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2/幻

절망을 건너는 기술--아직도 남아 있는 꿈

두꺼비네 맹꽁이 2003. 3. 12. 01:47

어느 때인가 나의 화려한 꿈은 강냉이 튀기는 기술자
가 되는 것이었다. 요새처럼 자동차에 싣고 다니며 가
스로 불을 때고 자동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것이 아
니라 작은 지게에 길다란 망주머니를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두루 관광을 다니며 손도끼로 장작을 쪼개서
때고 손으로 기계를 돌리는 그런 강냉이 튀기는 기술
자. 그 당시 부르던 명칭으로는 <튀밥장사>.

어느 해인가, 내 나이 아마도 여서일곱 살쯤의 가을
이었을 것이다. 가을도 추수가 다 끝난 늦가을, 아침
이면 노란 국화꽃 위로 내려앉은 무서리가 이제 막 떠
오르는 햇살에 반사되어 가슴을 후비는 비수처럼 섬뜩
섬뜩하면서도 어쩐지 따뜻하게 여겨져서 그 앞으로 가
만히 쪼그려앉곤 했던 이율배반의 시기, 존재하는 모
든 것들이 낯설고 두렵고 서글프던, 그래서 그것을 피
하기보다는 오히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다가서고
만 싶어지던 그런 시기의 어느 날 그들은 내게로 왔
다.

저녁 무렵이었다. 서쪽을 보면 그냥 환장할 것만 같
은 가을의 주황빛 노을이 산등성을 따라 길게 퍼져가
는 참인데 마치 그 노을의 한 부분이라도 되는 것처
럼 꼬맹이 하나를 앞세우고 <튀밥장사> 아저씨가 지게
를 지고 터덕터덕 걸어왔다. 수확이 끝나 황량하게
텅 비어버린 논두렁을 따라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천천
히 다가오던 그들은 이윽고 작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잠시 사라졌다가는 마을로 들어섰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
게 내 기억을 채색하고 있는 그들은, 고맙고 자랑스럽
게도 그날 밤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옆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제 우리 마을에서 다음날
하루를 보낼 계획인 그들이 우리집에서 여장을 푼 것
은 사실 당연한 수순이기는 했다. 아버지가 그 무렵
마을 일을 보고 계셨던 까닭으로 지나다가 도움이 필
요한 사람은 으레 이장집을 찾게 마련이고, 그러면 그
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데 어디로 갈 필요 없이 우리집
에서 묵어가곤 했던 것이다.

<구루마>라고 불리는 우마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
던, 어쩌다가 자전거라도 한 대 볼라치면 신기해서 어
쩔 줄 몰라하던 시절, 군것질거리가 없었던 만큼이나
자랑할 일도 적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군것질이
란 기껏해야 할머니의 멀쩡한 흰고신을 훔쳐다가 바꿔
먹는 엿 정도였고, <튀밥>은 일 년에 한 번이나 혹은
두 번 정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품목이었다.

<튀밥>을 최고로 치는 까닭은 아마도 단순히 그저 먹
을거리인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가 된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뻥! 하고 터져 나오는 그 하얗고
가벼운 알갱이들, 작은 곡물들을 시커먼 무슨 도깨비
같은 무쇠덩어리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고 풀무질
을 해서 불꽃을 일으킨 뒤에 어느 순간 뚜껑을 열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그 하얀
알갱이들. 확실히 그것은 하나의 축제였다.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소리에 놀라서 밤에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고 얻어맞는 일쯤이야 뭐 그
냥 가볍게 넘겨버릴 정도의 그런 축제였다. 그런데
그 축제의 주인공이 다른 집도 아닌 우리집에서 하룻
밤을 묵었다는 것, 내게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랑스
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마구마구 자랑을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너도 알지? 우리집에서 잤어. 나랑 같이 잤어. 밥
도 먹었어. 세수도 하고 발도 씻었어."

적어도 열흘 정도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그런 자랑을
하고 다녔다. 열흘쯤 지나면 시나브로 잊어버리지만,
그러나 아주 잊혀진 것은 아니어서, 아이들과 어쩌다
싸울 일이라도 생기면 문득 그 자랑거리가 떠올라서
다시 또 써먹는 것이었다.

"너 임마, 튀밥장수 아저씨 우리집에서 자고 간 거
알지? 몰라?"

그러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더냐는 듯 나를 우러러보
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터인지
나의 꿈은 <튀밥장수>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학교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이 장래의 희망을 얘기하라 하면 <
튀밥장수>라고 말했고, 집에서도 가끔 그런 얘기를 했
다가 아버지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유년기에는 그렇게 철없이 이를테면 감상적으로 그
런 꿈을 가졌던 것이니까 원천무효라고 봐도 뭐 무방
할 것이다. 하지만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이르러 다
시 살아난 그 꿈은 어떻게 되나? 그랬다. 세상을 조금
씩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나는 그런 삶을 동경하며 반
드시 그렇게 살겠노라는 식의 다짐까지도 무수하게 반
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그림이었다. 시작을 모르는, 끝도 모
르는 채로 이 마을 저 마을 지구의 모든 마을을 돌아
다니며 아이들에게 <튀밥>을 튀겨주고 아무 집에서나
인심이 좋은 곳에서 하룻밤을 자며 다른 마을에서 있
었던 일을 얘기해주는 것,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른
마을로 가서 또 전날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는 것, 그
러다가 눈맞는 여인이라도 만나면 아이를 낳고, 그 아
이와 여인과 더불어 또 그렇게 다니는 것, 그런 삶.

그렇게도 화려하고 아기자기하고 신나는 소중한 꿈
을 가졌던 내가, 그랬던 내가 이제 와서는 무슨 이야
기를 짓는다고 골방에 틀어앉아 담배나 뻑뻑거리며 온
갖 인상 구기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다보면 문득문득
가소롭고 어이가 없어지곤 한다.

그러나, 그렇긴 해도 나는 아직 그 꿈을 포기하지는
않고 있고, 여전히 미래의 꿈으로 가슴에 넣어둔 채
세상이 팍팍해서 못 살겠다거나 이렇게 살아서 뭐할
까 싶어질 때면 으레 그것을 꺼내놓고 들여다보며 만
지작거리며 홀로 빙긋이 웃고는 한다.

그래,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그리고 그 시절의 꿈을 아직 잊지는 않고 있으니까,
언제인가는 그 때가 오겠지. 그럼, 오고야 말 거야.
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다 보면 절로 빙긋이 웃어지고
는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절망을 건너는 기술이라
고 한다면, 다른 이들은 웃을까?