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2/幻

비 오는 날의 몽상

두꺼비네 맹꽁이 2006. 7. 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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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고자 길을 나섰으나 바다는 못 본 채 돌아왔다. 돌아온 뒤에서야 내가 바다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군데군데 섬들이 조약돌처럼 박혀 있는 그런 바다를. 그러니까 남쪽의 바다를 말이다.

 그런데 버스에 오른 뒤부터는 바다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애당초 목표가 있었으나 그 목표를 상실해 버렸다면 남은 것은 어리둥절함 뿐일 것이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허둥거리는,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당혹감, 비일상이 내게 주는 낯섦의 끝은 약간의 우울이 동반되는 무료함이다.

 오늘이 어제와 결코 같을 수는 없지만, 그런데도 나는 불현듯 불현듯 그것을 느낀다. 오늘이 어제와 다른 것이 뭐냐? 왜 이래야만 되느냐.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없단 말이냐. 그리하여 길을 나선다.

 그렇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아니다. 비일상의 낯섦을 환호작약하며 즐기던 시기--그래, 그런 시절이 내게도 분명 있었건만, 그라나 지금은 아니다. 아닌 것 같다.

 낯섦을 향해 풍덩풍덩 뛰어들지 못하는, 창의와 개척의 정신이 소진되어 버린, 그런 시기가. 지금 내게 와 버린 것 같다.

 

                                                       2     

 

비가 오는 날에는 가끔 바다를 가고 싶어진다. 그 너른 바다의 수면 위로 떨어지는 물방이 보고 싶다. 작은 구슬 같은, 물고기의 눈망울 같은 물방울, 빗방울, 그것들이 튀는 모습을 나는 가끔 보고 싶어한다. 그것은 마치 공기구슬 같기도 하다. 도처에서 공기구슬이 토도톡 튄다. 어째서 튀는가. 바다는 빗방울을 밀어내는 것인가. 이런 감상적인 의문의 시간들을 지나는 동안 내 가슴은 무언가로 미어진다. 이 미어짐의 정체를 나는 모른다. 모르지만 좋아한다. 모르기에 좋아하는 이 심사는 아마도 개척의 정신 내지는 창의의 정신과 통하는 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기에 좋아하는 심사는 일종의 소유욕망이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돈의 가치와 그 권위를 알기에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의문은 의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만일 돈의 가치와 그 권위를 전혀 모른다면, 그때도 나는 돈을 좋아할까? 내가 만일 사랑의 부드러움과 그 가치를 태어나면서 이미 알아버렸다면, 그때도 나는 사랑을 좋아하지 못하는 것일까, 등등 어리석은 질문과 의문이 쾌속열차처럼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이런 어리석음을 대견하게 여기며 다행스러워했다. 했다. 했었다. 그래, 과거형이다. 과거형.

 

 

                                                         3


 비가 오면 덮어놓고 거리로 나서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있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지금도 가끔은 나가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비를 맞고 난 뒤의 눅눅한 기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슬그머니 포기해 버린다. 이런 식의 머뭇거림은 분명 경험이 내게 준 선물이다. 선물은 선물이되 미덥지 못한 선물이다. 빗속을 한없이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쳐 깜짝 놀라던, 마주오는 사람과 부딪쳐 서로가 미안하고 민망해 하던, 그 시절에 나를 관통하는 고민은 아마도 지구의 끝 아니 우주에 끝에 닿아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시절에 누군가가 내게 별을 따 달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 그까짓 별쯤이야, 하고 있지도 않은 날개를 어깨에 달고 허공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비 맞은 뒤의 느낌을 감당할 자신을 상실해 버린 오늘날의 내 고민은 고민 그 자체에 한정되어 있다. 테마도 없고 주제도 어리버리한, 어찌 보면 고민이랄 것까지도 없는 고민 아닌 고민에 나는 발목이 잡힌 채로 허둥거린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커지고, 다시 나이가 들면서 작아진다는 이론이 이렇게 해서 증명된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사람의 일생이란 결국 꿈과 희망을 팔아서 일상에의 안주라는 좁다란 방으로 들어가는 티켓을 구입하는 행위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나올 법도 하다. 일상에의 안주란 소나무로 짠 관처럼 약간의 향기와 편안한 어둠으로 가득한 잠속이요 꿈속이라는 담담한 인식이 그 뒤를 차지하겠지.

 

 

                                                          4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밤에 보다가 너무 무거워서 포기하고 아침에 다시 보았다. 일본 영화이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조금은 독특한 제목의 영화였다.

 다들 엄마가 있는 세상에서, 고아원의 아이들은 엄마가 없다.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역시 자그마한 남자아이에게 말한다. “내가 엄마가 되어 줄게. 나를 엄마라고 불러.”

 그런데 이 여자아이는, 다리는 있으되 걷지를 못한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장애아,

 이 장애인 여자애와 남자애가 고아원을 탈출하고, 어찌어찌 자리를 잡아 살아간다. 남자애는 취직을 해서 이른바 사회인이 되었지만, 다리가 있어도 그것을 활용할 수 없는 여자애는 홀로 사는 할머니의 손녀가 되어 살아간다. 할머니는 유모차에 불구의 손녀를 태워 아침마다 산책을 하며 책을 주워 모으고, 불구의 손녀는 날마다 그 책을 읽거나 혹은 가끔 자신의 아들을 찾아가서 아들의 부아를 돋우는 게 일이다.
“뭐야. 너 왜 또 찾아왔어?”

 “너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미치겠네. 내가 왜 니 아들이란 말이야?”

 “넌 내 아들이야.”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내게 남은 것은 이런 류의 대화다. 관계 혹은 이름에 대한 메타포.

 관계란 뭐냐. 이름이란 또 대체 뭐냐.

 이것은 시적이면서, 또한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시로부터 출발했으나 정치에서 머물러 있는 관계 혹은 이름은, 아, 그렇다. 적어도 우리의 일상에서 관계와 호칭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슬프다. 매우 슬프다. 눈물을 허용하지 않는 슬픔이기에 매우 슬프다고,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는 모르겠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이런 오만 잡동사니 생각이 똬리를 튼다. 배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