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2/死

너희는 누구냐, 정체가 뭐야

두꺼비네 맹꽁이 2004. 5. 17. 21:47

민주노동당 간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회찬씨가 조선일보 노조 초청강연에서 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최상의 품질"이라는 표현이 유별나게 눈길을 끈다. 이 표현은 여러 말이 필요없이 이문열식 어법이다. 그리고 보수를 자임하지만 사실은 기회주의에 가까운 분들의 수사법이기도 하다.

 

 보수란 전통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민족주의를 지향할 때 그나마 명분을 갖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민족주의는커녕 사대주의자들 뿐이다.  해바라기처럼 힘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 지금은 미국의 힘이 막강해서 그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머지 않아 중국의 파워가 강력해지는 날 마침내 그쪽으로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뿐인가.  지금은 일본이 세계에서 10위권 내에밖에 못 드는 까닭으로 왜놈들 어쩌고 비하식 발언을 하고 있지만 머지 않은 날 3위권 내에 들어가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왜놈>이 <왜님>으로 바뀌어 '왜님들을 본받자' 어쩌고 교훈을 설파하며 친일파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해대게 될 것이다.

 

 기회주의라는 게 딴 것이 아니다. 어제 자기 입으로 했던 말을 오늘 자기 입으로 부정하는 것.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문열씨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일관되게 사대주의자였고 귀족주의자였으며 선민의식으로 뭉쳐진 사람이다. 그의 소설 <젊은날의 초상>을 보면 그는 데모가 지겨워서 방랑을 시작하는 젊은 날의 자기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는 권력의 본질임과 동시에 이문열씨 자신의 선망이기도 하다. 그밖의 여러 작품들에서 그는 아버지의 좌익경력 때문에 자기 자신이 출세를 못해 억울해하는 이미지를 흘리고 있다. 한줌밖에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한 착취세력의 일원으로 편입하지 못해 애달카달하는 사람, 그것이 젊은 날의 이문열씨였고, 오늘날에 와서 그는 권력의 맛을 한껏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겠다, 그는 엄석대처럼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혹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문학적으로 그는 요 몇 년 사이 급속하게 몰락한 것이 사실이다.

 

  한줌밖에 안 되는 착취세력에게 존재기반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기가막히게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피착취세력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다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이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배운대로 그냥 빨갱이 어쩌고 몰아부치기나 한다.

 

사회학 전공자들은 흔히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노예근성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은 적어도 근성까지는 아니다. 그들은 다만 착취세력들이 주창해온 정치선동에 마취가 된 것일 뿐이다. 마취는 이른바 의식화교육을 통해 풀려지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이 부치는 가난한 사람들은 의식화의 현장에 접근할 기회마저 봉쇄되어 있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사세 불리하면 재빠르게 다른 길을 찾아나서지만 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까닭으로 다른 길을 찾기는커녕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요컨대 재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경상북도의 농민들은 약간의 예외도 없지는 않지만 가난해도 엄청 가난하다. 그쪽의 농민들은 2004년 오늘날에도 저 육칠십 년대에나 사용하던 소가 끄는 쟁기로 농사를 짓는다. 트렉터를 사용할 줄 몰라서 쟁기를 쓰는 게 아니라 땅뙈기가 워낙 좁아터진 그야말로 손바닥만씩하기 때문이다.

 

 전라도 쪽에서는 그런 땅뙈기들 이제는 경작지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칡넝쿨이 우거진 묵전으로 그냥 방치하거나 산소를 이장하는 데 쓰거나 아니면 관상용 소나무 따위들을 심어버린다. 그러나 경상도에서는 아직도 그런 땅을 문전옥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의미있는 경작지로 활용한다. 그 생활은 당연히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쪽 분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한나라당이 빈부해소에 관심을 갖는 당이던가?

 

그렇다면 빈부격차 해소에 관심을 갖는 당으로 알려진 민노당에서 나서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가 못하다. 말은 좋아 진보정당이지만 예전의 당수가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했던 그 진보정당과는 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에서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반수 이상이 화려하기만 할 뿐 설득력은 떨어진다.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했겠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이상만 있을뿐 현실을 보는 눈이 없다.

 

 자 보라. 과연, 과연이다. 노회찬의 조선일보에 대한 "최상의 품질" 운운한 발언은 우발적이 아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빨랐다는 감은 있지만 적어도 그 발언의 의도만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원래가 그랬던 사람들이다. 다함께 잘 살자는 헛된 구호와 깃발 아래에서 <끼리끼리 어떻게 잘해보자>는 저마다의 동상이몽을 꿈꿔왔던 사람들이다. 기회주의,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 유명한 기회주의를 본다.

 

 관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엘리트의식에 젖은 사람들의 전매특허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용할 양식 수준의 것은 되어준다. 사람이 조만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이상은 이론정치와 예술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실정치에 몸담은 사람의 입에서 그런 식의 말이 나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

 

우리는 아직 고통이 모자란 건가? 더 많은 고통이 필요한 건가? 그래서 저런 사람을 국회로 보내게 된 것인가?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가 어떠한 신문인가를 말하지는 않겠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이 공식적으로 <공적>으로 규정한 신문을 "최상의 품질"이라고 찬양한 것만 놓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리하여 이렇게 묻자. "도대체,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정체가 뭐냐?"

 

 조선일보가 "최상의 품질"이라면 다른 신문들은 최중이거나 최하라는 얘기가  된다. 사실로 그러하냐? 아니면 노무현이 싫고 힘도 없어서 힘있는 <한나라>와 <조선>에 기대기로 했던 민주당을 모방하고 싶어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