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뭔 일이냐
아침 여섯시. 커피 대신 더불이살이차 한 잔을 들고 마당을 서성거린다. 동쪽 하늘에 옅은 구름이 갈라지며 햇발이 비치기 시작한다. 채송화가 부풀어 오르고, 수련 몇 촉이 문을 열고, 어리연이 참쌀처럼 뽀얗게 수면 위로 올라오고, 이름만큼이나 잘 생긴 옥잠은 이슬을 흠뻑 머금은 채로 고고하다.
그런데 저건 또 뭐냐.
사과다. 사과꽃이다. 이런, 이런, 네가 지금 피는 계절이더란 말이냐?
어제 저녁 무렵에도 못 본 것들이다. 한 송이도 아니고 두 송이도 아니다. 아직은 어린 나무라지만, 가지마다 사과꽃이 봉오리를 맺고 어떤 것은 이미 피어 있다. 십이월에 개나리가 피는 모양은 더러 봤지만 이런 것은 또 첨이다.
“으엿.”
어안이 벙벙하다는 기분으로 팔월의 사과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기합 소리가 날아온다. 목사의 기도하는 소리다. 저 양반은 기도도 참 묘하게 하신다. 동네가 거의 다 들릴 큰 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하다가 느닷없이 으엿,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꼭 태권도장이나 무슨 그런저런 운동선수들의 기합 소리 같다.
무당은 일 년에 한 번씩 자신이 지정한 이른바 신산으로 가서 기운을 받고 온다고 한다. 저 목사님은 어쩌면 날마다 아침마다 저기에서 기운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아닌가?기독교적 관념으로 보자면 기운을 받는다는 것은 미신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뭐 그냥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순간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로서는 괴롭다. 기합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저 목사 양반은 시시콜콜 틈만 나면 남의 살림을 간섭하려 든다. 저 나무는 반듯하게 전지를 해 버리지 않고 왜 멋대로 자라도록 놔 두느냐. 기왕 연못을 팠으면 더 깊이 하지 왜 일 미터도 안 되게 놔 두느냐. 등등 기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시비거리가 목사의 눈에는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말대꾸를 했고, 다음에는 그저 가볍게 미소나 짓고 말았지만, 이제는 짜증스럽고, 가끔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역겨움 같은 것이 밀려든다. 나는 목사의 사생활을 일체 간섭하지 않건만 그는 왜 나를 간섭하는가. 여기서 나는, 어이없고 안타깝게도, 미국을 생각하고야 만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그 위대한 세계관을 말이다.
처음 저 목사님을 뵈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날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가 말했다. 군산에서 뭔가 일을 좀 해보려고 땅을 사천 평 사서 갔는데 주민들의 반대운동으로 애를 먹었댄다. 그런데 그 반대운동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삼 년을 못 견디고 다 망해서 거지가 되었댄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목사 자신은 그 사람들을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절대로 없었다고.
“정말이에요. 난 절대로 그 사람들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망했거든. 이게 뭐겠어요. 하나님의 역사를 놓고 시비하면 안 된다는 거거든.”
그때 나는 그 목사님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
이런 상태를 정신병리학에서는 일종의 정신병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 정신병은 벼락이라도 맞기 전에는 치유가 어렵다. 옆집의 성교수와 내가 마주앉아 그런 비슷한 얘기를 나누다가 웃고 말았다. 그때 성교수가 말했다.
“잘 나나 못 나나 철학교수 있고, 옆에 문인이 있고, 뒤에 성직자까지 온다면, 야아 이거 뭔가가 되겠다, 난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게, 허허 참.”
아닌게 아니라 그렇다. 이 궁벽한 시골에서, 철학 전공과 문학 전공 그리고 성직자가 한 자리 한 번지에 둥지를 틀고 어울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것이야말로 행복이 넘치고 넘치는 것이겠는데, 쩝, 어떻게 이렇게도 무당보다 더 지독한 무병에 걸린 사람이 와 버린단 말이냐 이거.
이건 뭐 그저 그런 나 개인의 투덜거림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확산된다. 마을에 교회와 기도원 따위 등 부속시설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면서 다른 교회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방에서 뭔가 책이라도 좀 들추고 있을라치면 개가 짖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 말 소리, 부르는 소리가 차례로 이어진다. 내가 지금 다른 일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십분만, 오분만, 삼분만, 아니 아니 일분만,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애를 다하는 그들의 정성이 갸륵하지 않은 바도 아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짜증이 나다 못해 미칠 지경이다. 그들의 얘기를 듣건 안 듣건 그들을 상대로 몇 마디 얘기를 하다 보면 기왕에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던 생각이며 여타의 것들이 죄다 달아나 버리고, 그들을 겨우 돌려보낸 뒤에는 내가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대문을 달기로 했다. 자그만치 석 달간이나 고민한 끝에, 결국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내 생전에 대문 따위가 있는 집을 만들지는 않겠노라고 작심에 맹세까지 했건만, 이토록 허무하게, 이토록 어이없게, 나는 내 결심이며 맹세며를 내던지고 만다.
그런데, 대문을 달고 나면, 그러면 아침마다 들려오는 저 목사님의 기도소리 아니 기합소리 아니아니 고함소리는 그만 들리게 될까? 아니지. 아니겠지. 어쩌면 더 크게 들릴지도 모르지.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이게 사실인지 어쩐지 확실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목사가 저토록 요란하게 기합을 넣어가며 기도하는 까닭은 유교의 잔재를 몰아내기 위해서란다. 교회와 기도원을 신축할 목적으로 땅을 사서 정비한 그 자리가 예전에 정자며 제각 등 유교의 대표적인 건물들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그 망령들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 그토록 요란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미신 중에 미신이겠는데, 쩝 쩝,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아 이제 알겠다. 한국에서 기독교의 신자 수는 매년 감소추세라는 통계가 있던데 혹시나 바로 저런 미신에 사로잡힌 목사님들의 영향은 아닐런지. 어쨌든 나는, 팔월에 피어난 어이없는 사과꽃 앞에서 더부살이차를 마신다. 시게노미 후사꼬, 그녀가 생각나는 것은 또 어인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