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2/자살금지

슬픔과 분노를 기회로 활용하자

두꺼비네 맹꽁이 2004. 2. 19. 06:49

1

 

 

죽어버리는 용기를 갖지 않은 바에야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살다 보면 화를 내야 할 때가 있다. 화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는 존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화를 내야만 하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왜 화를 내는가? 그저 살아 있으니까 덮어놓고 화를 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부당하니까 바꿔달라는, 혹은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보다 강화된 형태가 화라는 것은 뭐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기왕 화를 낼 바에는, 뭔가 요구를 할 바에는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되면 좋고 안 되도 뭐 상관없다는 식의 안일한 인식으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격을 갖춰야 한다. 아무가 아무에게나 화를 내는 건 코미디도 저질급 코미디다. 경찰관에게 붙잡힌 도둑놈이 화를 내는 상황을 상정해보자. 

 

 지금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는 이승연 사건의 본질은 엉성한 각본이 만들어낸 코미디를 닮았다고 여겨진다. 그런 엄중한 사건을 놓고 코미디 운운한다고 꾸짖는다면 당신도 B급 코미디언이다.  나는 앞서 아무가 아무에게나 화를 내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을 좀 더 심화시키자면 아무렇게나 화를 내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어떤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논리가 있는 법이다. 개인의  논리가 다중의 논리와 충돌했을 때 다중은 그것의 철회 또는 개선을 요구한다. 개선의 요구는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순수성을 갖춰야 한다. 억압적이거나 당파성이 깔린 요구로는 행위 당사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 

 

 일례로 전두환씨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자. 그는 아직도 자기의 행위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도 그의 가슴에 감동을 주지 못했다. 스스로 뭐가 어떻게 잘못 되었는가를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는 감동만한 게 없다. 감동이 없는, 다중의 힘에 의한 억압적인 요구는 반발을 낳는다. 때문에 그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언제인가 때가 오면 고토를 회복하리라, 하는 앙심을 품고서.

 

 생각건데 이승연과 그 일행들은 아마도 초조했던 것 같다. 작년이던가부터 둑터진 흙탕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여자들의 벗은 몸뚱아리 사진에 열광하는 <우리들>을 보면서 초조해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할 법하다. 이제 시작하자니 뒷북을 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고, 그래서 아마 역사를 이용해보자는 그들 나름의 이를테면 누드도 그냥 누드가 아니라 확실한 테마가 있는 누드를 겨냥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이승연과 그 일행들은 역사를 배우지 못한 세대였다. 그들이 잡은 컨셉은 제법 그럴싸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위안부 문제를 기존의 그것과는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역사를 다루자고 덤빈 그들이 역사에 대해 무지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교육이 얼마나 안일하게 당파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발견할 수 있다. 친일의 후예들이 정부의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연 같은 몰역사적 사건은 얼마든지 예정된 일이었고, 앞으로도 유사한 사건은 알을 낳는 닭처럼 당연하게 반복될 것이다.

 

 이승연의 나이가 몇이더라. 어쨌든, 그래도 사오 십대의 연령층은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인한 혼란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역사를 보는 눈이라도 키울 수 있었지만, 그 아래 세대들은 그것도 아니다. 동아리방 같은 데서 나름의 의식화를 거치지 않는 한 그들의 역사에 대한 깊이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시험용일 뿐이었고, 그리고 시험이란 건 철저하게도 당리당략에 따른 교육 프로그램에 근거해 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망언이다 어쩐다 입에 거품은 물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거품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는 곧 역사가 아니던가.  제대로 정리된 역사가 없는 터에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이승연사건에 가장 방방 뛰는 쪽은 이른바 친일파의 후예들로 분류되는 언론그룹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아마 가장 분노하는 척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이승연과 그 일행들의 개인적인 망동쯤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 같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그들의 전통적인 수법에 말려들지 말자. 그들은 화를 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화를 내면 낼수록 이승연과 그 일행들은 감동받지 못한다. 감동은커녕 억울해나 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감동시킬 것인가, 그들에게 없는 역사의식을 어떻게 새롭게 정립해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해줄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아주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친일인명사전 하나 정부 차원에서 편찬할 수도 없게 되어 있는 현재의 구도를, 친일의 경력이 살짝 포장되고 가려진 채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어쩌고 하는 훈장을 거의 강압적으로 받아챙겨 가문의 영광으로나 삼는 인사들을 교육의 이름으로 가르치며 선전하고 있는 이 누더기 같은  현실을 확실하게 뜯어고치는 기회가 지금 우리 앞에 와 있다. 이 호기를 놓칠 것인가, 살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