 어머니를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그런 농사꾼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오, 이
부끄러움이라니.
사족----문득, 돌아보니 그렇다. 태어나서 한 십여년은 줄곧 어머니가 없으면 못 산다고, 열심히 쫓아다니며 아양을 떨다가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몰라, 어머니는 모른다니까, 하는 식으로 그렇게 어머니를 바보로 여기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정말로 바보처럼 인식해 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