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쓴맛이 향기로운 계절의 이런생각 저런생각
두꺼비네 맹꽁이
2003. 4. 10. 19:49
바람이 분다. 그냥 비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미안한, 그래서 봄비라고 해야
딱 어울릴 법한 그런 비가 내린 뒤의 날씨가 청량하다 못해 쌉쌀하다. 마당
에는 보라색의 풀꽃들이 그득하다. 이 계절에 피는 풀꽃들은 노란색의 민들
레와 하얀 곰밤불이 냉이 등등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보라색 계통이
다. 노란색과 보라색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어떤 환상을 심어준다
는 점일 것이다.
그나저나 마당에 풀꽃이 그득하다는 건 뭐냐. 어른들이 보시면 기함을 할
일이다. 사람이 사는 집 마당에 이것이 왠 풀들이란 말이냐, 하고 지팡이라
도 휘두를 법하다. 이 문제가 나를 은근히 괴롭게 한다. 며칠 전부터 풀꽃을
보는 재미에 취한 나는 마당의 풀들을 그냥 두고 싶다. 그냥 두는 것은 내
자신의 정서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방 상식에는, 특히 어른들의 상식
에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문제가 또 그렇다. 어른들이 마당에 풀을 용납하지
않거나 혹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정서가 메말라 버려서? 이건 너무 속
이 텅 빈 답변이다. 그러면 정서가 너무 풍부해서? 이건 거의 말장난에 가까
운 답변이다.
문명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문명이란 풀이를 하자면 삶을 규격화하는 것
이다.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저래야 하고, 삼강오륜이 어떻고 육도삼략
이 어떻고, 그러니 그것은 형식적으로 보자면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한다.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는 문명과 반문명의 대결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문명
의 실체를 이만큼 적실하게 보여준 사례도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굴
러온 돌이 박힌 돌을 몰아낸다는 우리의 속담은 칼날 같다. 인디언을 몰아내
고 그들의 땅을 차지한 미국인들의 침략의지는 어쩌면 숙명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기는 콜롬부스 이래 침략에 대한 매력은 서양인들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깊다. 그들은 그것을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이란 다른 말로 하면 과학이다.
중국 사람들은 화약의 원리를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불
꽃놀이 같은 낭만적인 용도로 화약을 사용했다. 그 화약이 서양으로 흘러들
갔을 때 서양인들은 그것으로 총을 만들고 대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총
과 대포로 동양을 위협하고 식민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이 항상
내세운 것이 바로 문명이다.
너희들은 미개하고 무지하니 우리가 문명화시켜
주겠노라.
얘기가 너무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 다시 풀꽃 얘기로 돌아가자. 마당에 제
멋대로 자유롭게 피어난 풀꽃들을, 그것들을 그대로 놓고 보는 것이 내 즐거
움이기는 하지만, 행여라도 어른들이 게으른 놈이라고 나무랄까봐서, 그런
게으른 놈을 마을에 둘 수 없다고 떼를 지어 몰려올까 겁이 나서 풀꽃들을
이를테면 문명화(?)시키기로 했다. 정원사가 나무를 전지하듯이 부분부분 솎
아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뭐냐. 풀밭에 앉아 풀을 뽑으려고 허리를 굽히니 싸아한 냄
새들이 코를 찌른다. 아니다. 이런 때는 코를 찔렀다기보다는 코를 간지른다
는 표현이 적실하겠다. 그렇다. 실로 싸아한 냄새들이, 코를 간질이는데 이것
이 뭔가 하고 살펴보니 더덕이다. 여기서 저기서, 앞에서 뒤에서, 더덕들이
풀들 속으로 그 연하디연한 새순을 밀어올리며 마치 신고라도 하듯 싸아한
냄새를 날리고 있다.
오 년 전이었다. 시장에서 더덕을 한 근 샀는데 손가락만한 것들이 몇 개
끼어 있었다. 그게 아마 일년생이었던가보다. 너무 작아서 그것을 먹는다고
나서기는 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하여튼 내키지가 않아 마당에 심어봤더니
신통하게도 새싹이 나와주었다. 그것이 가을에 씨를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
리는 식으로 가족을 늘려가더니 이제는 마당의 화단이 아예 더덕밭이 되었
다.
연전에 동생의 부인이 왔길래 더덕을 몇 뿌리 캐드릴까요, 했더니 이런 말
을 해서 혼자 속으로 웃은 적이 있다. "아유 그거 너무 쓰잖아요. 그걸 어떻
게 먹어요?" 나는 그때 아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제수씨도 십 년만
더 살아보세요. 아유 이게 이렇게 맛있는 건 줄 몰랐네. 하실 테니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이 음식의 쓴맛도 즐기게
되는 법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꼭 그렇기만 할까.
인간의 사이클은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흥미로운 데가 있다. 부모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는 싫거나 좋거나 규범적인 삶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저래야 하고, 요컨대 문명적인 삶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무한대로 주어진다. 의무는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권리형 의
무에 불과하다. 소위 첨단문명을 걷는다는 오늘날의 아이들을 보면 열에 아
홉으로 공주요, 왕자들이다. 그런 대우를 받는다. 그런 속에서 아이들은 쓴것
보다는 단것을 취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선입견이 발생한다. 쓴
것은 나쁘고 단 것은 좋은 것이라는.
공주처럼, 왕자처럼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제대로 된 길을 걷는 사람
은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제대로 된 길>이란 뭐랄까. 내 이익이 중요하다
면 타인의 이익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양심
적인 사람이라 하면 지나치게 상투적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열아홉 스물살 또래의 청소년들이 외제차를 몰고 가다
가 앞에서 털털거리는 프라이드를 받아버린 일이 있었다. 프라이드 따위가
외제차를 보고서도 길도 비켜주지 않고 얼쩡거리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받아
버렸다는 게 그들이 내세운 이유다. 이들의 부모는 대개가 부동산 따위로 떼
돈을 번 이른바 졸부들로 밝혀졌다.
졸부란 말 그대로 졸지에 돈벼락을 맞은 양반들이다. 돈에 대한 깊은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 돈벼락을 맞고 보니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
라서 허둥거리게 된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게 자신의 자식들을 돈으로 포장
하는 정도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류클럽>같은 류의 퇴폐적인 모임을 결성
하고 그 테두리 내에서 다람쥐처럼 왔다갔다 한다.
말이 좋아 상류클럽이지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세계는 좁아터진 골방
이요 독방에 불과하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작동원리가 가령 열 개라고 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한둘일 뿐이고, 나머지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려는
의지도 능력도 그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만 어울리다가 사라져갈 뿐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사회의 책임있는 리더로
부상하지는 못한다.
인생의 쓴맛을 일찍부터 터득한 사람들, 이를테면 정주영씨 같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결코 그런 식으로는 키우지 않는다. 근면과 절약을 가훈으로 채택
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교훈이야 기본이고, 일찍부터 사람 사회의 다양성을
습득하게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부를 이어가게 한다. 그리하여 그 자
식들은 부모가 죽은 뒤에도 흔들림이 없이 꼿꼿하게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
행한다.
몇 년 전에 윤구병씨가 <잡초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을 때 어떤 사람
이 그 책을 보며 비웃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 사
람은 그 책을 본 것이 아니라 책의 제목을 본 것이었다. 요컨대 책의 내용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제목만 보고 "왜 잡초가 없어, 잡초는 있지."하고 자기
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거만을 떤 것이었다.
그 사람의 그런 거만한 태도를 보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
에 감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로구나. 이렇게 스스로 감옥을 지어놓고 그 안
에 들어앉아 세상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람들일수록 민주주의라는 것을
소리높여 외친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결국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으로 군림하는 세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윤구병씨가 <잡초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평범한, 평범해서 진리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세상은 결코 나 혼자만을 위
해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하나나 혹은 둘이
아니라 수천 수만 수억만의 드러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오케
스트라가 수십 종류의 이질적인 악기들로 구성돼 있으면서도 하나의 일관된
화음을 내듯이, 이 세상 또한 그렇게도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저마다의 자
리를 지키고 있기에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총체성이 가능하다는 것.
요컨대 윤구병씨는 그 책을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소위 출세라는 것을
삶의 질과 연관지어 다시 생각해보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런 반성도 깊은 생각도 없이 그저 관행적으로 잡초라고 여기며 하대하는 이
세상의 무수한 존재들에 대해, 사람 사회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
는 기층민중들의 삶과 그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이제는 제발 건방은 그만
떨고 준엄하게 되돌아볼 것을 풀꽃처럼 낮은 목소리로 주문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런 책을 놓고 "잡초가 왜 없어, 잡초는 있지" 어쩌고 거만을 떠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제멋대로 악이니 선이니 규정을 해놓고 침략을 취미
처럼 행사하는 부시와 그 패거리들을 연상케 한다고 하면 내가 지나치게 염
세적인 것일까.
그렇다 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두렵다. 물리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혐오감
이 가세된 그런 두려움이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신뢰하지 못한다. 마당에
피어난 풀꽃 한 송이는 그 여리디여린 생명력으로 나를 감동시키지만 그들
의 수천 마디 말은 내게 하나의 지독한 소음으로나 작동할 뿐이다.
하다 보니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마당에 그득한 풀꽃들은 대개가
보라색 계통이고 그 다음이 노랑 그리고 하얀 것들이다. 보라색과 노란 것들
이 주는 그 시각적인 환상이 어쩌면 나로 하여금 이런 잔소리를 늘어놓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럴 것이다. 나는 지금 단독자로 존재하며 임의로 이 글을 쓰
는 게 아니라 풀꽃들이 던지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쓰기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