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일요일 아침 키스에 관한 짧은 생각

두꺼비네 맹꽁이 2003. 3. 12. 01:51


하루도 아니고 이틀째나 후배한테서 비비고 있는 중
이다. 크지도 않은 작은 방에 돌연히 기어들어와 버티
고 있는 내가 후배는 아마도 심난하리라. 말은 안 해
도, 눈치를 주지는 안 해도 없는 것보다 나을 이유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란 것은 조금 남아서, 아침에 눈을 뜨
는데 자고 있는 후배의 구부린 모습이 눈을 가득 채운
다. 내가 그를 불쌍하게 여겨야 할 까닭이란 도대체
가 없건만 가슴이 축축해지는 이것은 또 무슨 까닭이
냐. 당혹스러워서 벌떡 일어나 찬물을 좀 끼얹고 컴퓨
터를 열었는데, 그때 무슨 마술처럼 <키스>라는 단어
가 눈을 채운다.


떠드는 말이 부딪쳐 상처와 이별을 만들고
따뜻한 수증기로 스미면 마음의 키스가 되지
키스, 키스, 키스!
번역해서 뽀뽀는 얼마나 이쁜 말이냐
삶이 아프지 않게 시원하게
말은 사려 깊은 타월이 돼야지

매순간 모든 이로부터 버려질 쓰레기까지
뽀뽀하는 마음으로
"네 일은 잘 될 거야 네 가슴은 봄 바다니까"
인사하는 바로 그것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


아마도 어떤 노래의 가사쯤이나 되는 듯 싶은 이
문장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보다 보니 키스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사뭇 무거워
진다. 아니다. 무거워졌다기보다는 뭐랄까, 눈앞에서
뭔가가 자꾸 어른어른하는 것이 아무래도 키스의
진실(?)을 알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기도 하다.

확실히 알겠다는 것이 아니고 알 것 같다는 느낌,
이런 애매한 상태인 채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서리가 내려앉은 단풍나무 우듬지로 햇살이 비켜든다.
입을 벌리면 입김이 하얗게 뽀얗게 시야를 가리는 이런
겨울의 아침 햇살이란 또 그 얼마나 상쾌하냐. 이런
상쾌한 기분으로 키스를 한다면, 한다면 아마도 세상을
다 품에 안은 듯한 느낌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키스란 대체 무엇이냐. 나를 열고 너를 열고
그리하여 하나가 되고 그리하여 세상과 화해하고 섞여지는
것? 아니지. 이런 상투적인 문장으로 키스의 본래 모습을
다 얘기했다 할 수는 없지.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키스
가 진실의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거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자유를 들 수도
있겠지.

자유와 믿음과 진실이 들어간 것이 키스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보자. 키스를 할
때 교환하는 타액에는 어마어마한 량의 바이러스가 내장되어
있다는 것쯤은 뭐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바이러스의
성질은 대단히 치명적인 것이어서 상대를 몽롱하게 하는 마
취제로 작용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건 뭐냐. 잘하면 생명의 환희가 되기도 하고, 잘못하면
죽음이 되기도 하는 이 키스라는 것은 그러니까 결국 목숨을 걸고
하는 사업(?)이라는 얘기조차도 가능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상대에게 나를 건넬만한 진실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 키스의 묘한 매력을 인간이 발견하고 활용한
것은 그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한국을 포함한 동양에서는 키스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풍속화의 대가인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일본의 춘화집이나 중국의 방중술에서도
키스는 별 중요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러니 동양에서의 키스란 19세기
이후 밀려들어온 서양문물과 함께 시작된 근대화의 영향이라 보는 것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그러면 서양에서는 언제부터 키스를 발견하고 활
용하기 시작했을까.

성경을 보면 예수가 추종자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보다 이전 로마에서는 황제가 신하의 손에 입을 맞추는
의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너를 인정한다" 혹은 "내가 너의
죄를 사한다"는 정도의 이를테면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었을 뿐이다.
요컨대 오늘날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키스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었고, 게다가 입과 입을 맞대고 타액을 교환하는 키스와는
아주 다른 성질이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생각건대 남녀간의 키스가
오늘날과 같이 진보를 하기까지는 아마도 페미니즘운동이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훗날 "여자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문장으로
가끔 압축되어 회자되기도 하는 여성운동이 그 동안은 남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아이 낳는 기계로나 파악되던 여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였고, 이때부터 요샛말로 하자면 전희(前戱)라고나 해야 할 키스를
발견해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나 아닐까.

어떻게 보든, 어느 쪽으로 보든 키스가 상당한 에너지와 정성과 집중력
과 모험심을 요구하는 절차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매춘을 하는
여성들이 키스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항간의 풍문을 상기해볼
필요도 있다.

사랑이란 것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고, 간단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업이라는 것을, 매춘은 우리에게 반면거울로 비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당신이 현재 사랑을 하고 있다면, 오늘처럼 쌀쌀하고,
쌀쌀해서 영혼까지 상쾌해지는 이런 겨울날 아침에 일찍 떠오르는 해를
보며 정성을 다한 키스를, 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건성으로 그냥
살이나 대고 마는 키스가 아니라 정성을 다한, 믿음을 다한 그런 키스를
말이다.


아래 사진 하나는 키스의 정석, 다른 하나는 완전한 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